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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합, 전환, 거버넌스

독일측 참가자의 발제에서 ‘전환’이란 개념이 부각되고 있는 모습이 흥미로왔다. 통일이나 통합 대신 전환이란 말을 사용하는 데서 ‘평화혁명 35주년 기본법 75주년’을 맞고 있는 오늘 독일의 지성적 흐름을 느껴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전환이란 말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탈냉전 후 사회주의 체제의 시장경제화를 논의할 때 ‘체제전환’이란 개념이 널리 사용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인터넷의 일상화와 정보화를 포함하는 ‘디지털 전환’이란 말이 종종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독일측 발제에서는 이 말을 통해 통일 이후 독일사회가 겪는 다차원적 변화를 종합적으로 다루려는 새로운 의도가 읽혀지는 듯 해서 흥미로왔다.

독일은 통일보다 통합이란 말을 선호했었다. 통일이란 특정 시기의 정치적 이벤트로 보지 않고 긴 역사적 변화, 진행중인 프로세스로 파악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이제 전환이란 말을 내세운 데는 과거 30년의 역사경험에 한정하지 않고 미래지향적 변화를 포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리히 작센주 장관은 구동독의 시장경제화, 제도통합 등의 과제에 더하여 디지털화, 기후변화, 탈탄소화 등 21세기적 과제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최근 정체성을 둘러싼 혐오정치와 종족주의가 대두하는 위험도 단지 통일의 후유증, 통합의 미흡함으로 간주되기보다 새로운 사회관계 형성에서 경험하는 미래에의 불안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과거의 경험과 유산에 한정되지 않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노력과 숙제를 고민하려는 의도가 ‘전환’이라는 개념 뒤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종합토론에서 독일측 위원 세 분이 한반도 통일에 대해 조언을 했는데 나는 ‘전환’이란 말과 ‘복합 거버넌스’라는 두 측면에서 이들의 공통된 관점을 읽을 수 있었다. 통일은 결코 분단국가가 이전상태로 되돌아가는 회복정치가 아니며 다양한 안팎의 변수가 뒤엉키는 역동적 과정인만큼 다면적 전환 프로세스를 감당할 역량구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장기적 시야가 필요하고 모순적이고 예기치 않은 요소들을 다룰 총체적 거버넌스가 중요하다는 말일텐데 사실 그것이 선진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급한 문화지식적 소프트 파워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먼저 슈납파우프 박사가 말한 것은 “현실은 준비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통일의 역동적 과정을 지켜보며 실무를 담당해 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메시지였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는 우연성, 의외성, 불확실성을 감당하기 위한 조직과 거버넌스를 특히 강조했다. 역사가 격동의 물결에 휩쓸릴 때 그 흐름을 읽으면서도 방향을 조정할 유연한 조율역량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아니다. 통일이라는 매우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다원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을 관리하고 통제하며 향도하는 복합적 거버넌스가 필수적이리라.

브레멘 대학 총장이자 경제학자로서 귄터 박사는 체제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했다. 체제가 잘못되어도 그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과 특정 영역의 경험은 소중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으며 인간적 상호존중과 신뢰구축이 효율일변도 정책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녀는 발제에서도 동독의 과학기술수준이 결코 형편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통일과정에서 그 역량과 경험이 무시당한 것의 후유증이 매우 컸음을 언급했다. 북한의 체제비판이나 남북한 경제격차를 다룸에 있어서도 냉정한 현실인식에 더하여 체제론이나 이념적 차원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인간과 사회를 중시하는 연구자적 시각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작센주 장관이기도 한 둘리히 위원은 통일이 목표가 아닌 과정, 심지어 중간단계일 수 있음을 인식할 것을 주문했다. 지나보면 통일은 긴 전환과 변화의 한 지점이었고 통일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도 아닌 것이 금방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는 통일과정이 자칫 정치적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성을 언급했는데 그런 감정은 일단 형성되면 매우 오래 부정적인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독일의 사례도 단지 참고사항일 뿐임을 강조하고 너무 독일정책을 모델화할 필요가 없음을 언급했다. 결과론적 해석이나 체제 중심적 접근보다 인간적 사회적 측면이 강조되어야 하며 특히 청년세대의 미래와 긍정적 전망이 통일과정과 연계될 수 있어야 함을 지적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미 통일을 달성한 독일사회에서나 가능한 여유있는 시각이라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독일의 논의에 대해 부럽다는 인상을 언급한 한국측 위원들도 여럿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 전반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타산지석으로서의 의미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단일목표지향형 사고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통일은 남북한과 동북아, 세계체제의 변화와 상호연동되는 복합적 과정이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리, 정체성 등 삶의 전 영역에 걸친 재조정을 요구하는 대전환이다. 이런 과제들의 선후와 완급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복합적 거버넌스가 통일역량의 요체인 바, 그것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 소프트파워와 지정학적 환경이 함께 작용하는 사안이다. 통일이란 쟁점이 국내정치용으로 이용되거나 국제정치의 명분으로 활용되기 쉬운 우리로서는 진지하게 유념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독일의 경험을 박제화, 정형화하지 않으먄서 현재진행형 교훈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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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수관계와 2국가론

북한이 남북한의 동질성과 민족통일론을 부정하고 적대적 2국가론을 표방한 이래 남북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우리 사회의 큰 쟁점이 되었다. 적대적이란 말에 담긴 군사적 위협도 문제지만 ‘통일을 향한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오랜 합의가 더이상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기본원칙으로서의 힘을 잃게 되는데서 오는 문제가 만만치 않다. 한국 사회 내에서도 청년층 사이에서 통일을 추구하기보다 두 국가로 공존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확산되고 있다. 교류협력을 기초로 점진적인 통일과정을 상정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고수할 것이냐 새로운 통일방안을 마련할 것이냐도 이런 맥락에서 따라오는 현안이다.

