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물로 쓰는 글씨

우연히 해보기 시작한 물로 쓰는 글씨연습이 퍽 재미있다. 화선지에 물만 적신 붓으로 안진경의 ‘쟁좌위고’ 행서를 임서해 보는데 의외로 먹을 사용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게 획의 강약과 섬세함이 잘 드러난다. 글을 쓴지 십여분 만에 글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만 어차피 남기려는 뜻이 없는 연습일 바에야 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깨끗한 화선지를 다시 사용할 수 있고 연습이 끝난 후 붓을 빨아둘 필요도 없으니 금상첨화다. 짧은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기도 좋아 붓을 잡는 시간이 오히려 늘어나는 효과도 있다.

화선지에 공들여 쓴 글자가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삶의 한 단면을 보는 느낌이다. 정확한 필획의 모습을 구현하려고 최선을 다해 써 보지만 그 디테일은 서서히 사라지고 마침내 흰 화선지만 남는다. 어제의 행적과 성과가 어떠하든 늘 새로운 내일이 주어지는 인생의 이치와 같다고 할까. 어쩌면 우리 삶이 먹으로 쓰여지지 않고 물로 쓰여지기에 희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부끄럽고 안타까운 어제도 잊혀질 수 있고 늘 새롭게 시작할 내일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잘못도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구원사상이 과거에 억메인 인생에게 큰 해방의 복음이 될 수 있음을 몇 번이고 재생되는 화선지 속에서 떠올리게도 된다.

하지만 우리 삶이 전부 물로만 쓰여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끝끝내 없이지지 않고 인생 전반에 긴 영향을 남기는 과거도 적지 않은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로 쓴다고 생각했는데 사라지지 않는 과거도 있고 먹으로 썼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들도 적지 않다. 사라질 기억과 남길 과거를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먹과 물을 선택할 자유가 애초부터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붓으로 쓸 뿐이고 그것이 물로 쓰여질지 먹으로 쓰여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자의 권한일른지 모른다.

그래서 쓰는 순간에는 먹인지 물인지 의식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을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물로 쓸 때는 마음가짐부터 먹으로 쓸 때와 같지 않아 마음은 편한데 집중도가 떨어진다. 인생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내일이란 새로운 기회가 한없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오늘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약해지기 쉽다. 그렇다고 매일을 공든 작품 쓰듯 모든 힘을 쏟아붇는 것은 감당하기도 어렵고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물로 쓰는 여유와 먹으로 쓰는 집중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의 균형감이 중요할텐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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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가 된 유네스코

장성의 필암서원을 다녀왔다. 입구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이란 간판이 우뚝하다. 서원 내 마루에는 오드레 아즐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서명이 담긴 “서원, 한국의 성리학 교육기관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한다”는 확인서가 걸려있다. 2019년 이곳을 비롯하여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등 9곳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년 전에는 통도사, 부석사 등 한국의 전통사찰 7곳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이들 산사 에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는 자랑스레 세워져있다. 한국 유교와 불교의 유산이 모두 유네스코로 인해 세계적 유산임을 공인 받은 셈이라 할 수 있겠다.

유네스코 표지판은 그 자체 문화 브랜드다. 조선왕조실록이나 KBS 이산가족찾기 자료의 가치는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로 설명되곤 한다. 아리랑이나 판소리, 종묘제례약의 품격 역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이란 해설로 뒷받침된다. 지방정부들이 앞을 다투어 자기 지역의 유무형 문화유산의 가치를 확인받고자 유네스코 문을 두드린다. 집 가까이 있는 고등학교 교문에는 ‘유네스코 협력학교’란 간판이 걸려있다. 대학입시 부담이 강한 한국에서 유네스코가 표방하는 지속가능교육의 가치들이 실제로 학교현장에 얼마나 비중있게 반영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학교의 자긍심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네스코가 이런 브랜드 파워를 갖게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다른 어떤 국제기구도 갖지 못한 유네스코만이 지닌 문화적 영향력이다. 그런만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국가적 관심사가 되고 문화다양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든든한 기반이 된다. 하지만 일본의 군함도 유적 소개와 사도광산 등재추천에서 식민지 역사경험을 배제하려는 시도, 중화민족의 문화력을 확인하려는 자국주의 기획이 고조되는 중국의 문화공정에서 보듯 아직은 인류보편의 역사이해보다 국가주의적 역사해석에 더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문화가 상품이 되고 팩트보다 상상력이 힘을 얻는 시대가 될수록 관광자원을 위해 과거유산을 침소봉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쉽다.

