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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 한완상 장학금

두달 전 어느날 아침 한완상 교수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학창시절 이상백 선생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사회학이란 학문에서 받은 도움을 후학들에게 되갚는 일을 하고 싶으시다는 것이 요지였다. 장학금, 학술상, 연구지원 등 여러 방안이 있을 것이라 말씀드린 후 댁으로 찾아뵙고 상의하기로 했다. 몇 차례 논의를 거쳐 ‘한민 한완상 장학기금’을 제정하는게 상백 선생의 뜻도 기리고 후학들에게도 격려가 될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서울대와의 실무적 논의를 거친 후 4월 25일 ‘한민 한완상 장학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당일 댁으로 모시러 갔을 때 선생님은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고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같은 표정으로 기다리고 계셨다. 이재열 교수와 임동균 사발연 소장, 그리고 이도훈 대학원 주임이 함께 한 자리에서 감사패를 읽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하시고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탁월한 사회학자 한민 한완상 교수께서 이상백 교수의 학은을 기리는 장학기금을 기탁 ….. 후학들의 마음을 담아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에 흡족해 하시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 선생님은 은사 상백 선생의 후의를 종종 말씀하셨다. 상백 선생은 역사적 접근을 중시한 연구자이지만 제자인 한민 선생께는 미국에 가서 그곳의 정통 사회학을 공부하고 오라고 권하셨다고 한다. 올림픽 위원회 위원으로 세계를 오가며 구한 귀한 선물을 주기도 하셨고 유학하는 제자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셔서 달러를 쥐어주시기도 했다. 상백 선생의 제자 사랑에 대해서는 김채윤, 신용하, 강신표 교수 등도 여러 형태로 언급한 바 있으니 좋은 스승의 영향력은 그만큼 깊고 다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나도 한민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혼자 서울로 유학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친척집 가까이 있던 수유동교회를 다녔는데 한완상 교수님도 출석하고 계셨다. 고3 시절 대학진학을 앞두고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고민이었다. 아버님은 법대 진학을 원하셨고 어머니는 신학교 진학을 바라셨는데 나는 그 둘 모두 피하고 싶었다. 전화가 없어 편지로만 간간히 소통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님이 한완상 교수님께 요청을 하셨던 모양이다. 어느 주말 저녁 한 선생님이 내 자취방으로 찾아 오셔서 김치 하나 놓인 식사를 하며 어머니과 내 진로에 관해 오랜 대화를 나누셨다.

일면식도 없는 지방의 한 어머니가 아들의 진학상담을 위해 서울대 교수를 만나고 싶다고 할 때 선뜻 응할 분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번듯한 장소가 아니라 누추하고 비좁은 학생의 자취방일 때 그 가능성은 전무하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자신 교수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을 대하는 내 자세를 성찰할 때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다. 어쨋든 그 날 나는 어렴풋이나마 사회학이 매우 포용적이며 기독교 신앙과도 접맥되는 매력적 학문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시던 어머니도 사회학을 한 후 신학을 하는게 좋다는 한선생님 말씀에 공감을 하셨던 것 같다.

한 교수님은 음악에 조예가 깊으셨고 성가대 지휘를 하고 계셨다. 노래를 좋아하던 나도 대학 진학 후 성가대에 합류했고 매주일 한 교수님 지휘 아래 찬양을 했다. 학과 교수님으로서 만나기 이전에 성가대 지휘자로 먼저 만난 셈이다. 성가대원들 중에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영향을 받은 분도, 미국사를 전공하신 시니컬한 교수님도, 전기공학을 전공하신 공학자도 계셨다. 그 성가대의 개성적이면서도 문화적이며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한교수님의 리더십과도 무관치 않았다. 성가곡의 장중함, 합창의 매력 못지 않게 코이노니아의 소중함도 이 때 배웠던 것 같다.

얼마후 한교수님은 교회를 옮기셨다가 새길교회라는 평신도 교회사역을 시작하셨다. 이 교회는 한국교회사에서도 참신한 시도로 주목을 받았는데 기성교회에 만족하지 못한 지식인들, 엘리트 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한교수님은 한국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해 오셨지만 한번도 기독교 신앙, 예수정신으로부터 벗어난 적은 없다. 실제로 한교수님의 저작들은 제목에서부터 성경과 예수정신이 뭍어나는 것이 많다. 많은 지식인들이 탈종교, 탈신앙, 탈기독교를 추구하는 시대에 특기할만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내가 사회학과로 진학한 직후 한교수님은 해직을 당하셔서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기독교서회에서 활동하실 때 찾아뵙기도 했고 복직후 사회학회장이 되셨을 때는 학회총무로 도왔다. 학회의 프로젝트로 한국전쟁연구를 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서장을 공동명의로 썼다. 김영삼 정부 초기 한교수님이 통일부장관으로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는 등 유연한 대북정책을 추진하자 이 글이 보수층의 공격소재로 부각되었다. 분단극복과 평화지향적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 정치적 공격의 빌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초고를 작성했던 나로서는 좀더 세심한 표현을 했더라면하는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하지만 한교수님은 한번도 그와 관련하여 언짢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90이 되신 노학자가 후학들을 위해 큰 돈을 쾌척하시는 마음씀에 깊은 감사가 솟구친다. 은사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 회상에서 학창시절의 인격적 만남이 얼마나 오래 기억되는지를 깨닫게 한다. 오늘 대학의 문화, 학과의 분위기가 저런 정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끈끈한 사제관계, 인간적 대화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동료교수들 사이도 예전같지 않다. 개성적이고 개방적이 되었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공동체적 연대감이나 상호신뢰는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불가피한 흐름이겠지만 아쉬움도 적지 않다. 한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사회학과가 겪어오고 이루어온 지난 역사와 족적을 공동의 자산으로 재구성해가는 일에 이 장학금이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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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매화