분단시기 동독이 2국가론을 내세웠고 동서독 기본조약이 우리 기본합의서의 모델이었다는 점에서 기본조약과 통일의 관계를 다룬 안드레아 행어의 발제가 주목을 끌었다. 건강문제로 참여하지 못한 그의 글은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기본조약 체결로 동서독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 2) 서독은 통일조항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통일정책은 뚜렷하지 않았고 실질적 2국가상태가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3) 1990년의 통일과정은 예상하거나 기획한 것이 아닌 ‘즉흥적’ 사건이었다. 기본조약을 체결한 후 에곤 바는 “아무 관계가 아닌 것에서 나쁜 관계로 이행했는데 이것은 진전이다”라고 했는데 이 ‘진전’이란 말 속에 통일의 미래가 담겨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기본조약 체결 이후 동서독간에는 페터 벤더의 말처럼 “서독은 승인없는 교류만을 원했고 동독은 교류없는 승인만을 원”하는 동상이몽이 오래 지속되었다. 통일은 동독에서 일어난 ‘평화혁명’이 결정적인 변수였고 그런 점에서 즉흥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 독일통일과 기본조약의 연관성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내 질문에 대해 행어 대신 발표를 맡았던 슈납파우프 박사는 여러 요인 중 하나임은 인정하면서도 “통일은 통일정책의 산물이 아니었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2023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12차 회의에서 그는 ‘포괄적 조약체계 내 구성요소로서의 기본조약’이란 글을 발제했었다. 그의 논지는 동서독 기본조약은 다른 여러 조약들, 즉 서독이 추진한 70년 모스크바 조약과 바르샤바조약, 그리고 73년의 프라하 조약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기본조약이 동서독을 조약관계로 변화시켰지만 통일이란 목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는 점도 강조했다. 연방헌법재판소는 기본조약이 분단조약에 해당되지 않으며 ‘통일명제에 따라 독일 민족이 평화와 자유 아래 국가통일을 다시 이룰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할 것’ 이라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음을 들어 통일조항의 유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언제나 진지하고 깊은 생각을 피력했던 분이어서 나로서는 계속 생각할 화두 하나를 얻은 느낌이었다. 작년 그의 발제문을 다시 살펴보면서 기본조약과 통일의 관련성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는 기본조약에 의해 동서독 관계에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정작 기본조약 1조가 표방한 ‘정상적이며 상호우호적인 이웃관계’ 수립이라는 목표는 전혀 구현되지 못한 희망사항으로 남아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발제문 행간에서 기본조약이 수행한 역할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통일은 동서독 관계의 개선을 포함하되 그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헬싱키 프로세스와 유럽통합, 탈냉전의 전과정과 연관된 흐름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통일은 통일정책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말은 동서독 관계개선이 통일의 충분조건일 수 없다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겠다.

김천식 원장은 변화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통일의 당위성은 변함이 없으며 반드시 추구해야 할 민족적 과제임을 강조했다. 오랜 단일민족적 배경과 강한 통일의지가 중요함을 지적하고 북한의 2국가론을 반민족적, 반통일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그 기본정신을 수용하면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강조했다. 현재 국면에서 어떤 새로운 대안이나 원칙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 듯 보였다. 김병연 교수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그 중간단계로 ‘경제공동체’를 설정할 것을 제안했다. 남북이 경제영역에서 같은 공동체로서의 통합을 이루는 것은 통일로 이어지기 위한 필수적 전제가 아닐까 하는 그의 주장은 깊이 숙고해볼 쟁점이 아닌가 싶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실질적 2국가 상태로의 이행을 당연시하는 국내의 여론에 대응하는 새로운 통일담론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가 만만치 않은 숙제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통일이 국내외 수많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과 뒤엉키면서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임을 고려하면 통일에 대한 분명한 주체적 의지, 민족적 열정을 재확인하는 것 못지 않게 21세기 지정학의 복잡한 흐름도 반영하는 총체적 비전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세션을 거치면서 두 가지 공부거리를 내 스스로 던지게 되었다. 1) 우리는 너무 통일을 남북관계 중심으로만 사고하는 편향을 지니고 있는 것 아닐까? 한 때 남북기본합의서나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통일로의 대장정인 듯 믿었던 과잉기대가 우리 사회 일각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을 남북간 합의만으로 성사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발상도 마찬가지다. 2) 남북간에 실질적 2국가상태가 강화되는 것과 통일을 추구하는 노력은 반드시 상충하는 것일까?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은 당연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지만 별개의 주권체로서 남북간 국제법적 관계가 진전되는 것이 반드시 영구분단이나 반통일로 이어질 필연성은 없다는 사실을 독일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다층적인 변화가 역동적 결과로 이어지는 역사의 미묘한 공간을 포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기를 맞이한 셈이다.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가는 노력 속에 이런 섬세함이 담겨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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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차 한독통일자문회의

13차 한독통일자문회의가 부산 해운대에서 이틀간 개최되었다. 독일에선 카스텐 슈나이더 연방 총리실 정무차관을 대표로 한 이십여명이 참석했고 한국에선 문승현 통일부차관을 대표로 한 이십여명이 발표와 토론에 참여했다. 독일측 참가자 중에는 슈납파우프, 콘첸도르프 등 여러 차례 만난 분도 있지만 새로운 얼굴도 많았다. 지난번 베를린 회의에서도 뵈었던 쉬뢰더 총리, 텔칙 차관 등은 이제 먼길 여행이 어려워졌다 한다. 한국측에선 통일부의 2030 청년자문단이 자리를 함께 해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양국 대표의 기조발제는 현재 두 나라가 처한 상황을 잘 짚어주었다. 문승현 차관은 하노이 회담 실패 이후 경색된 남북관계가 최근 북한의 전략적 입장변경으로 더욱 악화되고 있는 현실을 설명했다. 향후 북한의 도발이 심화되고 한반도 군사긴장이 고조될 것을 예상하면서 북한의 의도가 미국신정부와의 핵담판, 한미일 안보협력구도에 대한 반발 등으로 보인다는 판단도 덧붙였다. 한국정부는 ‘힘에 의한 평화’ 원칙에 입각하여 무력도발을 불허하고 대화와 외교로 해결을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북한주민 인권개선과 탈북민 적극 포용의 노력을 지속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란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통일담론의 확산을 주요한 과제로 제시하면서 “자유는 통일의 전제조건‘이라는 콜 수상의 말, 그리고 ’신의 옷자락을 붙드는 정치력‘을 강조했다.

