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화림계곡의 문화유산

코로나로 인해 추석이 한참 지나 고향을 다녀왔다. 오랫만에 나들이를 한 누이들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네 앞 가을 들녂은 추수를 앞둔 황금빛 볏자락으로 넘실댔다. 아들 종인이가 군대를 가기 직전에 부모님 산소 주변에 심었던 감나무가 꽤 자라 큰 감이 여럿 열렸다.

오는 길에 화림동 계곡을 들러 맑은 물가에서 잠시 정담을 나누었다. 이 계곡 이곳 저곳에 세워져있는 농월정, 동호정, 거연정의 모습은 개발광풍의 바람으로부터 그다지 침해를 받지 않아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출사보다는 은일을 중시하던 산림 선비들의 삶을 보는 듯 했다.

조부는 이 화림동을 좋아해서 아호를 화사라 했다. 조부가 세웠던 애산당 기동에 의친왕의 글씨로 ‘화림사보 은사정취(花林史暜 隱士情趣)’라 쓰인 현판이 있었다. 숨은 선비의 정취를 예찬하는 글이겠는데 식민지 시대를 벗어난지 반세기도 더 넘은 21세기 세계화의 시대에 은사의 정취란 낡은 유물에 불과할 것인가. 오는 길에 머리를 스쳐간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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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에 우주의 신비가

집앞 마당의 대추나무에 탐스런 대추들이 열렸다. 내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비바람 맞으며 제 스스로 열매를 맺고 또 익어왔으니 우주의 섭리가 고스란히 담긴 신비라 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대추나무 잎의 푸르름과 익어가는 대추빛깔이 매일 달라지는 것을 보는 즐거움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다. 내 삶의 공간에 하늘의 사랑과 은총이 햇빛과 비바람과 더불어 함께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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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한국포럼

지혜한국포럼 9월 행사에서 사회혁신 컨설팅, 임팩트투자 기업 MYSC의 김정태 대표로부터 ‘ESG 시대, 기업이 변화하는 이유, 어디까지 왔는가?’ 라는 주제의 발제가 있었다.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고 기업의 공적 책임을 강조하는 가치지향성이 경영의 기조로 자리잡아가는 현실을 잘 짚어주었다. 아직 그 흐름이 부분적이고 그 비중도 제한적이지만 적어도 이런 가치지향성에 배치되는 기업이 환영받지 못하고 의외의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음은 폭넓게 인정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이익과 가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기업경영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좇는가가 핵심적인 과제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이익추구와 가치추구를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쟁점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보면 ESG 라는 것이 기업 경영의 원리일 뿐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삶의 원칙이 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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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빛깔

단독주택으로 이사 온 이후 첫 가을을 맞는다. 가을을 맞은 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유난히 올해 계절이 바뀌는 것을 피부로 실감한다. 주택에서 거주하는 탓일게다. 아침 저녁으로 땅과 풀, 나무와 새들을 보고 신선한 공기를 맛보면서 우리의 삶이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매 순간 깨닫는다.

9월이 되니 햇볕의 느낌이 다르다. 노란 기운이 강해지고 여름의 맹렬함보다 푸근함이 더하다. 대추나무를 비추는 햇살도 대추가 익어가는 것과 함께 익어가는 느낌이다. 계절 마다 제 빛깔을 가진다 하겠지만 유독 가을의 빛깔이 눈에 띠는 것은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단풍과 낙엽때문이리라. 벌써 철이른 단풍과 낙엽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인생도 각 단계마다 제 빛깔이 있을 것이다. 지난 시기 내가 드러낸 삶의 빛깔이 어떠했든지 가을을 맞이한 나무들이 그윽한 색깔을 준비하는 것처럼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을은 자연의 섭리와 함께 인생을 되돌아보며 성찰할 준비를 하게 만드는 복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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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천도교, 기독교