남도부터 매화 소식이 전해지더니 내가 근무하는 광주과기원 교정에도 매화가 피었다. 크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고고하고 은은한 자태가 새 봄을 알린다. 옛부터 매화는 절개의 표상으로 간주되어 사군자의 첫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유학자들은 고매(古梅), 한매(寒梅), 설중매(雪中梅) 를 즐겨 그렸는데 한겨울을 지나면서 꽃을 피우는 매화가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는 선비의 기개를 표상한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매화는 벗꽃에 비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벗꽃이 필 때면 상춘객들로 전국이 부산하지만, 매화를 찾아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최근 하동 섬진강변의 매화마을이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화엄사의 홍매나 선암사의 고매를 아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여전히 한두 그루 매화가 고고하게 꽃을 피운 자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치 않다. 고결함과 절개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21세기에 벗꽃의 화려함에 미치지 못하는 매화가 주목받지 못하는 건 당연할지 모르겠다.

매화를 좋아했던 퇴계 이황은 매화를 소재로 한 시 백여수를 남겼다. 매화를 매형이라 부르기도 한 그는 선비 정신을 대변하는 인물답게 엄동설한을 견뎌낸 절개를 매화의 전형적인 성품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의 매화시 가운데는 다소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있다.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매화 핀 창을 통해 또다시 찾아온 봄을 본다 / 거문고 마주앉아 줄 끊어진 것 탄식하지 마라.) – 또우 (又) 자에 주목해서 읽어보면 ‘다시’ 피는 매화, ‘다시’ 오는 봄을 주목하는 시인의 독특한 감수성이 느껴진다.

매화는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핀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낡은 고목에도 생명을 피워내는 그 꽃은 끝없이 재생되고 되살아나는 기운의 상징이다. 그러니 매화 다시 피는 걸 보는 이들이라면, 줄 끊어진 거문고에서 새로운 노래 울릴 때가 올 것을 믿을 수 있다. – 퇴계는 매화에서 이런 반복, 재생, 희망의 모습을 읽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보면 21세기에 매화는 절개의 상징으로보다 희망과 부활의 전령으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 다시 봄소식을 접한다는 것, 죽은 고목에서 꽃이 피는 부활이 실재한다는 것 – 매화의 새로운 이미지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래야 거문고줄 끊어져 상심한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를 담아 고목에서 피어난 매화와 퇴계의 싯구를 제사로 한 매화도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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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 ‘小山秘景’ 三樂

가나아트에서 전시 중인 소산 박대성 기념전인 ‘소산비경’을 관람했다. 월봉상 심사가 마친 후 두어시간 비는 틈을 이용해서 다녀오리라 세종서 상경하면서부터 작정을 했었다. 점심 장소가 시내로 잡혀 시간이 조금 촉박해졌지만 도진순 교수도 함께 가겠다고 해서 택시를 탔다. 역사학자인 도교수는 문화예술, 특히 서화와 작가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지닌 분이어서 늘 듣고 배우는 바가 많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더해져 풍성한 견학이 되었는데 가히 ‘소산비경 3락’이다.

제1락, 소산의 여러 최신 작품을 접한 즐거움이 크다. 일부 작품은 재작년 경주 솔거미술관의 코리아판타지 전에서 본 것이었지만 나머지는 새로왔다. 대작들은 금강산, 불국사 등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소품들은 담장과 산, 폭포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했다. 특히 2024년 작으로 되어 있는 ‘불국설경’은 인상적이었다. 이와 크기와 구도가 유사한 그의 1996년 작 “불국사”가 강한 농묵으로 소나무와 사찰을 표현한 이전 작품에 비해 이번 작품은 먹의 강도와 비중을 최소화하여 훨씬 밝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삼릉비경’은 흑백의 먹으로 그려진 신라의 풍경에 샛노란 달을 배치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 속에는 산 속에 부처와 탑이 만화처럼 자리하는 상상도가 종종 눈에 띤다. 또 하나의 대작 “금강설경”(2019)도 역시 기암괴석과 소나무를 최대한 자제된 갈필로 처리하여 웅장하면서도 담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왼편 아래에 ‘금강에 살으리랏다’ 시조가사가 한글 서체로 쓰여있다. 그림과 글씨가 하나라는 소산의 지론대로 그의 글씨는 조형미를 우선시하는 일종의 글그림이라 해도 좋을 듯 싶다. 두루마리 양식에 쓰인 그의 한시작품 역시 글자의 조형미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왔다.

제2락, 소산 화백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친필 도록을 받은 것이다. 작가와의 만남도 행운이었지만 소산이 자신의 작품집을 챙겨 내 이름과 작가 사인을 담아 선물해 준 것, 게다가 서대문까지 택시로 동승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망외의 즐거움이었다. 하바드 대학에서 개최되었던 소산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일, 경주 솔거박물관 코리아 판타지 전을 가 보았던 일을 들은 소산은 티없이 웃으며 좋아했다. 그를 창원대로 초빙한 적 있는 도교수는 이전의 기억들과 부인인 정미연 화백의 안부를 물었고 오랜 지기마냥 다정한 담소를 나누었다. 소산의 도록집은 Park Dae Sung – Ink Reimagined 라는 제목의 영문책자인데 정성들여 잘 제작된 일종의 박대성 연구서다. 미국에서 소산을 알리는데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김성림 교수가 대표집필하고 다트머스 예술박물관이 후원하여 출간된 것이다. 내용 중 ‘眞-幻 dynamics’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온다. 사물의 실재성과 작가의 상상력이 상호작용하면서 빚어내는 동양 산수화의 미학에 대한 해석틀인데 미술에만 국한될 것은 아닐 듯도 싶다.