슈나이더 차관은 최근의 동향과 조사자료를 근거로 현재 독일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특히 구동독 지역에서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인종주의적 정서와 에너지 문제에 우려를 언급했다. 구조적 차별은 뚜렷하지 않지만 자기 지역이 뒤쳐져 있다는 느낌, 지역이탈이나 지위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동독지역에 여전하다는 점, 그래서 통일에 대한 동부지역의 평가가 10년전보다 훨씬 부정적이 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포퓰리즘 정치의 사회문화적 토양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하면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강화로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통일과 통합을 위해 최근 두 나라에서 추진되고 있는 새로운 활동을 확인하고 공유한 것도 뜻깊었다. 독일은 재작년부터 사통당독재희생자 특임관 제도를 두고 희생자들에 대한 총체적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또 2030년 완공을 목표로 ‘평화혁명과 유럽통합의 전환을 향한 미래센터’를 건립해가는 중이라 한다. 통일 30년이 지났지만 역사적 트라우마가 남긴 긴 상처를 해소하는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런 결정들을 가능케 했다고 한다. 과거가 아닌 미래, 독일만 아닌 유럽, 공공 역사만 아닌 개인의 생애사를 포용하려는 새롭고도 과감한 시도가 놀라왔다. 한국의 새 정부 출범 이후 시작된 국립북한인권센터 건립계획과 북한인권문제를 국제화하기 위한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의 전방위적 활동, 그리고 최근 탈북자 동향에 대한 정책적 노력을 들은 것도 좋은 공부였다.

2024년 한국과 독일 모두 만만치 않은 도전을 받고 있다. 한국은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 표방과 군사적 위협이 급증하고 지정학적 환경도 크게 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기본법 75주년, 평화혁명 35주년을 기념하는 독일은 점증하는 극우세력, 난민문제와 에너지 위기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난관의 성격이 다르고 여건도 같지 않지만 서로의 경험이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런 지식공유의 노력은 지속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번 회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환송만찬이 열린 누리마루에서 APEC 정상회의 때의 사진들을 보면서 20년이 넘은 지금, 또 이 회의가 13차를 거듭해 오면서, 우리의 시야와 정책적 역량은 얼마나 글로벌해졌고 깊어졌을까 자문해 본다. 올 해 이 회의에서 느낀 바들을 다섯 쟁점으로 정리하면서 이틀간의 소회를 내 나름의 질문과 결부시켜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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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 한완상 장학금

두달 전 어느날 아침 한완상 교수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학창시절 이상백 선생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사회학이란 학문에서 받은 도움을 후학들에게 되갚는 일을 하고 싶으시다는 것이 요지였다. 장학금, 학술상, 연구지원 등 여러 방안이 있을 것이라 말씀드린 후 댁으로 찾아뵙고 상의하기로 했다. 몇 차례 논의를 거쳐 ‘한민 한완상 장학기금’을 제정하는게 상백 선생의 뜻도 기리고 후학들에게도 격려가 될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서울대와의 실무적 논의를 거친 후 4월 25일 ‘한민 한완상 장학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당일 댁으로 모시러 갔을 때 선생님은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고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같은 표정으로 기다리고 계셨다. 이재열 교수와 임동균 사발연 소장, 그리고 이도훈 대학원 주임이 함께 한 자리에서 감사패를 읽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하시고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탁월한 사회학자 한민 한완상 교수께서 이상백 교수의 학은을 기리는 장학기금을 기탁 ….. 후학들의 마음을 담아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에 흡족해 하시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 선생님은 은사 상백 선생의 후의를 종종 말씀하셨다. 상백 선생은 역사적 접근을 중시한 연구자이지만 제자인 한민 선생께는 미국에 가서 그곳의 정통 사회학을 공부하고 오라고 권하셨다고 한다. 올림픽 위원회 위원으로 세계를 오가며 구한 귀한 선물을 주기도 하셨고 유학하는 제자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셔서 달러를 쥐어주시기도 했다. 상백 선생의 제자 사랑에 대해서는 김채윤, 신용하, 강신표 교수 등도 여러 형태로 언급한 바 있으니 좋은 스승의 영향력은 그만큼 깊고 다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나도 한민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혼자 서울로 유학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친척집 가까이 있던 수유동교회를 다녔는데 한완상 교수님도 출석하고 계셨다. 고3 시절 대학진학을 앞두고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고민이었다. 아버님은 법대 진학을 원하셨고 어머니는 신학교 진학을 바라셨는데 나는 그 둘 모두 피하고 싶었다. 전화가 없어 편지로만 간간히 소통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님이 한완상 교수님께 요청을 하셨던 모양이다. 어느 주말 저녁 한 선생님이 내 자취방으로 찾아 오셔서 김치 하나 놓인 식사를 하며 어머니과 내 진로에 관해 오랜 대화를 나누셨다.

일면식도 없는 지방의 한 어머니가 아들의 진학상담을 위해 서울대 교수를 만나고 싶다고 할 때 선뜻 응할 분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번듯한 장소가 아니라 누추하고 비좁은 학생의 자취방일 때 그 가능성은 전무하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자신 교수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을 대하는 내 자세를 성찰할 때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다. 어쨋든 그 날 나는 어렴풋이나마 사회학이 매우 포용적이며 기독교 신앙과도 접맥되는 매력적 학문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시던 어머니도 사회학을 한 후 신학을 하는게 좋다는 한선생님 말씀에 공감을 하셨던 것 같다.