조용한 산사나 서원 앞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란 표지판을 보는 사람들이 떠올리는 생각은 무엇일까? 민족적 자부심? 관광자원의 우수함? 지역적 정체성? 유네스코의 정신은 이런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권의 자긍심과 무형예술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인류보편의 지적 도덕적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다. 과연 21세기에 저 브랜드가 그런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관건은 유네스코가 확보한 이 독특한 브랜드 파워를 새로운 지구적 문화실천과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혁명으로 삶의 전 영역이 크게 변하는 시대에 과거보다는 미래, 자랑보다는 책임, 지역보다 인류를 표상하는 형태로 유네스코 브랜드 파워가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필암서원 앞에서 일본의 군함도, 중국의 문화공정이 떠올라 유네스코라는 멋진 브랜드 파워와 인류평화란 미래과제에 대해 갖게된 생각의 한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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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셔널리즘과 아마추어리즘

토트넘의 손흥민 선수가 유럽 프리미어 리그에서 23골로 득점왕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운 후 그를 키운 아버지 손웅정의 교육론이 덩달아 주목을 받고 있다. 수년간 패스와 드리볼이 두 발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본동작만 반복훈련 했다고 한다. 기본기를 강조하는 원칙을 아들에까지 철저하게 지킨 일관성이 놀랍고 그 아버지의 지도에 성실하게 부응한 손흥민의 자세는 더욱 놀랍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굳이 청문회에서 쏟아져나오는 유명인사 가족의 변명을 듣지 않아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다.

탁월함을 강조하고 최고의 기량을 얻기까지 스스로를 절차탁마하는 프로정신은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발전의 원동력이다. 앞으로 손웅정의 교육론을 빌어서 월드클래스, 최고를 향한 끝없는 노력을 강조하는 주장들이 더욱 힘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집념이 반도체 강국과 BTS 신화를 가져온 한 힘임은 부인할 수 없는데 저런 방식을 모든 사람, 모든 영역에 보편화해도 좋을지는 의문이다. 모두가 일류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합이 프로게임일 수 없다. 어디에선가는 기본기가 모자란 사람도 축구를 즐길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개인의 기량보다 함께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르쳐야 할 때도 있다.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은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두 바퀴다. 전문적 능력이 평가받고 뛰어난 프로들만 주목받는 세상인 듯 하지만 사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아마추어적이다. 부모 노릇이나 시민 역할을 프로처럼 하고 있다고 장담할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사회적으로도 프로들의 세계와 아마추어 활동무대의 경계가 생각처럼 분명한 것은 아니다. 아마추어 경연을 통해 발굴된 프로 연예인들이 적지 않고 곳곳의 인플루언서 인기가 제도언론의 영향력을 잠식하고 있다. 인터넷과 정보화는 아마추어형 프로, 프로형 아마추어 같은 융합형태를 더욱 조장할 것이다.

점점 더 프로페셔널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 질 것이다. 프로 의식이 없으면 전문성과 경쟁력이 약해지지만 지나친 프로의식은 전문가주의나 실력주의의 덫에 빠지기 쉽다. 아마추어적 태도는 참신성과 유연성을 가져오지만 지나치면 무책임한 적당주의를 심화시킨다. 이 균형이 깨어지면 엘리트주의로 변질된 프로의식이나 팬덤정서를 부추기는 아마추어리즘의 위험이 커질 것이다. 존경받는 프로페셔널리즘과 책임있는 아마추어리즘을 어떻게 균형있게 재구축할 것인가 – 손흥민의 쾌거에 박수를 보내면서 자문해보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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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친