제3락, 권상연 성당과 그 미학을 담당한 정미연 화백을 알게 된 것이다. 소산의 도록집과 함께 받은 [치유]라는 책자는 2021년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을 기리는 성당 건립과정과 함께 그 미학을 담당한 정미연 화백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검박하면서도 여성적이며 숭고하면서도 친근한 예수상과 마리아상이 이 뜻깊은 성당의 역사성과 신성함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이들이 순교한 장소에 세워진 것이 전동성당이고 그 아름다운 자태는 지금도 여전한데 230년만에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자 그들을 기념하는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한 카톨릭의 역사가꾸기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정화백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성당의 곳곳을 성스럽고 아름다운 작품들로 채웠는데 순교자의 아픔이 어딘가에 담겨져 있는 느낌이 든다. 암투병 중이었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런 육신의 질고를 겪고 있었기에 더욱 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 화백의 글과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십여년전 소천한 김영무 시인이 떠올랐다. 그는 암으로 투병하면서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시적으로 노래한 시집 [가상현실]을 출간했다. “시간의 뿌리와 공간의 돌쩌귀가 / 뽑혀나간 너의 현실은 안과 밖 따로 없이 / 무한복제로 자가증식하는 / 아, 디지털 테크놀로지 최첨단 / 암세포들의 세상 /…. 덫에 걸린 너의 삶은 / 순백색 빛의 나라, 가상현실” — 무한복제로 자기증식하는 암세포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한데 묶는 시인의 상상력에 놀라왔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정미연 작가 역시 암세포와 싸우며 고통을 은총으로 바꾸어주는 신앙의 힘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아름다움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저들의 모습에는 깊은 종교적 신심과 함께 예술혼의 숭고함이 깔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소산의 진지하고 한국적인 미학과 정 화백의 여성적이고 종교적인 미학도 그런 점에서 상통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life · 시공간 여행

매암동인과 節友

2024년도 1학기 개강을 했다. 서울대 정년 후 광주과학기술원에 부임한지 7번째 학기를 맞는 것이다. 봄같은 날씨 탓인지 학생들이 교내 곳곳에서 밝은 얼굴로 대화하고 오가는 모습이 유난히 정겹고 신선하다. 작년만해도 부분적으로 남아있던 코로나의 위축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난 실감이 든다.

교정을 걷다가 매화가 핀 것을 발견하고 3년전의 일을 떠올렸다. ‘이문회우’ 서예전을 개최한 후 제자들과 온라인으로 기념 모임을 했는데 이를 ‘매암동인’이라 불렀다. 매화가 피는 계절인 점도 고려했지만 그보다는 퇴계가 매화나무 아래 바위에서 그 후학들과 학문을 논의하던 정경을 기린 것이었다. 조선시대와 한학에 조예가 깊은 백광렬 박사의 제안을 따른 것인데 지금 들어도 멋스럽다. 퇴계는 매화를 좋아해서 ‘매형’이라 부르기도 했고 매화를 소재로 한 시가 백여수에 이르며 [매화시첩]이란 시집도 간행했다. 두향이라는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매화를 매개로 전해지기도 하며, 임종때 ‘매화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전한다. 그의 시에는 자연과 더불어 담담히 생활하는 선비의 자세가 여실하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속 집 창가에 기대서니 밤기운이 차가운데 / 梅梢月上正團團 매화 가지 끝에 둥그런 달이 두둥실 떠 있네 / 不須更喚微風至 새삼 살랑살랑 부는 미풍을 부를 새도 없이 / 自有淸香滿院間 온 집 안에 맑은 향기가 저절로 가득 넘쳐난다 /

步屧中庭月趁人 뜨락 거니노라니 달이 날 따라와서/ 梅邊行繞幾回巡 매화꽃 언저리 돌고 또 돌았다네/ 夜深坐久渾忘起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설 줄 몰랐더니/香滿衣布影滿身 향기는 옷에 가득하고 꽃 그림자는 몸에 가득하네 (陶山月夜詠梅)

퇴계의 매화사랑은 단지 음풍농월의 관조에 그친 것은 아니다. 퇴계는 매화가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의지를 특별히 강조 했다. 도연명이 난, 국, 죽만 노래한 것을 아쉬워하며 매화를 포함시켜 ‘절개있는 친구들’이라 불렀다. 松菊陶園與竹三 (도원엔 솔과 국화 대나무 더불어 셋이러니)/ 梅兄胡奈不同參 (매화는 어찌하여 함께 참여치 못했을까) / 我今倂作風霜契 (나 이제 모두 함께 풍상계를 만드니) 苦節淸芬儘飽諳 / (굳은 절개와 맑은 향기를 족히 알기 때문) — 그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사군자를 심은 화단을 조성하고 이를 節友社라 이름했는데 일종의 시적 의인화라 하겠지만 실제로 매화를 닮은 제자들에 대한 마음도 담겨 있었을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매화가 피니 [매암동인] 제자들이 생각난다. 다들 잘 지내며 새 봄을 맞아 그 향기가 옷과 정원에 그득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life · 오늘의 화두