한 교수님은 음악에 조예가 깊으셨고 성가대 지휘를 하고 계셨다. 노래를 좋아하던 나도 대학 진학 후 성가대에 합류했고 매주일 한 교수님 지휘 아래 찬양을 했다. 학과 교수님으로서 만나기 이전에 성가대 지휘자로 먼저 만난 셈이다. 성가대원들 중에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영향을 받은 분도, 미국사를 전공하신 시니컬한 교수님도, 전기공학을 전공하신 공학자도 계셨다. 그 성가대의 개성적이면서도 문화적이며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한교수님의 리더십과도 무관치 않았다. 성가곡의 장중함, 합창의 매력 못지 않게 코이노니아의 소중함도 이 때 배웠던 것 같다.

얼마후 한교수님은 교회를 옮기셨다가 새길교회라는 평신도 교회사역을 시작하셨다. 이 교회는 한국교회사에서도 참신한 시도로 주목을 받았는데 기성교회에 만족하지 못한 지식인들, 엘리트 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한교수님은 한국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해 오셨지만 한번도 기독교 신앙, 예수정신으로부터 벗어난 적은 없다. 실제로 한교수님의 저작들은 제목에서부터 성경과 예수정신이 뭍어나는 것이 많다. 많은 지식인들이 탈종교, 탈신앙, 탈기독교를 추구하는 시대에 특기할만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내가 사회학과로 진학한 직후 한교수님은 해직을 당하셔서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기독교서회에서 활동하실 때 찾아뵙기도 했고 복직후 사회학회장이 되셨을 때는 학회총무로 도왔다. 학회의 프로젝트로 한국전쟁연구를 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서장을 공동명의로 썼다. 김영삼 정부 초기 한교수님이 통일부장관으로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는 등 유연한 대북정책을 추진하자 이 글이 보수층의 공격소재로 부각되었다. 분단극복과 평화지향적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 정치적 공격의 빌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초고를 작성했던 나로서는 좀더 세심한 표현을 했더라면하는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하지만 한교수님은 한번도 그와 관련하여 언짢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90이 되신 노학자가 후학들을 위해 큰 돈을 쾌척하시는 마음씀에 깊은 감사가 솟구친다. 은사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 회상에서 학창시절의 인격적 만남이 얼마나 오래 기억되는지를 깨닫게 한다. 오늘 대학의 문화, 학과의 분위기가 저런 정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끈끈한 사제관계, 인간적 대화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동료교수들 사이도 예전같지 않다. 개성적이고 개방적이 되었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공동체적 연대감이나 상호신뢰는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불가피한 흐름이겠지만 아쉬움도 적지 않다. 한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사회학과가 겪어오고 이루어온 지난 역사와 족적을 공동의 자산으로 재구성해가는 일에 이 장학금이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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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매화

남도부터 매화 소식이 전해지더니 내가 근무하는 광주과기원 교정에도 매화가 피었다. 크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고고하고 은은한 자태가 새 봄을 알린다. 옛부터 매화는 절개의 표상으로 간주되어 사군자의 첫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유학자들은 고매(古梅), 한매(寒梅), 설중매(雪中梅) 를 즐겨 그렸는데 한겨울을 지나면서 꽃을 피우는 매화가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는 선비의 기개를 표상한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매화는 벗꽃에 비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벗꽃이 필 때면 상춘객들로 전국이 부산하지만, 매화를 찾아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최근 하동 섬진강변의 매화마을이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화엄사의 홍매나 선암사의 고매를 아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여전히 한두 그루 매화가 고고하게 꽃을 피운 자태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치 않다. 고결함과 절개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21세기에 벗꽃의 화려함에 미치지 못하는 매화가 주목받지 못하는 건 당연할지 모르겠다.

매화를 좋아했던 퇴계 이황은 매화를 소재로 한 시 백여수를 남겼다. 매화를 매형이라 부르기도 한 그는 선비 정신을 대변하는 인물답게 엄동설한을 견뎌낸 절개를 매화의 전형적인 성품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의 매화시 가운데는 다소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있다.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매화 핀 창을 통해 또다시 찾아온 봄을 본다 / 거문고 마주앉아 줄 끊어진 것 탄식하지 마라.) – 또우 (又) 자에 주목해서 읽어보면 ‘다시’ 피는 매화, ‘다시’ 오는 봄을 주목하는 시인의 독특한 감수성이 느껴진다.

매화는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핀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낡은 고목에도 생명을 피워내는 그 꽃은 끝없이 재생되고 되살아나는 기운의 상징이다. 그러니 매화 다시 피는 걸 보는 이들이라면, 줄 끊어진 거문고에서 새로운 노래 울릴 때가 올 것을 믿을 수 있다. – 퇴계는 매화에서 이런 반복, 재생, 희망의 모습을 읽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보면 21세기에 매화는 절개의 상징으로보다 희망과 부활의 전령으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 다시 봄소식을 접한다는 것, 죽은 고목에서 꽃이 피는 부활이 실재한다는 것 – 매화의 새로운 이미지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래야 거문고줄 끊어져 상심한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를 담아 고목에서 피어난 매화와 퇴계의 싯구를 제사로 한 매화도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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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 ‘小山秘景’ 三樂

가나아트에서 전시 중인 소산 박대성 기념전인 ‘소산비경’을 관람했다. 월봉상 심사가 마친 후 두어시간 비는 틈을 이용해서 다녀오리라 세종서 상경하면서부터 작정을 했었다. 점심 장소가 시내로 잡혀 시간이 조금 촉박해졌지만 도진순 교수도 함께 가겠다고 해서 택시를 탔다. 역사학자인 도교수는 문화예술, 특히 서화와 작가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지닌 분이어서 늘 듣고 배우는 바가 많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더해져 풍성한 견학이 되었는데 가히 ‘소산비경 3락’이다.