5월 16일 스승의 날을 맞아 사회사학회 활동으로 오래동안 학연을 이어온 몇분들이 학회의 창립과 발전에 초석을 놓으신 서울대 신용하 명예교수님을 모시고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모두들 정년을 해서 학교에선 명예교수가 되고 지하철을 무임승차할 자격을 얻어 소위 ‘지공도사’ 반열에 들어섰지만 스승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늘 학생 시절이나 초보 교수 시절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모양이다. 다들 이전 일들 회상하면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다. 신용하 교수님은 최근 출간한 또 한권의 묵직한 저서를 가져오셔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사회사연구회가 태동하던 1980년으로부터 따져보면 벌써 40년이 넘었다. 한국사회가 엄청난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던만큼 개개인의 생애도 몇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스토리들로 가득할 터이다. 노치준 목사는 종교사회학자로서의 활동을 뛰어넘어 직접 목회의 현장에서 새로운 길을 걸었고 황경숙 교수는 학장으로 학교와 학계 이곳저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성실한 연구자의 모범이라 해도 좋을 김필동 교수는 사회사학회와 충남세종 사회학계의 중추역할을 해왔고 국내외 시민운동에 열심으로 참여해온 이정옥 교수는 여가부 장관으로 국정에 참여했다. 일본연구자인 한영혜 교수는 전통춤을 배우고 즐기는 춤꾼이 되었고 정근식 교수는 새로운 연구영역을 개척하는 열정에 더하여 2기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자리를 함께 하지 못했지만 조성윤 교수는 제주를 중심으로 민속종교와 기층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지속하고 있고 김경일 교수는 정년기념저작만으로도 두 권의 묵직한 책을 내놓을 정도로 여전한 건필을 자랑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학문활동을 했고 일이년을 사이에 두고 정년을 한 동세대여서인지 오랜 동학으로서의 우애를 깊이 공감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일상을 나누며 간간히 만나는 모임을 만들자는 제안에 너나없이 찬성했다. 한영혜 교수가 발빠르게 ‘사회사 노친네’라는 이름으로 카톡방을 개설했는데, 정겨운 이름이지만 아직은 ‘ 나 젊어’를 외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하여 새 이름을 정하기로 했다. 황경숙 교수가 서로의 의견을 모으는 프로그램을 공람한 덕분에 ‘사사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사회사학회 친구들’의 줄임말이면서 편하고 사사로운 모임이란 의미도 담을 수 있는데다 부르기도 편해 참 좋다. 한국사회사학회가 내 학문여정에 큰 도움을 준 곳인데 이제는 이런 좋은 모임까지 선사하는 인연이 되니 너무 감사한 일이다. 사사친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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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혜 교수의 춤꿈

한영혜 교수의 공연 ‘춤꿈’을 관람했다. 춤을 취미로 해온지 안 것은 꽤 오래되었지만 정작 본격적인 무대공연을 지켜본 것은 처음이었다. 작년에 재일한국인들의 문화 속에 춤이 어떻게 전승되고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다룬 두툼한 연구서를 받았을 때 그 열정의 깊이를 새삼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공연에서 받은 울림은 또다른 것이었다. 한교수와 함께 출현한 사람들이 대부분 취미로 춤을 익혀온 분들이라 하니 놀라왔다.

춤의 기본도 알지 못하는 나로서 어떤 평가를 할 처지가 못되지만, 강한 움직임과 고요한 정지동작이 이어지는 춤사위가 글씨의 붓놀림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가 하면 강하게 꺾이기도 하고 큰 동작과 섬세한 움직임이 어울려 한 매듭을 짓는다. 빠른 속도감에 이어 미세한 움직임이 뒤따르는 것도 글씨의 운필과 상통하는 느낌이었다. 나이 지긋한 남성출연자의 다소 어색한 몸놀림을 보면서 마음처럼 써지지 않는 글씨가 떠올라 혼자 웃기도 했다. 사실 약함 속에 강함이 있고 가득한 듯하면서 여백이 있는 것이 좋은 글씨인데 아마 춤꾼도 웬만한 훈련 없이는 섬세한 몸동작을 강한 춤사위와 접맥시키기가 쉽지 않을 터이다.

정년을 하고, 심지어 정년에 앞서 퇴직을 하고 열정을 쏟을 대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늙는다는 것은 그런 열정이 사그라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고령화가 진행되는 요즈음 소란한 만남과 허세가 아닌, 내부의 기쁨과 행복을 길어올릴 역량을 키우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절실한 과제가 된 듯 싶다. ‘춤꿈’이라는 표제가 남을 위한 공연이기 이전에 스스로의 꿈을 꾸는 자리를 만든다는 뜻을 담은 것일텐데 일생 힘을 쏟았던 영역에서 벗어나 제2의 꿈들을 찾고 키워가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한교수의 건강한 열정이 지속되기를 성원하며 돌아온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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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꽃을 저녁에 줍다

지천에 꽃이다. 봄에 이렇게 많은 꽃이 피는 줄 정말 몰랐다. 모두의 눈을 끌면서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매화, 목련, 개나리, 벗꽃, 진달래는 그들 스스로 자태를 뽐내지만 몸을 굽혀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띠지도 않을 작은 풀꽃들도 너무 많다. 명자나무 꽃이 피는가 했더니 이제 집앞 가로수의 꽃사과가 그림같이 화사하다.