이석증

당혹스러웠다. 한밤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일더니 천정이 팽그르 돌았다. 한참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겨우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다시 자리에 누우니 온 방이 도는 회전성 어지러움이 확 들이닥쳤다. 모로 누우면 바로 진정이 되지만 고개를 바로 눕히면 또 같은 증세가 밀려왔다. 뇌출혈인가? 하는 의심이 들면서 불안도 엄습해온다. 가슴도 답답하고 혈압도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불을 켜고 일어나 인터넷을 검색했다. 바로 누우면 어지럽다가도 일어나 앉거나 모로 누우면 진정되는 것은 전형적인 이석증이라고 했다. 속귀의 전정기관에 있는 이석이 떨어져 나와 평형고리관 속으로 들어갈 때 겪는 어지러움을 표현하는 이석증은 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증상이고 대체로 자연회복된다고 했다. 여러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뇌출혈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한밤 중에 식구들을 깨우는 소란을 겪지 않을 수 있어서 인터넷으로 얻은 정보가 이처럼 고맙고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일본 여행을 떠나기 전날이어서 출국을 할 수 있을 것인가는 또다른 문제였다. 한달여 전에 계획했던 니가타 여행을 지진으로 포기하고 새로 계획한 여행인데 내 컨디션 탓으로 또 무산시키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이석증이라면 그다지 위험한 것은 아닐터이고 일어서 다니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인천공항을 향해 새벽 버스를 타러 나서면서도 함께 떠난 처와 아들에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항의 모든 수속을 마치고 탐승하기 전에 나의 안색과 행동거지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처가 무슨 일인가고 다그쳤다. 그제서야 전날 밤에 겪은 상황을 말하고, 여행을 포기하고 병원으로 가자는 처와 아들에게 도리어 이석증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불안한 마음을 담은채 출발했지만 다행히 2박 3일간 여행은 별 문제 없이 잘 끝났다. 여전히 잠자는 자세는 모로 누워야 했고 첫날 식사 때 다소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았다. 조심하느라 온천욕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케 한잔 편히 마실 수 없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큰 일 없이 여행을 마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세종 집에 도착한 날 밤, 나는 큰 시험을 치룬 아이마냥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염려가 가셔서일까 그날 밤은 바로 누워서도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날 병원에서 내 상태를 들은 의사는 전형적인 이석증 증세인데 가볍게 왔다가 간 모양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 했다.

이 해프닝은 내게 두가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우선 몸이 얼마니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것인지가 놀라우리만치 피부에 와닿았다. 귀 속의 작은 돌멩이, 그것이 중력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내 몸의 균형을 바로잡게 한다는 사실, 미세한 돌멩이의 이탈이 내 온 몸을 흔들리게 한다는 과학적 진실이 새삼스러웠다. 동시에 내 건강과 생명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당연한 진실도 새롭게 깨달아졌다. 이곳 저곳 다니고 여러 활동을 참여하면서 나는 아직 건강하구나 자만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성경의 말씀대로 오늘 밤에라도 내 생명을 거두어가실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였구나 하는 반성도 했다. 이 일 이후 내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진 것은 단지 어지러움에 대한 조심 때문만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에 더 겸손하고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자는 다짐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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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해공, 2국가론

2월 6일 국민대 한반도미래연구원과 민주평통 교류협력분과위원회가 공동주최하는 라운드 테이블에 패널로 참여했다. ‘국제정세와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2024년을 전망한다’는 것이 전체 주제였다. 이 행사에는 조현 (서울대 교수, 전 유엔대사), 신각수 (세토포럼 이사장, 전 주일대사), 김천식 (통일연구원장, 전 통일부차관), 박명규 (GIST 초빙석학교수, 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 김병연 (서울대 교수, 전 국가미래연구원장)이 패널 발제자로 참여했고 김주현 초대 원장 (전 현대경제연구원장)이 좌장으로 토론을 이끌었다. 많은 숫자가 모인 것은 아니나 청중들의 경청하는 태도나 질문의 내용에서 진지함을 느낀 좋은 자리였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본관과 법학관 건물 입구에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이 서 있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소복히 눈덮인 동상 앞에서 잠시 국민대 설립자이자 초대총장이었던 해공을 떠올렸다. 해방 직후 건국을 담당할 인재양성을 위해 대학 설립이 긴요하고 그 새로운 대학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확신을 해공은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당시 미군정이 추진하던 ‘국립대학설립안’에 극력 반대했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1946년 9월 국민대학을 설립했다. 이 해에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과 서울의 국립서울대학이라는 두 대학이 쌍생아처럼 병립하게 된 현상은 제법 알려졌지만, 남한 사회 내부에서 국대안 파동 속에 국립 서울대와 민립 국민대가 함께 출범한 사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사립학교를 방문할 때면 으례 접하는 설립자의 동상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때부터인가 생각이 다소 달라졌다. 뚜렷한 사명감과 정신적 가치를 지닌 설립자의 삶이 귀감이 되는 경우에는 그런 상징이 대학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주요한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본 게이오대학에 있는 후쿠자와 유키찌의 흉상을 보았을 때 내가 느꼈던 부러움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해공의 동상 앞에서 변변한 상징적 인물을 내놓기 어려운 한국의 대학들, 특히 내가 다니고 근무했던 서울대학을 생각했다. 국립대학으로서 특정 인물로 상징화하기엔 어려움이 있을테고 보편적 인류적 사명감을 중시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빠리 소르본느에 꽁트, 파스퇴르, 위고의 흉상이 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만 해석할 일도 아닌 듯 싶다.