제1락, 소산의 여러 최신 작품을 접한 즐거움이 크다. 일부 작품은 재작년 경주 솔거미술관의 코리아판타지 전에서 본 것이었지만 나머지는 새로왔다. 대작들은 금강산, 불국사 등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소품들은 담장과 산, 폭포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했다. 특히 2024년 작으로 되어 있는 ‘불국설경’은 인상적이었다. 이와 크기와 구도가 유사한 그의 1996년 작 “불국사”가 강한 농묵으로 소나무와 사찰을 표현한 이전 작품에 비해 이번 작품은 먹의 강도와 비중을 최소화하여 훨씬 밝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삼릉비경’은 흑백의 먹으로 그려진 신라의 풍경에 샛노란 달을 배치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 속에는 산 속에 부처와 탑이 만화처럼 자리하는 상상도가 종종 눈에 띤다. 또 하나의 대작 “금강설경”(2019)도 역시 기암괴석과 소나무를 최대한 자제된 갈필로 처리하여 웅장하면서도 담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왼편 아래에 ‘금강에 살으리랏다’ 시조가사가 한글 서체로 쓰여있다. 그림과 글씨가 하나라는 소산의 지론대로 그의 글씨는 조형미를 우선시하는 일종의 글그림이라 해도 좋을 듯 싶다. 두루마리 양식에 쓰인 그의 한시작품 역시 글자의 조형미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왔다.

제2락, 소산 화백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친필 도록을 받은 것이다. 작가와의 만남도 행운이었지만 소산이 자신의 작품집을 챙겨 내 이름과 작가 사인을 담아 선물해 준 것, 게다가 서대문까지 택시로 동승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망외의 즐거움이었다. 하바드 대학에서 개최되었던 소산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일, 경주 솔거박물관 코리아 판타지 전을 가 보았던 일을 들은 소산은 티없이 웃으며 좋아했다. 그를 창원대로 초빙한 적 있는 도교수는 이전의 기억들과 부인인 정미연 화백의 안부를 물었고 오랜 지기마냥 다정한 담소를 나누었다. 소산의 도록집은 Park Dae Sung – Ink Reimagined 라는 제목의 영문책자인데 정성들여 잘 제작된 일종의 박대성 연구서다. 미국에서 소산을 알리는데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김성림 교수가 대표집필하고 다트머스 예술박물관이 후원하여 출간된 것이다. 내용 중 ‘眞-幻 dynamics’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온다. 사물의 실재성과 작가의 상상력이 상호작용하면서 빚어내는 동양 산수화의 미학에 대한 해석틀인데 미술에만 국한될 것은 아닐 듯도 싶다.

제3락, 권상연 성당과 그 미학을 담당한 정미연 화백을 알게 된 것이다. 소산의 도록집과 함께 받은 [치유]라는 책자는 2021년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을 기리는 성당 건립과정과 함께 그 미학을 담당한 정미연 화백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검박하면서도 여성적이며 숭고하면서도 친근한 예수상과 마리아상이 이 뜻깊은 성당의 역사성과 신성함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이들이 순교한 장소에 세워진 것이 전동성당이고 그 아름다운 자태는 지금도 여전한데 230년만에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자 그들을 기념하는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한 카톨릭의 역사가꾸기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정화백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성당의 곳곳을 성스럽고 아름다운 작품들로 채웠는데 순교자의 아픔이 어딘가에 담겨져 있는 느낌이 든다. 암투병 중이었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런 육신의 질고를 겪고 있었기에 더욱 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 화백의 글과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십여년전 소천한 김영무 시인이 떠올랐다. 그는 암으로 투병하면서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시적으로 노래한 시집 [가상현실]을 출간했다. “시간의 뿌리와 공간의 돌쩌귀가 / 뽑혀나간 너의 현실은 안과 밖 따로 없이 / 무한복제로 자가증식하는 / 아, 디지털 테크놀로지 최첨단 / 암세포들의 세상 /…. 덫에 걸린 너의 삶은 / 순백색 빛의 나라, 가상현실” — 무한복제로 자기증식하는 암세포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한데 묶는 시인의 상상력에 놀라왔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정미연 작가 역시 암세포와 싸우며 고통을 은총으로 바꾸어주는 신앙의 힘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아름다움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저들의 모습에는 깊은 종교적 신심과 함께 예술혼의 숭고함이 깔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소산의 진지하고 한국적인 미학과 정 화백의 여성적이고 종교적인 미학도 그런 점에서 상통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life · 시공간 여행

매암동인과 節友

2024년도 1학기 개강을 했다. 서울대 정년 후 광주과학기술원에 부임한지 7번째 학기를 맞는 것이다. 봄같은 날씨 탓인지 학생들이 교내 곳곳에서 밝은 얼굴로 대화하고 오가는 모습이 유난히 정겹고 신선하다. 작년만해도 부분적으로 남아있던 코로나의 위축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난 실감이 든다.