매일 달라지는 꽃나무들을 보면서 루쉰의 ‘아침의 꽃을 저녁에 줍다’는 산문집을 떠올린다. 수년전 이욱연 교수가 번역한 책을 보내와 잠시 본 적이 있고 동료 권현지 교수가 이 글을 좋아해 작품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최근 유난히 이 말이 와닿는 것은 새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즐기다가 어느새 그 꽃들이 떨어지는 모습 또한 매일같이 접하기 때문인 것 같다.

왜 루쉰은 아침의 꽃을 저녁에 줍는다 했을까? 한자어의 특성상 朝花와 夕拾간의 의미연관을 해석하는 방식이 수학공식처럼 명료하긴 어렵다. 꽃이 아침에 피면 즐기고 저녁에 지면 쓰는 기다림의 철학,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자세를 노래한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고 아침에는 화사하게 피는 꽃도 저녁에는 시들어 버려지는 것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경계하는 화두로 삼을 수도 있겠다. 어쨋든 아침과 저녁, 피는 것과 지는 것, 활짝핀 꽃과 떨어진 낙화의 대비가 새삼 다가오는 계절이다. 화려한 봄꽃을 보면서 떠올리는 시어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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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팬데믹 일상의 회복

코로나 팬데믹으로 2년여 통제되던 사회생활이 바아흐로 정상화되려는 모양이다. 아직 수만명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고 코로나 후유증을 호소하는 소리들이 적지 않지만 더이상 격리와 통제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데 모두가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동안 여러 규제들로 고통을 받았던 학생들과 자영업자들이 특히 환영하고 실제 주변의 음식점과 까페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듯하다.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까? 모든 것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만남의 기쁨과 접촉의 즐거움이 회복된다 해서 비대면접촉이 생각보다 괜찮고 불필요한 회식이 사라져 저녁이 있는 워라밸을 가능케 했다는 놀라운 경험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물리적 거리두기는 사라지겠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는 자발적으로 유지될 수도 있다. 아니 효율을 중시하는 기업과 조직들이 앞서서 그런 방향으로 전환할지 모른다.

역시 문제는 불평등이 아닐까 싶다. 우리 일상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기게 된 디지털 변화가 종래의 정치경제적 불평등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가 관건이다. 온라인 플랫폼이 주는 혁신의 가능성과 공짜점심의 즐거움 못지 않게 지적 문화적 능력차이가 더욱 심화될 우려도 적지 않다. 로버트 라이시는 이미 펜데믹과 디지털화가 겹치면서 사회계급의 분류방식이 달려졌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The Remotes, The Essentials, The Unpaid, The Forgottens 라는 4 유형론을 제시했는데 단순한 부의 규모나 정규직 여부로 판단할 수 없는 구별선이 뚜렷해짐을 지적한 것이다.

이미 프레카리아트라 부르는 불안한 계층의 확대는 목도하는 바이고 정규직에 대한 처절한 경쟁을 강화시킨다. 그런가 하면 고령화의 진전과 교육기회의 불균형이 지속되면 유발 하라리가 ‘무용계급’ *useless class”라 부르는 사회적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집단도 점차 늘어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이 말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란 긍정적 미래가 열리기를 바라지만 새로운 격동과 저항을 불러올 모순의 축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염려와 우려가 대안일 수는 없지만, 그런 우환의식이 새로운 대응능력의 자원이 될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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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 – 자연과 세상

한국의 봄이 참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죽은 듯 했던 나뭇가지에 잎이 돋아나고 어느 순간 들풀과 민들레가 겨우내 얼었던 땅을 뒤덮는다. 만물이 같은 생명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생각을 절로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 수십년간 이런 봄을 맞이했는데 유난히 그 느낌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매일 땅을 밟고 사는 환경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참 오랫동안 자연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셈이다.

그런데 사람사는 세상은 이런 자연의 흐름과는 전혀 다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경담장이 높아지고 이웃과도 눈길을 마주치지 않는 거리두기가 일상화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반문명적 전쟁의 참상은 연일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야만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국제사회도 강력한 억지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중국은 오히려 러시아를 두둔하는 모양새고 프랑스는 극우정당의 힘이 커지고 있다. 굳이 미중 패권경쟁이 아니더라도 세계가 다시 분열될 조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근대 지식인들은 자연과 문명을 구별하고 인간이 자연상태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자랑했다. 과학기술과 시장경제를 앞세운 서구의 힘도 이런 문명중심적 세계관을 증명한 듯 보였고 실제 한국을 비롯한 많은 제3세계가 그 모델을 좇았다. 하지만 오늘 자연과 문명을 대비해 보노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만물이 생명으로 잔치를 벌이는 이 봄에 전쟁과 분열, 대립과 비난을 넘어서지 못하는 지구촌의 문명이 자랑스러울 수만은 없어 보인다. 촌래불사춘이란 시적 표현은 우리 문명의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는 화두가 아닐까 싶다. 자연의 봄처럼 문명에도 봄이 오게 할 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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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 두 목소리 – 有爲와 無爲