동학, 천도교와 기독교의 갈등과 연대 1893- 1919

이영호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최근 쓴 자신의 저서를 보내왔다. 제목 그대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시기 한국에서 동학, 천도교, 기독교의 종교적, 사상적, 조직적 갈등과 연대를 추적한 역저다. 이 세 종교는 모두 한국의 상황 속에서는 새로 시작하거나 수용되는 것이어서 전통적 질서와 세계관이 해체되고 있던 당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경쟁 속에 위치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주제에는 관심이 컸었다. 동학의 발생, 그것의 천도교로의 전환, 기독교의 수용과 정착이 조선의 정치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진행되던 이 역동적 시기가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흥미를 끌었다. 특히 과학주의, 세속주의 세계관이 문명의 이름으로 급속히 밀려들고 사회불평등에 대한 계급적 시각도 조악한 형태이지만 급진전되고 있던 때에 사람의 마음과 영성을 중시하는 종교적인 세계관이 강력한 힘을 발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오랜 궁금함이었다.

되돌아보면 이런 개인적 관심을 충분히 끌어가지 못한 데에는 시대정신의 압력도 한 몫을 차지한다. 내적 윤리, 종교적 심성, 신앙의 본질을 정면에서 강조하기보다 늘 사회경제적 맥락과 기능의 관점에서, 외피와 문화의 수준에서만 인정하려는 역사유물론, 농민혁명론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진지한 시도로 평가할만하다. 세계관의 기초로서의 종교, 그것이 지닌 독자적 힘, 그러면서도 동학과 천도교 사이의 분명한 단절, 다시 천도교와 기독교의 접점과 간극을 깊이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1919년을 끝으로 삼고 있어서 결국 31운동에서의 천도교, 기독교의 연합으로 이어지는 맥락이 책 전체의 기본골격을 이룬다. 하지만 그 때문에 종교 자체의 본질적 긴장과 동학을 천착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오히려 1920년대, 문화운동과 농민운동, 계급운동과 기독교 사회운동이 분출하는 과정에서 신앙과 종교, 종교와 세속의 접점과 긴장이 어떠했는지를 주목했더라면 설명의 틀도 좀더 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물론 그것은 또 다른 책의 주제가 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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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사회학

내일부터 2학기가 시작된다. 여전히 학생들과 언제 대면할지 미지수인 상태다. 온라인 수업방식에는 꽤 익숙해졌지만 새로 개설한 ‘꿈의 사회학’ 강의 준비로 마음이 바쁘다. 한국사회학회장 취임논문으로 ‘희망의 사회학’을 썼고 3년 전 서울대 김홍중 교수와 [꿈의 사회학] 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으니 아주 낯선 주제는 아니지만 수업은 처음이다. 구글에서도 이런 명칭의 강의계획서는 찾질 못했다. 어쩌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처음 하는 강좌일지도 모르겠다.

기성세대의 꿈은 한국사회의 고도성장, 도시화, 민주화, 세계화의 역동적 흐름 속에서 구성되고 작동했다.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의 기회가 주어지던 시대에 가능했던 꿈이었다. 불평등은 고착화하고 지위상승의 가능성은 희박하며 원하는 일자리는 부족한 시대, 정치는 패거리 권력다툼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남북관계의 전망도 어두운 저성장의 시대에 어떤 꿈꾸기가 가능할 것인가. 디지털 기술혁신으로 열리는 초연결사회의 변화가 새로운 기회와 꿈자원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힘써 찾아보려는 마음이지만 수강생들의 공감을 얼마나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 단초만이라도 여는 수업이 되기를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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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공동체

잠을 깨면 대문을 열고 심호흡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코로나와 무더위로 답답해진 만큼이나 아침 공기의 상쾌함이 좋다. 풀내음을 담은 신선한 바람을 폐부 깊이 들이마시노라면 내 숨이 생명의 원천에 가닿는듯한 신비함마저 느낀다. 헬라어에서 바람, 호흡, 영혼, 숨 등은 모두 같은 어원을 지녔다고 들었는데 충분히 그럴 법하다.

호흡공동체라는 책을 접했다. 인류는 물론이고 동식물까지도 공기를 나눠 마시는 생명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관점에서 공동체의 공기를 주목하자는 논지가 신선했다. 어떤 공기를 누구와 더불어 마시는지, 그로 인한 위험과 기회가 어떻게 배분되고 공유되는지를 공기관계로 개념화하고 그것을 둘러싼 공기의 과학과 공기의 정치를 도모하자는 제안도 새로웠다.