교정을 걷다가 매화가 핀 것을 발견하고 3년전의 일을 떠올렸다. ‘이문회우’ 서예전을 개최한 후 제자들과 온라인으로 기념 모임을 했는데 이를 ‘매암동인’이라 불렀다. 매화가 피는 계절인 점도 고려했지만 그보다는 퇴계가 매화나무 아래 바위에서 그 후학들과 학문을 논의하던 정경을 기린 것이었다. 조선시대와 한학에 조예가 깊은 백광렬 박사의 제안을 따른 것인데 지금 들어도 멋스럽다. 퇴계는 매화를 좋아해서 ‘매형’이라 부르기도 했고 매화를 소재로 한 시가 백여수에 이르며 [매화시첩]이란 시집도 간행했다. 두향이라는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매화를 매개로 전해지기도 하며, 임종때 ‘매화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전한다. 그의 시에는 자연과 더불어 담담히 생활하는 선비의 자세가 여실하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속 집 창가에 기대서니 밤기운이 차가운데 / 梅梢月上正團團 매화 가지 끝에 둥그런 달이 두둥실 떠 있네 / 不須更喚微風至 새삼 살랑살랑 부는 미풍을 부를 새도 없이 / 自有淸香滿院間 온 집 안에 맑은 향기가 저절로 가득 넘쳐난다 /

步屧中庭月趁人 뜨락 거니노라니 달이 날 따라와서/ 梅邊行繞幾回巡 매화꽃 언저리 돌고 또 돌았다네/ 夜深坐久渾忘起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설 줄 몰랐더니/香滿衣布影滿身 향기는 옷에 가득하고 꽃 그림자는 몸에 가득하네 (陶山月夜詠梅)

퇴계의 매화사랑은 단지 음풍농월의 관조에 그친 것은 아니다. 퇴계는 매화가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의지를 특별히 강조 했다. 도연명이 난, 국, 죽만 노래한 것을 아쉬워하며 매화를 포함시켜 ‘절개있는 친구들’이라 불렀다. 松菊陶園與竹三 (도원엔 솔과 국화 대나무 더불어 셋이러니)/ 梅兄胡奈不同參 (매화는 어찌하여 함께 참여치 못했을까) / 我今倂作風霜契 (나 이제 모두 함께 풍상계를 만드니) 苦節淸芬儘飽諳 / (굳은 절개와 맑은 향기를 족히 알기 때문) — 그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사군자를 심은 화단을 조성하고 이를 節友社라 이름했는데 일종의 시적 의인화라 하겠지만 실제로 매화를 닮은 제자들에 대한 마음도 담겨 있었을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매화가 피니 [매암동인] 제자들이 생각난다. 다들 잘 지내며 새 봄을 맞아 그 향기가 옷과 정원에 그득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life · 오늘의 화두

이석증

당혹스러웠다. 한밤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일더니 천정이 팽그르 돌았다. 한참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겨우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다시 자리에 누우니 온 방이 도는 회전성 어지러움이 확 들이닥쳤다. 모로 누우면 바로 진정이 되지만 고개를 바로 눕히면 또 같은 증세가 밀려왔다. 뇌출혈인가? 하는 의심이 들면서 불안도 엄습해온다. 가슴도 답답하고 혈압도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불을 켜고 일어나 인터넷을 검색했다. 바로 누우면 어지럽다가도 일어나 앉거나 모로 누우면 진정되는 것은 전형적인 이석증이라고 했다. 속귀의 전정기관에 있는 이석이 떨어져 나와 평형고리관 속으로 들어갈 때 겪는 어지러움을 표현하는 이석증은 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증상이고 대체로 자연회복된다고 했다. 여러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뇌출혈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한밤 중에 식구들을 깨우는 소란을 겪지 않을 수 있어서 인터넷으로 얻은 정보가 이처럼 고맙고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일본 여행을 떠나기 전날이어서 출국을 할 수 있을 것인가는 또다른 문제였다. 한달여 전에 계획했던 니가타 여행을 지진으로 포기하고 새로 계획한 여행인데 내 컨디션 탓으로 또 무산시키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이석증이라면 그다지 위험한 것은 아닐터이고 일어서 다니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인천공항을 향해 새벽 버스를 타러 나서면서도 함께 떠난 처와 아들에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항의 모든 수속을 마치고 탐승하기 전에 나의 안색과 행동거지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처가 무슨 일인가고 다그쳤다. 그제서야 전날 밤에 겪은 상황을 말하고, 여행을 포기하고 병원으로 가자는 처와 아들에게 도리어 이석증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불안한 마음을 담은채 출발했지만 다행히 2박 3일간 여행은 별 문제 없이 잘 끝났다. 여전히 잠자는 자세는 모로 누워야 했고 첫날 식사 때 다소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았다. 조심하느라 온천욕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케 한잔 편히 마실 수 없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큰 일 없이 여행을 마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세종 집에 도착한 날 밤, 나는 큰 시험을 치룬 아이마냥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염려가 가셔서일까 그날 밤은 바로 누워서도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날 병원에서 내 상태를 들은 의사는 전형적인 이석증 증세인데 가볍게 왔다가 간 모양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 했다.

이 해프닝은 내게 두가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우선 몸이 얼마니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것인지가 놀라우리만치 피부에 와닿았다. 귀 속의 작은 돌멩이, 그것이 중력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내 몸의 균형을 바로잡게 한다는 사실, 미세한 돌멩이의 이탈이 내 온 몸을 흔들리게 한다는 과학적 진실이 새삼스러웠다. 동시에 내 건강과 생명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당연한 진실도 새롭게 깨달아졌다. 이곳 저곳 다니고 여러 활동을 참여하면서 나는 아직 건강하구나 자만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성경의 말씀대로 오늘 밤에라도 내 생명을 거두어가실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였구나 하는 반성도 했다. 이 일 이후 내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진 것은 단지 어지러움에 대한 조심 때문만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에 더 겸손하고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자는 다짐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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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해공, 2국가론

