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 전 어느날 아침 한완상 교수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학창시절 이상백 선생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사회학이란 학문에서 받은 도움을 후학들에게 되갚는 일을 하고 싶으시다는 것이 요지였다. 장학금, 학술상, 연구지원 등 여러 방안이 있을 것이라 말씀드린 후 댁으로 찾아뵙고 상의하기로 했다. 몇 차례 논의를 거쳐 ‘한민 한완상 장학기금’을 제정하는게 상백 선생의 뜻도 기리고 후학들에게도 격려가 될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서울대와의 실무적 논의를 거친 후 4월 25일 ‘한민 한완상 장학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당일 댁으로 모시러 갔을 때 선생님은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고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같은 표정으로 기다리고 계셨다. 이재열 교수와 임동균 사발연 소장, 그리고 이도훈 대학원 주임이 함께 한 자리에서 감사패를 읽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하시고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탁월한 사회학자 한민 한완상 교수께서 이상백 교수의 학은을 기리는 장학기금을 기탁 ….. 후학들의 마음을 담아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에 흡족해 하시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 선생님은 은사 상백 선생의 후의를 종종 말씀하셨다. 상백 선생은 역사적 접근을 중시한 연구자이지만 제자인 한민 선생께는 미국에 가서 그곳의 정통 사회학을 공부하고 오라고 권하셨다고 한다. 올림픽 위원회 위원으로 세계를 오가며 구한 귀한 선물을 주기도 하셨고 유학하는 제자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셔서 달러를 쥐어주시기도 했다. 상백 선생의 제자 사랑에 대해서는 김채윤, 신용하, 강신표 교수 등도 여러 형태로 언급한 바 있으니 좋은 스승의 영향력은 그만큼 깊고 다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나도 한민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혼자 서울로 유학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친척집 가까이 있던 수유동교회를 다녔는데 한완상 교수님도 출석하고 계셨다. 고3 시절 대학진학을 앞두고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고민이었다. 아버님은 법대 진학을 원하셨고 어머니는 신학교 진학을 바라셨는데 나는 그 둘 모두 피하고 싶었다. 전화가 없어 편지로만 간간히 소통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님이 한완상 교수님께 요청을 하셨던 모양이다. 어느 주말 저녁 한 선생님이 내 자취방으로 찾아 오셔서 김치 하나 놓인 식사를 하며 어머니과 내 진로에 관해 오랜 대화를 나누셨다.
일면식도 없는 지방의 한 어머니가 아들의 진학상담을 위해 서울대 교수를 만나고 싶다고 할 때 선뜻 응할 분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번듯한 장소가 아니라 누추하고 비좁은 학생의 자취방일 때 그 가능성은 전무하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자신 교수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을 대하는 내 자세를 성찰할 때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다. 어쨋든 그 날 나는 어렴풋이나마 사회학이 매우 포용적이며 기독교 신앙과도 접맥되는 매력적 학문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시던 어머니도 사회학을 한 후 신학을 하는게 좋다는 한선생님 말씀에 공감을 하셨던 것 같다.
한 교수님은 음악에 조예가 깊으셨고 성가대 지휘를 하고 계셨다. 노래를 좋아하던 나도 대학 진학 후 성가대에 합류했고 매주일 한 교수님 지휘 아래 찬양을 했다. 학과 교수님으로서 만나기 이전에 성가대 지휘자로 먼저 만난 셈이다. 성가대원들 중에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영향을 받은 분도, 미국사를 전공하신 시니컬한 교수님도, 전기공학을 전공하신 공학자도 계셨다. 그 성가대의 개성적이면서도 문화적이며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한교수님의 리더십과도 무관치 않았다. 성가곡의 장중함, 합창의 매력 못지 않게 코이노니아의 소중함도 이 때 배웠던 것 같다.
얼마후 한교수님은 교회를 옮기셨다가 새길교회라는 평신도 교회사역을 시작하셨다. 이 교회는 한국교회사에서도 참신한 시도로 주목을 받았는데 기성교회에 만족하지 못한 지식인들, 엘리트 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한교수님은 한국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해 오셨지만 한번도 기독교 신앙, 예수정신으로부터 벗어난 적은 없다. 실제로 한교수님의 저작들은 제목에서부터 성경과 예수정신이 뭍어나는 것이 많다. 많은 지식인들이 탈종교, 탈신앙, 탈기독교를 추구하는 시대에 특기할만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내가 사회학과로 진학한 직후 한교수님은 해직을 당하셔서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기독교서회에서 활동하실 때 찾아뵙기도 했고 복직후 사회학회장이 되셨을 때는 학회총무로 도왔다. 학회의 프로젝트로 한국전쟁연구를 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서장을 공동명의로 썼다. 김영삼 정부 초기 한교수님이 통일부장관으로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는 등 유연한 대북정책을 추진하자 이 글이 보수층의 공격소재로 부각되었다. 분단극복과 평화지향적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 정치적 공격의 빌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초고를 작성했던 나로서는 좀더 세심한 표현을 했더라면하는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하지만 한교수님은 한번도 그와 관련하여 언짢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90이 되신 노학자가 후학들을 위해 큰 돈을 쾌척하시는 마음씀에 깊은 감사가 솟구친다. 은사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 회상에서 학창시절의 인격적 만남이 얼마나 오래 기억되는지를 깨닫게 한다. 오늘 대학의 문화, 학과의 분위기가 저런 정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끈끈한 사제관계, 인간적 대화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동료교수들 사이도 예전같지 않다. 개성적이고 개방적이 되었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공동체적 연대감이나 상호신뢰는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불가피한 흐름이겠지만 아쉬움도 적지 않다. 한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사회학과가 겪어오고 이루어온 지난 역사와 족적을 공동의 자산으로 재구성해가는 일에 이 장학금이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