공기는 지구공동체에 속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값없는 공유재이지만 오염되면 모든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미세먼지가 초래하는 오늘의 위기는 울리히 벡의 경고처럼 국경과 계층,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민주적으로 확산되는 위험의 명백한 신호탄이다. 숨쉬기가 힘든 위기 앞에서 공기의 과학을 강조하는 저자들의 주장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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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과 시력

세종으로 이사오면서 안경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안경이 없이 보낸 두 달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원래 시력이 크게 나쁘지 않은 탓이겠지만 애초 시력이 문자 해독에 맞추어져 있었던 탓도 있는 것 같다. 책 보는 것과 글 쓰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때는 시력이 조금만 나빠도 불편을 크게 느꼈지만 정원을 돌보고 산책을 하며 저녁 노을을 감상하기에는 지금의 시력으로도 큰 불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 안경을 쓰지 않고 지내보려 마음을 먹었다. 책을 보거나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여전히 적지 않으니 언젠가는 안경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 만이라도 소나무의 잎이 자라는 것과 대추나무 열매가 커가는 것을 안경 없이 바라볼 생각이다. 노트북과 핸드폰이 필수품이 되는 시대에 시력의 불편이 나를 조금 더 그런 기기들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곰곰 생각하면 관심에 따라 시력이 좌우되는 것 못지 않게 명료한 시력을 중시하는 것 자체가 내 생각을 좌우하기도 한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 내 눈이 미치는 대상에 내 마음과 정신도 쏠리게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행위는 단순히 보이는 영상을 인지하는 것 이상의 주관적 행위임을 새삼 느낀다. 안경을 잃어버린 것이 불편한 다행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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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고 거두는 것

손바닥 만한 텃밭이지만 채소를 심고 싶은 욕구가 컸다. 조치원 시장을 가서 상추와 고추, 쑥갓과 깻잎 모종을 사 오던 날, 매우 무더웠지만 기분이 좋았다. 작은 모종 속에 담긴 생명이 새로웠기 때문일까.

심은지 꼭 일주일이 되는 날 첫 상추잎을 따서 먹었다. 향긋한 내음이 입안을 가득 채웠고 사서 먹던 맛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입견이었을테지만 내가 심어 거두는 행동에 수반되는 어떤 감정이 입맛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심고 거두는 일 사이에는 내가 하는 일이 없다. 물을 주기도 하고 간간히 흙을 돋우어주기도 하지만 그 녀석들이 자라는데 내가 미칠 힘은 전무하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그 분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대지의 생명력, 흙의 약동함을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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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 백신과 디지털 거버넌스

코로나 19 백신인 아스트라제네카 1차 접종을 마쳤다. 온 세계가 힘을 모으고 국가역량이 총동원되다시피 한 탓이겠지만 예약부터 접종 후 안내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거버넌스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는 기회가 되었다. 인터넷 예약에서 질본의 실시간 안내, 접종 의료기관의 역할과 곧 이은 확인 증명서 발송 등 전 과정이 가히 일사분란하다 할만치 체계적이었다. 이 놀라운 효율적 동원에서 선진국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도 많겠고 감시 시스템의 심화를 염려하는 사람도 제법 있을 법하다.

어쨋든 백신 접종은 감염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개인에게도 절실한 일이고 국가 차원에서도 경제회복과 정치적 리더십에도 결정적인 변수다. 그런가 하면 전인류가 함께 극복해야 할 문명적 사안이기도 하다. 오늘 접종을 받은 일은 나의 개인적 안전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국격, 인류공동체의 숙제와 과학기술문명의 자부심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명사적 사건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 국가, 인류 차원의 관심과 노력이 중첩되는 한편으로 그 불일치와 간극에서 비롯되는 긴장을 감당하는 일이 앞으로의 큰 과제일 듯하다. 통계적으로 ‘증명’하는 총체적 성과가 뚜렷하더라도 0.1 퍼센트의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통계적 증명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라는 말을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한다고 볼 때 통계의 확실성과 실존적 불확실성을 연결할 지점이 어디일지는 여전한 숙제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