남북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려는 국민대의 정성은 해공 이래 대학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선한 노력이 아닌가 싶다. 김형진 교학부총장이 대독한 정승렬 총장의 인사말에서도 국민대의 이런 지향이 느껴졌는데 평화통일대학원 건립이 거의 실현단계에 도달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작금의 한반도 사정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일텐데 국민대의 건학이념에서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대체로 유사한 현실진단을 내리면서도 일부 쟁점에서는 상이한 견해들이 피력되기도 했다. 국제관계를 전망하면서 조현 교수는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약화, 유엔의 기능정지, global South의 확대, 경제와 안보의 수렴 등으로 인한 국제질서의 불안정성을 주요한 변수로 꼽았다. 특히 ‘취약국가 한국’이라는 표현이 눈에 띠었는데 변화하는 세계정세가 한국의 ‘취약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논지였다. 동북아 정세를 발표한 신각수 대사는 큰 틀에서 미중관계가 안정화되는 흐름을 보일 것으로 예측하면서도 중국경제의 부진, 미 대통령 선거, 북핵 고도화 등 여러 불확실한 변수에 대비해야 할 것을 지적했다. 특히 한미동맹을 위시하여 한일 및 한중간의 양자관계와 한미일 3각 협력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적극적 인태전략과 유럽연계를 통해 주변국에 의한 전략공간의 제약을 돌파할 필요성도 함께 지적했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김천식 원장은 1민족 1국가 1체제 통일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것과 남북한 동질성 회복노력을 지속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 맥락에서 북한의 최근 2국가론이 얼마나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지, 통일의지의 확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북한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고 특히 적대적 2국가론은 잘못된 발상임을 전제하면서, 남북간의 상호성을 규율할 전략적 프레임을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분단 80년이 가까워오고 유엔 동시가입 30년을 넘긴 남북한이 실질적으로 별개의 주권적 실체로 존재함을 인정하면서 상호통합을 추구하기 위한 새로운 발상과 동력을 탐색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의식에서도 무리하거나 급속한 통일보다는 평화공존 형태의 2체제 상태를 지지하는 경향이 높다. 이런 점에서 평화공존형, 통합지향형 2국가 상태를 필요한 중간단계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 쟁점은 객석에서의 질문과 토론으로도 이어졌는데 여전히 국가론과 민족론은 뜨거운 화두임을 느끼기에 족했다.

김병연 교수는 경제학자답게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빵에서 나오는 것이라 했다. 그런 맥락에서 김정은의 현 정책방향은 빵보다 총구를 중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 보았다. 내부의 시장효율성을 억제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는 오늘 북한의 경제는 지속가능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장기간의 국제제재와 내부자원결핍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강력한 군사주의와 동원체제를 유지해가는 나름의 물적 기반에 대해서 우리가 경시하는 것은 아닌지도 자문해 볼 일이다. 빵을 얻기 위해 총구를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독재자들도 역사에선 결코 드물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경제적 분석이 정치적 동학과 함께 숙고되어야 할 필요도 커지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세종으로 돌아온 다음날 RFA의 기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이날 내가 말한 논지를 잘 들었고 ‘한반도 2국가론’과 관련한 좀더 깊이있는 인터뷰를 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개학을 앞두고 여러 일들이 있는데다가 날짜 조정도 여의치 않아 다음 기회를 보자고 정중히 거절했다. 분명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따로 살자는 정서가 존재하지만 2국가론이라는 발상에 따르는 정치적 심리적 전략적 부담도 만만치 않아 고민스러운 것이 현실이다. 정주외국인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다종족 상황도 커지는 한국에서 전통적인 민족감정에만 기초해서 사회통합을 달성하기도 어려운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수년전에 “비대칭적 분단국가체제”로 이름했던 논지를 새롭게 다듬어 통일을 지향하되 2체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2 분단국가론”으로 좀더 정교한 틀을 발전시킬 필요를 느낀다. 나름 방향은 잡히는 듯 한데 당장 내딛을 길에 대한 확신이 아직은 부족하다. 아, 언제나 내 공부가 충분한 깊이에 도달할까, 임중도원 (任重道遠)이다.

activities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1980년대에 전북대학교에서 90년대에는 서울대학교로 옮겨 오랜 기간 교직생활을 함께 한 우한용 교수, 서경호 교수와 저녁을 함께 했다. 두 분 다 나보다는 선배지만 비슷한 시대에 대학생활을 했고 같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 인연으로 서로 좋아하고 최근에는 페북과 유네스코 활동을 통해 간간히 교류하기도 하는 사이다. 하지만 여유롭게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갖지 못했기에 정년을 한 이후 언제 한번 보자 하다가 이제야 그 약속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서경호 교수가 예약해둔 장소는 경복궁 옆 서촌의 한 조그만 한옥 까페 ‘한옥달’이었다. 좁은 골목길 안쪽 오래된 한옥을 그대로 활용하고 내부에도 전통적인 가구와 소품들을 배치한 예스런 분위기가 문화인들이 좋아할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한국측 위원장으로 활약한 서교수께서 경복궁의 문화재청에서 회의가 있을 때 종종 이용한 곳이라 했다. 음식도 이태리식을 한국인 입맛에 다소 퓨전화 한 것인데 맛깔스럽고 좋았다. 때마침 얕은 눈이 내려 작은 마당이 하얗게 덮였는데 강하지 않은 조명과 어우러져 옛날 어느 시대로 내가 돌아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한용 교수는 단편 10권, 중편 2권, 장편 5권의 소설집을 펴넨 중진 소설가다. 시집도 여러 권 출간했으며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다루면서 문학의 지경을 넓히는데 지금도 열정적인 분이다. 이 날도 소설집 [왕의 손님]을 증정받았다. 페북에도 적극적으로 글을 올리는 우교수의 글쓰기는 일상의 소재에서 인생사의 굴곡과 지혜를 찾아내는 중후하고도 맛깔나는 글로 페친들 사이에 정평이 나 있다. 나도 우교수가 올리는 글들은 늘 정독하는데 동서양의 시나 경구, 문학과 예술에 얽힌 각종 에피소드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소개하는 그의 글을 읽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올리는 글인데도 글의 길이와 깊이가 어느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여서 읽을 때마다 그 기억력과 상상력, 문장력에 경탄하곤 한다.

