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시골 음식점의 AI 로봇

30여년 전 간간히 들리던 화산의 작은 음식점을 찾아 나섰다. 당시 거주하던 전주에서 고향 안의를 방문할 때면 으례 진안, 장계를 거쳐 육십령 고개를 넘었다. 돌아오면서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내려오면 허름하지만 정겨운 순두부집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서울로 직장을 옮긴 이후 한번도 가 보지 못했는데 모처럼 기회를 만든 것이다.

가는 길이 고속화되고 새로 지은 큰 식당과 엄청난 넓이의 대형 주차장으로 여기가 내가 찾던 곳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낡은 마당이 있던 기와집, 좁은 방들로 이어지던 식당, 두부를 만들고 오가는 손길들을 바라보던 풍경은 머리 속에만 남아있는 기억이었다. 주변은 예나 크게 달라진 바 없는데 식당만 대형화한 변화가 낯설게 다가왔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음식 배달 로봇의 등장이었다. 주문한 도토리묵을 얹은 자그만 로봇이 테이블 옆에와서 파란 표지등을 깜박였다. 옆에 있던 손님이 음식을 꺼내고 ‘가라’고 말하라 가르쳐준다. 수고했다 가라고 하니 꾸벅 뒤돌아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한다. 시골 한적한 음식점에 찾아와 글로만 접하던 변화의 한 단면을 실감있게 확인한다. 30여년의 시간이 빚어낸 다이나믹 코리아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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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산행과 길찾기

임인년 설날 아침이다. 새해가 시작된 지 한달이나 지났는데 카톡방엔 또 한번의 신년 덕담들이 줄을 잇는다. 어색한 감이 없지 않지만 나날이 새롭자는 말도 있으니 거듭된 새해맞이 인사가 나쁠 건 없겠다. 밤새 내린 서설로 하얗게 변한 주변의 산을 올라 우일신하자는 마음다짐을 하니 새로운 한 해를 덤으로 선물받은 느낌마저 든다.

눈덮인 산길을 걷다가 백범 김구의 글씨로 접했던 한시를 떠올렸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덮인 들판 걸어갈 때 어지러이 함부로 걷지마라 오늘 내가 걸은 발자취가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가 되는 것이니) . 서산대사의 글로 알고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임연당 이양연도 유사한 시를 남겼다 한다. 雪朝野中行 開路自我始 不敢少逶迤 恐誤後來子 (눈내린 아침 들판 걸으니 길이 나로부터 열린다. 감히 비뚤거리며 걷지 못함은 뒤에 올 사람이 잘못됨을 염려해서이다)

현실에서는 우리 누구도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 개척자가 되지 못한다. 세상사는 수많은 이들의 발자국들로 이미 넘쳐나 폭설로도 뒤덮여지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가 앞서 걸은 길을 뒤좇는 것이 다반사이고 헷갈리는 갈림길을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선이 눈앞에 다가온 2022년도 내키지 않는 길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자주 접할 듯 싶다. 다만 어느 길을 선택할지를 놓고 벌이는 저 소란이 사생결단식 전쟁이 되지 않기를… 인생에도 역사에도 가지 못한 길은 늘 있었다는 평범한 진리를 설날 아침 눈길에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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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바이오 주식회사

횡성을 들러 맛있는 한우로 점심을 먹고 넥스트바이오 회사를 방문했다. 다양한 커피원액을 생산하는 기업인데 이 회사를 일구고 경영하는 신언무 사장이 친구인 덕택에 누린 특별한 호사였다. 자동화된 공장의 내부모습은 스쳐 보았을 뿐이지만 잘 운영되고 발전하는 회사라는 느낌을 받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공장 규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원액 생산공정이 이루어지는 기계실, 제품개발과 평가를 하는 연구실, 직원들이 함께 거주하고 식사하는 기숙사와 식당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다. 아직 점심 시간 전이지만 신사장과 함께 식당에 들렀을 때 식사 준비를 하던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 사장님 함께 라면 드실래요 한다. 그 격의없는 모습에서 회사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방에 이런 공장을 세우고 지역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끼지만, 고급 인재를 확보하기는 많이 힘들다고 한다. 관리나 청소, 포장 등의 일에 종사하는 분들은 지역 내에서도 구하기 어렵지 않을 터이고 실제로 그런 분들은 매우 즐겁게 만족하며 근무한다고 한다. 다만 젊고 유능하며 새로운 개발에 열정이 있는 인재는 대부분 지역을 떠나는 것이 현실이다. 이 갭을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가 꼭 이 회사만의 숙제가 아닐 것이다.

