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병오년 신년휘호

2026 병오년 설을 맞아 신년 휘호를 써서 서재에 걸었다. 이번 달로 오랜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는 내 자신에게 주는 글로 自處超然 (자처초연) 對人靄然 (대인애연) 失意泰然 (실의태연) 無事澄然 (무사징연) 16자를 골랐다. 홀로 있을 때 초연하고, 사람을 만날 때 따뜻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태연하며, 일이 없을 때 맑은 마음을 가지라 – 올 한 해의 좌우명으로 삼기 적합한 내용이다.

이 글귀는 명나라 말기 학자 최선이 시인 왕양명에게 준 글로 알려진 처세육연 중 4연이다. 원문의 순서와는 달리 일이 없을 때 (無事) 맑은 마음을 유지하라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배치했다. 현재의 내게 가장 절실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2연은 有事敢然 (유사감연) 得意淡然 (득의담연) 인데 일이 생기면 과감히 감당하고 뜻을 이루어도 담담하라는 내용이다. 유학적 태도와 도교적 정신이 어우러져 있는 이 처세론은 경주 최부자댁 가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성경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하면 다른 것들도 더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사회학자로서 나 역시 개인적인 차원보다 공동체적 쟁점을 늘 중요하게 여겼다. 계엄과 탄핵의 격랑 속에서 맞이한 작년에 ‘事必歸正 (사필귀정)’ 을 신년휘호로 쓴 것도 헝클어진 질서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공의적 바램을 담은 것이었다. 나라 안팎이 여전히 불확실한 2026년에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건 여전히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천하를 다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궁극적 가치는 개인의 존엄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창조주의 사랑이라는 메시지가 더 근원적이다. 동양에서도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공적 활동도 개인의 자기 관리에서 출발한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가르쳐왔다. 홀로 있을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유학의 가르침은 은둔자의 삶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올곧은 선비가 되기 위함이었다.

공적 활동에서 물러난 자유로운 생활인에게 내면의 자세를 우선 돌아보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달라진 환경 속에서 흔들리기 쉬운 정서와 생활 방식을 새롭게 재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확실한 상황, 의외의 곤경, 외로움의 장애를 감당하고 이겨낼 정서적 맷집을 키워야 한다. 홀로 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일이 없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 – 이 4연을 새해의 화두로 붙잡고 애쓰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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