모임 바로 전에 뉴질랜드와 타이티를 여행하고 돌아왔노라 했다. 그 여행이 고갱에 대한 탐구와 맛닿아 있다는 것을 페북에서 읽어 알고 있었지만 쉽지 않은 여행동선을 들으면서 인문학자다운 탐사여행이란 생각을 했다. 내 페북에 보스톤 미술관에서 찍은 고갱의 대작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작품을 내 사진으로 올렸는데 우교수께서 ‘왜 그림 속에 웃는 여인은 없는가’고 물었었다. 고갱에 대한 깊은 관심과 맛닿아 있음을 뒤늦게 알았지만 제대로 답을 할 식견이 내겐 없었다. 고갱이 문명화된 빠리를 떠나 자연 그대로라 상상한 타이티로 갔으나 정작 파페에테는 당시에도 이미 도시화되어 있었던 현실에 실망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고갱은 파페에테의 ‘반얀트리’ 아래에 앉아 건너다 보이는 섬 우레아를 내다보고 또다른 탈출을 꿈꾸었다고 우교수는 적었다. 타이티를 두루 다니면서 그 답을 얻으셨을까?

서경호 교수는 [신해경연구]를 비롯하여 중국 고전문학의 탁월한 업적을 남긴 중문학자다. 또 [자메이카]라는 제목의 두툼한 장편소설을 상재한 작가이기도 하다. 하바드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지구촌 곳곳의 문화유적에 해박한 분이다. 전북대 시절부터 그의 자유롭고 폭넓은 식견과 문화적 포용력을 좋아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장으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융복합적 사고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늘 강조한 분이기도 하다. 작년부터 나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을 받아 간간히 회의에서 뵙는 기회가 있었지만 좀처럼 긴 시간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갖지 못했다.

나는 서교수님을 볼 때면 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린다. 탁월한 중문학자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소설이 다룬 시공간적 배경의 스케일이 매우 큰 것에 더욱 놀랐다. 그 소설은 한반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지구적인 동학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미래의 어느 시점을 상정한 상상력이 빚어낸 그 작품은 예상 가능한 국내의 징치동학과 해외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치밀하게 녹여내 미래학 탐구서로 사용되어도 좋을 정도였다. 이 소설에서는 한반도가 통일되는 대신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일종이 완충구역을 두자는 안이 미국을 비롯한 주변강국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소설적 상상력이지만 역사적인 개연성이 없다 할 수 없는 미묘한 포인트가 흥미롭지만 무겁게 전개된다. 임진왜란 전후하여 주변국가들 사이에 한반도 분할안이 여러 차례 등장했던 역사적 경험들을 떠올렸었다. 새 소설은 쓰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치신다. 한반도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재미있고 역동적이기보다 힘겹고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이행하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두 병의 와인을 비우면서 나눈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즐거웠고 유쾌했으며 식견이 넓어지는 망외의 소득까지 있었다. 까페가 문을 닫는 시간까지 떠들다가 지하철도 함께 타고 각자의 집으로 갔다. 떠나기 전 찍은 사진을 다음날 보냈더니 우교수께서 ‘이 건달들을 어찌할 것인가’라고 적고 ‘호모 비아토르’라고 덧붙였다. 여행하는 자,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자라는 뜻인데 프랑스 철학자 마르셀이 인간의 속성으로 규정한 말이라 한다. 그 표현이 정겹게 느껴져 이 사진에 ‘호모 비아토르 – 아름다운 건달들’이란 이름을 붙여두었다. 모두들 건강하고 그 멋진 필력과 상상으로 더 많은 작품 남기시길 기원한다.

life · 시공간 여행

단양과 삼봉

큰 딸 내외, 아들, 손주 들과 단양 여행을 했다. 아시아나 마일리지 소멸분을 이용해서 편하게 가 볼 곳으로 이곳을 선택한 것이 한 달여 전이다. 단양은 이름만 들었지 실제로 가볼 기회가 없었다는 아이들은 좋아했다. 세종에서 단양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는데 어차피 손주들 중심의 여행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오가는 길의 풍광이나 문화적 요소는 큰 변수가 되지 않는다. 편안한 잠자리, 즐겁게 놀만한 시설과 공간, 맛있는 음식과 여행의 즐거움이 가장 중요한 것, 두루 괜찮은 가족여행이었다.

단양팔경이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지질학적으로 독특한 기암괴석이 산과 강과 어우러져 소금강이라 할만한 명승지가 여러 곳이라는 학창 시절의 교육 탓이다. 어릴적에 들었던 이런 내용은 대체로 현지에서는 실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솔직히 이번에도 실제 모습이 명성에 미치지 못한 느낌이 강했다. 지구 곳곳의 기이한 풍경과 관광지를 가보거나 영상으로 접하는 경우가 많은 현대인이 이동이 제한된 과거의 평가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오래전 역사지식과 여행객의 들뜬 정서를 잘 섞으면 명승지에 온 기분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상상력이 쉽지 않은 아이들이나 일반인에게는 과거의 명성보다 맛집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도담삼봉의 모습은 아름다왔다. 차들이 달리는 큰 길과 바로 옆의 주차장, 그리고 멀리 보이는 아파트를 제외하고 보면 가히 명승지라 이름할만하다. 강 가운데 솟은 세 봉우리가 지는 해를 등지고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뒤섞여 한폭의 동양화를 선사한다. 조선왕조 창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정도전이 자신의 호를 삼봉으로 한 것이 이곳과 관계가 있다는 말도 전한다. 고려말 권신들을 비판하다가 유배와 유랑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때 제천 지방에도 잠시 머물렀다는 것이 근거인 모양이다. 하지만 삼봉이란 지명이 곳곳에 있는 데다가 정도전이 삼봉재라는 집을 지은 곳이 삼각산이었음을 고려하면 이곳보다 삼각산과 더 깊은 연관이 있을 개연성이 훨씬 높다. 불교에 기반한 고려체제를 혁신하고 신유학에 기초한 새 왕조 창건을 꿈꾸고 추진했던 혁명가 정도전을 생각하기에 도담 삼봉의 규모는 너무 작고 기세도 완만해 보였다.