함께 만나기로 한 박문상 사장과 송태회 이사는 내가 기차로 도착하기 전 먼저 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벗’이란 모임을 함께 했던 친구들 중 몇은 해외에 있고 국내에 있는 우리끼리도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간의 생활경험이 다른만큼이나 나눌 화제는 많았고 대화는 즐거웠다.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했던 옛말이 옳다는 걸 실감한 셈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활동할 일거리가 있고 건강이 유지된다는 것은 참 복된 일이다. 학계에 속한 사람들만 주로 접하던 나로서는 스스로 창업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는 기업가 친구를 만나는 감회가 더욱 신선하고 기뻤다. 한우와 더덕, 커피 등 여러 선물도 고마왔지만 도전하고 혁신하면서 새 일을 만들어가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고 온 것이 내겐 가장 큰 선물이 된 여행이었다. 넥스트 바이오라는 회사명 그대로 다음 세대의 바이오 혁신의 주역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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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과 콩나물국밥

학술회의 기조강연차 간 전주에서 반가운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제자이면서 원광대 교수로 이번 학술회의를 주관한 원도연 교수, 역시 제자이면서 이번 행사에 토론과 발제로 열심히 참여한 박해남 박사, 동학관련 연구로 존경하던 신순철 교수, 극작가인 곽병창 교수 등 …

저녁엔 전주 한옥마을의 기거하고 있는 김사인 시인의 집을 방문했다. 함께 간 이종민 교수가 대문 앞에서 ‘이리 오너라’하고 부르는 소리가 한옥의 대문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드라마 속으로 걸어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웃으며 대문을 열고 나오는 김시인의 모습 역시 정겨운 소품같았다.

오랫만에 이런 저런 수다로 즐거웠다. 문학과 정치, 인생과 역사를 가로질러 이야기거리는 다양했지만 어차피 결론을 내릴 필요도 없고 합의를 봐야 할 것도 아니어서 자유롭게 건너 뛰었다. 아침 삼백집에서 오랫만에 콩나물국밥을 맛보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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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주의자? 가능주의자!

시인이자 교수인 나희덕 님이 근작 시집을 보내주셨다. 표지 디자인도 색감도 깔끔한 책으로 새해를 신선하게 시작하게 되었다. 초기시집부터 아름다운 문체와 단정한 글씨가 산뜻한 이미지로 남아있고 최근 그림솜씨도 참으로 인상적임을 알게 되어 더욱 친근감을 느끼는 분이다.

처음 시집 제목을 기능주의자로 읽었다. 사회학자에게 친숙한 기능주의란 단어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일단 제목을 오독하고 나니 모두가 기계 같은 기능주의자가 되어가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는 시인의 마음이 담겼으리란 선입견도 잠시 들었다. 표제작인 ‘가능주의자’를 읽고서야 비로소 내 잘못을 깨달았다. 기능주의자와 가능주의자 사이의 거리란 얼마나 먼가!

가능주의자가 되리라 마음 먹는다고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걸 잘 아는 시인이 굳이 이런 선언을 하는 것은 실상 불가능의 영역이 너무 압도적이라는 답답함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그래서 고슴도치에도/ 여우에도 속할 수 없었지만/ 작가란 성자도 역사가도 될 수 없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것으로 톨스토이도 변호하고 스스로도 변호하려 한다. 역설과 모순을 직면하고 견뎌내는 애씀에서 불가능의 가능성이 시작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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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에 태어난 또 한명의 손녀

2021년 마지막날이다. 한 해가 저무는 때이지만 새 해를 목전에 둔 날이기도 하다. 낡음이 차면 새것이 오는 것 – 그 교대와 연쇄가 인생과 역사의 섭리일테니 아쉬움보다 희망으로 오늘을 보내자고 다짐해본다. 사실 돌이켜 보면 내가 뿌린 것보다 거둔 것이 많지 않았던 해는 없었다.

이번 세모에는 전례없는 축복을 받았다. 새해를 맞기 하루 전날 새벽 미국에 있는 딸이 둘째 아기를 순산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의 귀한 생명이 우리 집안에 맡겨진 것인데 이제 4명의 손자녀를 둔 할아버지가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감사함이 넘칠 일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정년을 맞이하고 거처를 옮기는 등 변화가 컸던 한 해다. 그래서인지 세모의 소회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그래도 되돌아보니 소프트랜딩은 한 듯 싶어 다행이다. 모처럼 서울서 내려온 아들 종인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독립해서 생활하는 경험이 주는 또다른 의미가 있는 듯싶다. 새해에도 몸관리, 마음공부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긍정적인 내면을 지켜가도록 애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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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사회의 홀로 또 같이

코로나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는 너나 없이 홀로임을 절감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고픈 느낌도 절실하다. 디지털 환경이 제공한 기술인프라는 그런 이중성, 즉 집안에 혼자 있으면서 온라인으로 바깥의 사람들과 접촉하고 활동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학자들은 이것을 초연결성이라 부른다. 온라인상의 연결과 소통이 일상과 사회 전반에 깊이 스며든 현상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제 아침저녁으로 경험하는 현실이 되었다.