2월 6일 국민대 한반도미래연구원과 민주평통 교류협력분과위원회가 공동주최하는 라운드 테이블에 패널로 참여했다. ‘국제정세와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2024년을 전망한다’는 것이 전체 주제였다. 이 행사에는 조현 (서울대 교수, 전 유엔대사), 신각수 (세토포럼 이사장, 전 주일대사), 김천식 (통일연구원장, 전 통일부차관), 박명규 (GIST 초빙석학교수, 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 김병연 (서울대 교수, 전 국가미래연구원장)이 패널 발제자로 참여했고 김주현 초대 원장 (전 현대경제연구원장)이 좌장으로 토론을 이끌었다. 많은 숫자가 모인 것은 아니나 청중들의 경청하는 태도나 질문의 내용에서 진지함을 느낀 좋은 자리였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본관과 법학관 건물 입구에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이 서 있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소복히 눈덮인 동상 앞에서 잠시 국민대 설립자이자 초대총장이었던 해공을 떠올렸다. 해방 직후 건국을 담당할 인재양성을 위해 대학 설립이 긴요하고 그 새로운 대학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확신을 해공은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당시 미군정이 추진하던 ‘국립대학설립안’에 극력 반대했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1946년 9월 국민대학을 설립했다. 이 해에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과 서울의 국립서울대학이라는 두 대학이 쌍생아처럼 병립하게 된 현상은 제법 알려졌지만, 남한 사회 내부에서 국대안 파동 속에 국립 서울대와 민립 국민대가 함께 출범한 사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사립학교를 방문할 때면 으례 접하는 설립자의 동상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때부터인가 생각이 다소 달라졌다. 뚜렷한 사명감과 정신적 가치를 지닌 설립자의 삶이 귀감이 되는 경우에는 그런 상징이 대학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주요한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본 게이오대학에 있는 후쿠자와 유키찌의 흉상을 보았을 때 내가 느꼈던 부러움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해공의 동상 앞에서 변변한 상징적 인물을 내놓기 어려운 한국의 대학들, 특히 내가 다니고 근무했던 서울대학을 생각했다. 국립대학으로서 특정 인물로 상징화하기엔 어려움이 있을테고 보편적 인류적 사명감을 중시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빠리 소르본느에 꽁트, 파스퇴르, 위고의 흉상이 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만 해석할 일도 아닌 듯 싶다.

남북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려는 국민대의 정성은 해공 이래 대학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선한 노력이 아닌가 싶다. 김형진 교학부총장이 대독한 정승렬 총장의 인사말에서도 국민대의 이런 지향이 느껴졌는데 평화통일대학원 건립이 거의 실현단계에 도달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작금의 한반도 사정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일텐데 국민대의 건학이념에서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대체로 유사한 현실진단을 내리면서도 일부 쟁점에서는 상이한 견해들이 피력되기도 했다. 국제관계를 전망하면서 조현 교수는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약화, 유엔의 기능정지, global South의 확대, 경제와 안보의 수렴 등으로 인한 국제질서의 불안정성을 주요한 변수로 꼽았다. 특히 ‘취약국가 한국’이라는 표현이 눈에 띠었는데 변화하는 세계정세가 한국의 ‘취약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논지였다. 동북아 정세를 발표한 신각수 대사는 큰 틀에서 미중관계가 안정화되는 흐름을 보일 것으로 예측하면서도 중국경제의 부진, 미 대통령 선거, 북핵 고도화 등 여러 불확실한 변수에 대비해야 할 것을 지적했다. 특히 한미동맹을 위시하여 한일 및 한중간의 양자관계와 한미일 3각 협력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적극적 인태전략과 유럽연계를 통해 주변국에 의한 전략공간의 제약을 돌파할 필요성도 함께 지적했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김천식 원장은 1민족 1국가 1체제 통일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것과 남북한 동질성 회복노력을 지속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 맥락에서 북한의 최근 2국가론이 얼마나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지, 통일의지의 확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북한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고 특히 적대적 2국가론은 잘못된 발상임을 전제하면서, 남북간의 상호성을 규율할 전략적 프레임을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분단 80년이 가까워오고 유엔 동시가입 30년을 넘긴 남북한이 실질적으로 별개의 주권적 실체로 존재함을 인정하면서 상호통합을 추구하기 위한 새로운 발상과 동력을 탐색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의식에서도 무리하거나 급속한 통일보다는 평화공존 형태의 2체제 상태를 지지하는 경향이 높다. 이런 점에서 평화공존형, 통합지향형 2국가 상태를 필요한 중간단계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 쟁점은 객석에서의 질문과 토론으로도 이어졌는데 여전히 국가론과 민족론은 뜨거운 화두임을 느끼기에 족했다.

김병연 교수는 경제학자답게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빵에서 나오는 것이라 했다. 그런 맥락에서 김정은의 현 정책방향은 빵보다 총구를 중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 보았다. 내부의 시장효율성을 억제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는 오늘 북한의 경제는 지속가능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장기간의 국제제재와 내부자원결핍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강력한 군사주의와 동원체제를 유지해가는 나름의 물적 기반에 대해서 우리가 경시하는 것은 아닌지도 자문해 볼 일이다. 빵을 얻기 위해 총구를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독재자들도 역사에선 결코 드물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경제적 분석이 정치적 동학과 함께 숙고되어야 할 필요도 커지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세종으로 돌아온 다음날 RFA의 기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이날 내가 말한 논지를 잘 들었고 ‘한반도 2국가론’과 관련한 좀더 깊이있는 인터뷰를 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개학을 앞두고 여러 일들이 있는데다가 날짜 조정도 여의치 않아 다음 기회를 보자고 정중히 거절했다. 분명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따로 살자는 정서가 존재하지만 2국가론이라는 발상에 따르는 정치적 심리적 전략적 부담도 만만치 않아 고민스러운 것이 현실이다. 정주외국인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다종족 상황도 커지는 한국에서 전통적인 민족감정에만 기초해서 사회통합을 달성하기도 어려운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수년전에 “비대칭적 분단국가체제”로 이름했던 논지를 새롭게 다듬어 통일을 지향하되 2체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2 분단국가론”으로 좀더 정교한 틀을 발전시킬 필요를 느낀다. 나름 방향은 잡히는 듯 한데 당장 내딛을 길에 대한 확신이 아직은 부족하다. 아, 언제나 내 공부가 충분한 깊이에 도달할까, 임중도원 (任重道遠)이다.