삼봉 정도전은 한국사에서 접하는 몇 안되는 혁명적 사상가였다. 아니 사상적 혁명가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평범한 권신배와는 전혀 달라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려 하지 않은 담대함이 있었고 당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 혁신적 인물이다. 조선왕조의 기틀을 쌓은 여러 조치들, 전제개혁, 사병철폐, 조선경국전, 한양천도, 숭유억불 등은 모두 정도전의 작품인데 어느 하나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정도전은 장량이란 별호를 갖고 있었는데 이성계와 자신의 관계를 한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빗대었기 때문이라 한다. 정도전은 유방이 장량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하여 새 왕조를 개창했다고 할만큼 자부심이 컸으며 실제로 국왕보다도 재상의 역할을 중시하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상상력과 미래비전의 폭과 깊이가 대단하다고 여겨지는데 이런 인물에 대한 우리의 이해수준은 너무 빈약하다.

온달산성 앞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궁궐과 왕성의 세트장에서 지난 역사를 떠올리게 된 것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경험이었다. 여러 사극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이용되었다는 이곳은 온달산성을 배후로 하고 앞으로 강이 흐르는 곳인데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실감 나게 만들어 특히 아이들에게 역사적인 시공간감각을 갖게 하는데 좋아 보였다. 유적지로서의 제약도 거의 없어 관람객이 왕궁의 용상에 올라 앉아 사진을 찍어도 괜찮았다. 쌀쌀한 겨울날,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산성 앞에서 왕실의 생활공간과 백성들의 마을 모습을 보노라니 나도 타임머신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온 느낌이 든다. 몇 년전 와본 최완규 총장의 멋진 별장에서 들렀던 보발재가 멀지 않아 그리로 가볼까 하다가 아이들 생각에 그만두었다. 이곳은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 백제가 서로 다투던 ‘중원’ 지역이라는데 지금은 너무도 한적하고 온달산성조차 평온한 관광지가 되었으니 ‘산천은 의구하다’는 옛말도 언제나 맞는 말은 아닌 듯 싶다.

life

필노시신 (筆老詩新)

신용하 교수께서 또 한 권의 대저를 출간하고 친필 서명과 함께 송부해 주셨다. 이미 간행된 [일제강점기 한국민족사] 상, 중에 이은 하권으로 제목을 달았지만 부제인 “1931년-1945년 한국의 민족과 사회”라는 제목의 독립 저서로 간주해도 무방한 책이다. 책갈피에는 그동안 출간한 신용하 저작집 66권의 제목이 빼곡히 적혀있어서 일생에 걸친 학문적 집념의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90을 향해가는 노학자의 책이 700쪽이 넘을 뿐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의 부족한 논문들까지 일일이 찾아 인용하고 실사구시적 서술방식을 견지하신 연구자로의 일관된 자세가 새삼 놀랍고 경탄스럽다.

이 책은 서장, 종장을 포함하여 총 1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루는 주제가 포괄적이다. ‘일제의 만주침략과 대륙침략 병참기지화 정책’ (2장),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의 활동’ (3장),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무장독립운동'(4장), ‘동북인민 유격부대의 항일무장투쟁'(5장), ‘조선어문 수호 연구활동과 문자보급운동 및 브나르도 운동’ (6장), ‘1930년대의 문학예술’ (7장), ‘한국민족말살, 황국신민화정책’ (8장) ‘대륙침략 병참기지 확충과 군수산업'(9장), ‘일제 공출정책의 물자강탈과 조선인 생활상태’ (10장), ‘조선인 징용, 징병 정책과 강제연행’ (11장), ‘조선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12장), ‘중국 관내에서의 독립운동과 조선의용대 및 한국광복군 창설’ (13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합정부로의 개편’ (14장) – 제목만으로도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과 한국인의 독립운동 전반이 망라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책의 구성 내용을 살펴보면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은 기본적으로 조선 내부에서 전방위적으로 진행된 것이었음에 반해 독립운동은 대부분 한반도 바깥, 주로 중국 관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일제의 가혹한 통치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존재하기 어려웠음과 중국을 근거지로 하는 해외의 독립운동이 해방운동의 주요동력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만큼 부나르도 운동, 조선어문수호활동, 문학예술운동 등은 국내에서 조선인 전반을 대상으로 진행된 운동으로 새롭게 주목된다. 비록 비정치적이고 비폭력적인 운동이었지만 국내의 이런 흐름이 해외 독립운동세력과 함께 해방과 독립의 동력이 되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다만 선명성과 정치성에서 해외 부분이 정당성과 상징성을 더 컸던만큼 해방 공간에서의 주도권을 해외독립운동가들이 지니게 된 것도 어떤 점에서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독립국가건설과정에 외세의 영향이 강력했던 것도 이런 해외세력들의 과잉대표성, 국내세력의 미진한 발달에 그 일단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신용하 교수님의 대부분의 책이 그러하듯 이 책도 철저하게 사료와 전거에 입각하여 서술되어 있다. 흔히 좌파와 우파로 구분되는 독립운동의 여러 흐름과 정파들이 망라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한국과 일본, 중국 간에 일종이 역사전쟁의 대상이 되고 국내에서도 정파적인 해석에 따라 역사서술의 향방이 달라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사실에 입각하여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겠다는 연구자의 자세는 그 자체가 귀하고 전범이 될 만하다. 대가라고 부를만한 학자들이 사라지고 작은 쟁점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연구자들만 많아지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런 노학자의 대작을 접하니 과연 연부역강 (年富力强) 이란 말의 전형이다. 신용하 교수님 회갑기념논총을 증정할 때, 나는 ‘필노시신’ (筆老詩新) 이란 글씨를 써서 헌정해 드렸는데 연륜이 더할수록 더 새로운 작품이 쓰여지기를 바란 그 기대가 여실히 이루어지고 있는 놀라운 모습이다. 감사하고, 그에 미치지 못함에 송구한 마음을 금하기 어렵다.

