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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성 ‘小山秘景’ 三樂

가나아트에서 전시 중인 소산 박대성 기념전인 ‘소산비경’을 관람했다. 월봉상 심사가 마친 후 두어시간 비는 틈을 이용해서 다녀오리라 세종서 상경하면서부터 작정을 했었다. 점심 장소가 시내로 잡혀 시간이 조금 촉박해졌지만 도진순 교수도 함께 가겠다고 해서 택시를 탔다. 역사학자인 도교수는 문화예술, 특히 서화와 작가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지닌 분이어서 늘 듣고 배우는 바가 많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더해져 풍성한 견학이 되었는데 가히 ‘소산비경 3락’이다.

제1락, 소산의 여러 최신 작품을 접한 즐거움이 크다. 일부 작품은 재작년 경주 솔거미술관의 코리아판타지 전에서 본 것이었지만 나머지는 새로왔다. 대작들은 금강산, 불국사 등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소품들은 담장과 산, 폭포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했다. 특히 2024년 작으로 되어 있는 ‘불국설경’은 인상적이었다. 이와 크기와 구도가 유사한 그의 1996년 작 “불국사”가 강한 농묵으로 소나무와 사찰을 표현한 이전 작품에 비해 이번 작품은 먹의 강도와 비중을 최소화하여 훨씬 밝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삼릉비경’은 흑백의 먹으로 그려진 신라의 풍경에 샛노란 달을 배치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 속에는 산 속에 부처와 탑이 만화처럼 자리하는 상상도가 종종 눈에 띤다. 또 하나의 대작 “금강설경”(2019)도 역시 기암괴석과 소나무를 최대한 자제된 갈필로 처리하여 웅장하면서도 담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왼편 아래에 ‘금강에 살으리랏다’ 시조가사가 한글 서체로 쓰여있다. 그림과 글씨가 하나라는 소산의 지론대로 그의 글씨는 조형미를 우선시하는 일종의 글그림이라 해도 좋을 듯 싶다. 두루마리 양식에 쓰인 그의 한시작품 역시 글자의 조형미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왔다.

제2락, 소산 화백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친필 도록을 받은 것이다. 작가와의 만남도 행운이었지만 소산이 자신의 작품집을 챙겨 내 이름과 작가 사인을 담아 선물해 준 것, 게다가 서대문까지 택시로 동승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망외의 즐거움이었다. 하바드 대학에서 개최되었던 소산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일, 경주 솔거박물관 코리아 판타지 전을 가 보았던 일을 들은 소산은 티없이 웃으며 좋아했다. 그를 창원대로 초빙한 적 있는 도교수는 이전의 기억들과 부인인 정미연 화백의 안부를 물었고 오랜 지기마냥 다정한 담소를 나누었다. 소산의 도록집은 Park Dae Sung – Ink Reimagined 라는 제목의 영문책자인데 정성들여 잘 제작된 일종의 박대성 연구서다. 미국에서 소산을 알리는데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김성림 교수가 대표집필하고 다트머스 예술박물관이 후원하여 출간된 것이다. 내용 중 ‘眞-幻 dynamics’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온다. 사물의 실재성과 작가의 상상력이 상호작용하면서 빚어내는 동양 산수화의 미학에 대한 해석틀인데 미술에만 국한될 것은 아닐 듯도 싶다.

제3락, 권상연 성당과 그 미학을 담당한 정미연 화백을 알게 된 것이다. 소산의 도록집과 함께 받은 [치유]라는 책자는 2021년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을 기리는 성당 건립과정과 함께 그 미학을 담당한 정미연 화백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검박하면서도 여성적이며 숭고하면서도 친근한 예수상과 마리아상이 이 뜻깊은 성당의 역사성과 신성함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이들이 순교한 장소에 세워진 것이 전동성당이고 그 아름다운 자태는 지금도 여전한데 230년만에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자 그들을 기념하는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한 카톨릭의 역사가꾸기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정화백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성당의 곳곳을 성스럽고 아름다운 작품들로 채웠는데 순교자의 아픔이 어딘가에 담겨져 있는 느낌이 든다. 암투병 중이었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런 육신의 질고를 겪고 있었기에 더욱 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 화백의 글과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십여년전 소천한 김영무 시인이 떠올랐다. 그는 암으로 투병하면서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시적으로 노래한 시집 [가상현실]을 출간했다. “시간의 뿌리와 공간의 돌쩌귀가 / 뽑혀나간 너의 현실은 안과 밖 따로 없이 / 무한복제로 자가증식하는 / 아, 디지털 테크놀로지 최첨단 / 암세포들의 세상 /…. 덫에 걸린 너의 삶은 / 순백색 빛의 나라, 가상현실” — 무한복제로 자기증식하는 암세포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한데 묶는 시인의 상상력에 놀라왔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정미연 작가 역시 암세포와 싸우며 고통을 은총으로 바꾸어주는 신앙의 힘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아름다움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저들의 모습에는 깊은 종교적 신심과 함께 예술혼의 숭고함이 깔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소산의 진지하고 한국적인 미학과 정 화백의 여성적이고 종교적인 미학도 그런 점에서 상통하는 것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