activities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1980년대에 전북대학교에서 90년대에는 서울대학교로 옮겨 오랜 기간 교직생활을 함께 한 우한용 교수, 서경호 교수와 저녁을 함께 했다. 두 분 다 나보다는 선배지만 비슷한 시대에 대학생활을 했고 같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 인연으로 서로 좋아하고 최근에는 페북과 유네스코 활동을 통해 간간히 교류하기도 하는 사이다. 하지만 여유롭게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갖지 못했기에 정년을 한 이후 언제 한번 보자 하다가 이제야 그 약속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서경호 교수가 예약해둔 장소는 경복궁 옆 서촌의 한 조그만 한옥 까페 ‘한옥달’이었다. 좁은 골목길 안쪽 오래된 한옥을 그대로 활용하고 내부에도 전통적인 가구와 소품들을 배치한 예스런 분위기가 문화인들이 좋아할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한국측 위원장으로 활약한 서교수께서 경복궁의 문화재청에서 회의가 있을 때 종종 이용한 곳이라 했다. 음식도 이태리식을 한국인 입맛에 다소 퓨전화 한 것인데 맛깔스럽고 좋았다. 때마침 얕은 눈이 내려 작은 마당이 하얗게 덮였는데 강하지 않은 조명과 어우러져 옛날 어느 시대로 내가 돌아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한용 교수는 단편 10권, 중편 2권, 장편 5권의 소설집을 펴넨 중진 소설가다. 시집도 여러 권 출간했으며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다루면서 문학의 지경을 넓히는데 지금도 열정적인 분이다. 이 날도 소설집 [왕의 손님]을 증정받았다. 페북에도 적극적으로 글을 올리는 우교수의 글쓰기는 일상의 소재에서 인생사의 굴곡과 지혜를 찾아내는 중후하고도 맛깔나는 글로 페친들 사이에 정평이 나 있다. 나도 우교수가 올리는 글들은 늘 정독하는데 동서양의 시나 경구, 문학과 예술에 얽힌 각종 에피소드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소개하는 그의 글을 읽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올리는 글인데도 글의 길이와 깊이가 어느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여서 읽을 때마다 그 기억력과 상상력, 문장력에 경탄하곤 한다.

모임 바로 전에 뉴질랜드와 타이티를 여행하고 돌아왔노라 했다. 그 여행이 고갱에 대한 탐구와 맛닿아 있다는 것을 페북에서 읽어 알고 있었지만 쉽지 않은 여행동선을 들으면서 인문학자다운 탐사여행이란 생각을 했다. 내 페북에 보스톤 미술관에서 찍은 고갱의 대작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작품을 내 사진으로 올렸는데 우교수께서 ‘왜 그림 속에 웃는 여인은 없는가’고 물었었다. 고갱에 대한 깊은 관심과 맛닿아 있음을 뒤늦게 알았지만 제대로 답을 할 식견이 내겐 없었다. 고갱이 문명화된 빠리를 떠나 자연 그대로라 상상한 타이티로 갔으나 정작 파페에테는 당시에도 이미 도시화되어 있었던 현실에 실망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고갱은 파페에테의 ‘반얀트리’ 아래에 앉아 건너다 보이는 섬 우레아를 내다보고 또다른 탈출을 꿈꾸었다고 우교수는 적었다. 타이티를 두루 다니면서 그 답을 얻으셨을까?

서경호 교수는 [신해경연구]를 비롯하여 중국 고전문학의 탁월한 업적을 남긴 중문학자다. 또 [자메이카]라는 제목의 두툼한 장편소설을 상재한 작가이기도 하다. 하바드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지구촌 곳곳의 문화유적에 해박한 분이다. 전북대 시절부터 그의 자유롭고 폭넓은 식견과 문화적 포용력을 좋아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장으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융복합적 사고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늘 강조한 분이기도 하다. 작년부터 나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을 받아 간간히 회의에서 뵙는 기회가 있었지만 좀처럼 긴 시간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갖지 못했다.

나는 서교수님을 볼 때면 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린다. 탁월한 중문학자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소설이 다룬 시공간적 배경의 스케일이 매우 큰 것에 더욱 놀랐다. 그 소설은 한반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지구적인 동학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미래의 어느 시점을 상정한 상상력이 빚어낸 그 작품은 예상 가능한 국내의 징치동학과 해외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치밀하게 녹여내 미래학 탐구서로 사용되어도 좋을 정도였다. 이 소설에서는 한반도가 통일되는 대신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일종이 완충구역을 두자는 안이 미국을 비롯한 주변강국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소설적 상상력이지만 역사적인 개연성이 없다 할 수 없는 미묘한 포인트가 흥미롭지만 무겁게 전개된다. 임진왜란 전후하여 주변국가들 사이에 한반도 분할안이 여러 차례 등장했던 역사적 경험들을 떠올렸었다. 새 소설은 쓰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치신다. 한반도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재미있고 역동적이기보다 힘겹고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이행하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두 병의 와인을 비우면서 나눈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즐거웠고 유쾌했으며 식견이 넓어지는 망외의 소득까지 있었다. 까페가 문을 닫는 시간까지 떠들다가 지하철도 함께 타고 각자의 집으로 갔다. 떠나기 전 찍은 사진을 다음날 보냈더니 우교수께서 ‘이 건달들을 어찌할 것인가’라고 적고 ‘호모 비아토르’라고 덧붙였다. 여행하는 자,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자라는 뜻인데 프랑스 철학자 마르셀이 인간의 속성으로 규정한 말이라 한다. 그 표현이 정겹게 느껴져 이 사진에 ‘호모 비아토르 – 아름다운 건달들’이란 이름을 붙여두었다. 모두들 건강하고 그 멋진 필력과 상상으로 더 많은 작품 남기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