activities · life · 오늘의 화두

sing again, life again

싱어게인 3 프로그램의 마지막 공연이 끝났다. 실력있는 무명가수들의 노래를 듣는 즐거움이 크지만 누군가는 탈락해야 하는 모습을 보는게 힘들어 중간에 채널을 돌리곤 했던 프로다. 최종회는 선정된 일곱명이 더이상 탈락의 두려움 없이 자기 이름을 걸고 노래하는 자리여서 나도 부담없이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누구는 10여년을 자취방에서 위축되어가는 자존감과 싸우며 음악을 했고 누구는 지방에서 작은 까페를 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을 날을 기다렸으며 어떤이는 캠핑장의 야외무대에서 십수년 무명가수 생활을 했다. 하지만 한결같이 오랜 기다림과 좌절의 터널을 벗어나 새로운 미래와 희망을 노래하려는 열정이 충만했다.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온 자만이 드러낼 수 있는 울림이 이들의 말과 음율 속에 담겨져 있었다.

여느 음악 프로그램보다 힘든 환경에서도 뮤지션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키려 한 이들의 열정이 강렬해서 노래실력 못지 않게 선곡한 노래의 가사에도 주목하게 된다. 스스로를 산골가수라 불렀던 신해솔이 ‘곡예사의 첫사랑’을 선곡한 이유가 힘들지만 웃어야 하는 곡예사의 삶이 가수를 지향하는 자신의 삶과 같아보였기 때문이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이젤은 DAY6의 ‘한페이지가 될 수 있게’라는 노래를 통해 오늘 하루의 삶이 인생 사진첩의 멋진 한 부분을 장식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소수빈은 ‘한번만 더’라는 노래말로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신을 응원하고 격려하려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했다. 나로선 한두곡을 제외하곤 잘 알지 못하는 곡들이지만 부르는 이의 진속한 마음을 느끼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강성희가 드라마 미생의 OST 였다는 이승엽의 노래 ‘날아’를 부를 때 그 가사가 뭉클하게 다가와 눈자위마저 뜨거워졌다. “모든 것이 무너져있고 발 디딜 곳 하나 보이질 않아 … 눈을 뜰 수 조차 없게 한대도/ 거기서 멈춰있지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얼마나 오래 지날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견딜 수 있어 날개를 펴고 날아/ …. 차갑게 내뱉는 한숨이 널 덮어 숨을 쉴 수 조차 없게 한대도/ 거기서 멈춰있지마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 우리 시대 모든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최종우승은 홍이삭에게 돌아갔다. 아프리카에서 선교와 교육활동을 하신다는 부모와의 대화가 소개되었다. 아들의 음악활동을 충분히 뒷바라지 하지 못한 미안함을 표현하는 아버지와, 번듯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늘 죄송했다는 아들의 말이 아름답고 진솔하게 느껴졌다. 홍이삭은 이 프로그램에서 뮤지션으로서 자신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유통기한이란 말을 했을 때 나는 유발 하라리가 말한 ‘무용계급'(useless class) 을 떠올렸다. 사회에서 쓸모가 없는 사람들로 평가받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암울한 전망이 이 신조어에 담겨있는데 유통기한이란 말이 인생의 쓸모를 확인받아야 하는 절박함을 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경연을 거쳐오면서 유통기한이란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참 다행스러운 결론인데 과연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저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홍이삭이 선곡한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는 나도 간간히 불렀던 곡이다. 조용필의 노래 ‘꿈’은 화려한 도시생활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의 상실감을 너무도 잘 표현해서 수업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바람의 노래 역시 음미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아야 해/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 꽤 긴 삶을 지나온 나는 이 바람의 노래를 들은 적 있었을까?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을 비켜갈 해답이 사랑임을 깨달았던가? 나는 살아가는 방법과 지혜를 알고 있는가? 그 노래는 곧 나의 물음처럼 다가왔다.

스페셜 무대로 임재범이 나와 부른 노래는 모든 참가자들의 마음을 대변하기에 족했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자신을 가둬두었지/ 이젠 이런 내모습 나조차 불안해 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싶어/ 그렇게 많은 걸 잃었지만 후회는 없어 그래서 더 멀리 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것보단 혼자를 택한거지 고독이 꼭 나쁜 것은 아니야 /외로움은 나에게 누구도 말하지 않은 소중한 것 깨닫게 했으니까 / 이젠 세상에 나갈 수 있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줄거야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다시 새롭게 시작할거야 더이상 아무것도 피하지 않아 이세상 견뎌낼 그 힘이 되줄거야 힘겨웠던 방황은”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줄거야’ / ‘그곳은 네 자리가 아냐, 그대로 일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 노래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새로운 시작, 어게인의 기회가 있을 것이다. 꼭 현실적인 성공이 보장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자존감의 회복, 살아갈 이유의 확인 만으로도 어게인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 영적인 깨달음은 차원을 달리하는 거듭남의 길일 것이다. 오랜 시간 ‘무명’의 아픔을 견뎌야 했던 이들이 ‘sing again’할 기회를 만난 것처럼 인생이 뜻같지 않아 힘들어하는 사람들, 특히 미래의 불확실성에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이 ‘life again’의 꿈과 희망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