초연결성이란 주제는 이번 학기 수업에서도 종종 언급했었다. 이런 현상이 학교나 교회에 미친 충격과 소규모 자영업자들에게 미친 파장이 같지 않을 것이고 업종과 규모에 따른 편차도 심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공간은 찾기 어려워졌다. 그런가 하면 세대별로 이 충격을 수용하고 흡수하는 역량도 크게 달라서 어쩌면 이중으로 힘들어하는 층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떨어져 있는 가족, 특히 미국이나 타지에 있는 자녀와 자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다행스럽다. 실제로 코로나 상황에서 가족간 유대는 더욱 강해진다는 조사도 나오는 모양이다. 온라인 덕택에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여 자유로이 연락하고 얼굴을 맞댈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초연결성이 어쩌면 점차 약화되던 일차적 관계를 새롭게 강화시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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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트 샷

부스트 샷이라 불리는 3차 백신접종을 완료했다. 매일 같이 접종을 권유하는 질병관리본부의 문자에 더해 아무래도 맞는게 안전하리라는 판단이 더해져 접종은 했지만 그다지 유쾌하거나 마음이 가볍진 않다. 이것이 마지막도 아닐 뿐더러 3차접종에서 의외로 고생했다는 소식들을 이곳 저곳에서 들은 탓이기도 하다.

사실 부스트샷이라는 이 생소한 말을 너나없이 일상어처럼 사용하게 된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다. 하긴 팬데믹 상황이라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니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비일상적인 것이 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백신접종과 검사와 감시가 이처럼 조밀하게 사람들의 일상을 옥죌 줄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어차피 이것으로도 그 효과가 몇 달 못간다니 같은 방식의 접종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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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카드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성탄 카드 주고받는 문화가 많이 사라졌다. 특정 종교의 축일이라는 생각과 기독교 문화에 대한 약간의 반감도 겹친 탓이리라. 하긴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이미 미국이나 유럽은 메리 크리스마스란 말 자체가 기피어가 되고 있는 형국이다. 해피 홀리데이라는 중성적 표현이 이를 대체하는 중…

특정 종교에 대한 배타적 강조만 아니라면 인류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소중한 종교적 가르침을 던진 예수의 탄생을 함께 기리는 것이 나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요즘같이 평화와 사랑이 아쉬운 시대에야 더 말해 무엇할 것인가. 그래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제작했고 지인들에게 보냈다.

다만 Merry Christmas 라는 글만 쓰지 않고 코로나 2년을 보내는 아픈 마음, 그럼에도 무상으로 주어지는 예쁜 단풍과 푸른 하늘, 그리고 새해의 시간 들을 함께 언급했다. 서구문화와 뒤걲여 그 정신이 퇴락했던 성탄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새 상황에 맞추어 우리 일상의 풍요로운 축일이 되게 할 일은 여전한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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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붕 자원방래 불역낙호아

동료 학자이자 문인인 이종민 교수와 김사인 시인이 집으로 방문했다. 대학을 함께 다닌 동기들이고 동시대를 함께 걸어오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주고받은 친구들이 모두 정년을 맞아 백발이 희끗한 모습으로 마주하니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아라던 옛말이 저절로 생각난다.

이교수는 전북대 영문과를 정년퇴직하고 완주인문네트워크 이사장으로 지역에서 각종 인문학 프로그램과 문학관련 활동을 뒷받침하는 활동을 열정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지역사회의 문화를 뒷받침하면서 정년 이후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멋진 모범을 보이는 중이다. 때맞춰 출간한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와 [불멸의 새와 꽃의 영광을 노래하라] 두 권을 선물받았다.

김교수도 한국문학번역원장을 마치고 대학을 정년한 이후 전주 한옥마을에 저명문인 초청대상으로 내려와있다. 아름다운 시와 진솔한 인간성, 맛갈스런 어투와 대화로 이미 지역사회의 많은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고 있는 듯… 그 한결같은 모습과 성정이 여전하다. 내가 서울대 화묵회 전시작폼으로 썼던 김사인 시 족자를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