‘네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흔히 황금율로 불리면서 서구 윤리도덕의 근간으로 언급된다. 그런가 하면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이란 공자의 말은 예를 중시한 동양 윤리의 기초로 간주된다. 적극적 실천을 강조한 전자를 금율(golden rule), 소극적인 無爲를 강조한 후자를 은율(silver rule)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동서양을 서열화하는 듯한 표현이라 최근에는 두개의 황금율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요즈음 이 두 목소리가 내 마음 속에서 종종 부딪친다. 내가 바라는 바를 위해 새로운 일과 활동의 기회를 확장하고픈 마음이 한켠에 뚜렷한 반면 새 일을 벌이기보다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또다른 목소리도 또렷하다. 되돌아보면 정년기념 서예전을 준비하면서 제자들에게 써준 글도 이 두 유형으로 나뉘어지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나 노자의 글들은 후자에 기울어져 있었다면 최승자나 심보선의 시는 전자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애써서 노력하고 바라는 바에 힘을 쏟는 것과 세상사의 흐름을 섭리로 수용하고 순응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 – 어느 것도 현재의 나로서는 포기하기 어려운 덕목이자 내면의 지향이다.

지혜포럼을 이끌어가시는 몇 분들과 앞으로 어떤 새로운 일을 기획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면서 내 마음 속 두 지향의 불편한 공존을 또 한번 절감했다.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들, 대선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 세대간 젠더간 갈등, 맘몬주의라 부를만큼 강한 돈의 위세 앞에서 가치의 아노미를 겪고 있는 현실을 단지 언급하고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한가라는 물음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덕이라는 생각이 혼란스럽게 부딪친다. 공신력이 하락하고 많은 안팎의 어려움에 부딪친 기독교계를 위한 어떤 노력이 절실한 시대임은 분명하고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분들의 헌신이 존경스러운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된 사람이 미칠 거대한 힘을 믿는 것이 교육과 신앙의 중요한 가치임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욕과 당위에 비해 내가 가진 경험과 식견, 신앙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조심스러운 마음이 커지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진솔한 성찰일지 비겁한 머뭇거림일지 확신이 서질 않지만 이 두 마음은 당분간 내 속에 함께 있을 것 같다. 어떤 새로운 계기가 오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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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담긴 학연

신복룡 교수께서 보내주신 [전봉준 평전]을 읽었다. 영웅이라 할만한 인물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영웅주의에 빠지지 않고 평범한 민중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저자 스스로 원했던 사람냄새 나는 정치전기학의 한 사례라 함직하다. 오래 전에 출간했던 자신의 책을 꼼꼼히 다시 보완하고 새로이 밝혀진 자료와 내용들을 보충하면서 도움을 입은 후학들과의 학연에 감사함을 밝힌 것 참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다.

적확한 말, 살아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학자에게 필수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 점을 잊고 지낸다. 이 점에서 최근 삼국지와 플루타르크 영웅전 번역본을 연이어 출간했고 성경 신구약을 새롭게 다듬은 작업까지 마무리하신 신교수님 열정은 놀랍다. 과거에도 구한말 주요한 책들을 꼼꼼히 번역하면서 잘못 알려진 사실과 상식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진력하셨는데 그런 정성과 집념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이 책에서도 본다. 수십년간 몸처럼 익숙해졌을 자신의 글투를 새롭게 고쳐쓰는 것은 웬만한 성찰과 노력 없이는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 나와의 인연을 언급한 부분을 읽으며 전주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나보다 앞서 동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여러분들을 만나 이곳 저곳 답사하며 이야기 나누었던 행복한 인연들에 감사한다. 박맹수 총장, 이종민 교수, 신순철 교수, 이진영 교수, 최현식 원장, 표영삼 선생, 김은정 기자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분들의 도움을 입었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 자연스레 내 연구관심도 만나는 사람도 달라졌지만 언젠가 나도 그때의 학연들을 떠올리며 지난 글을 고쳐 쓸 때가 올 지 모르겠다. 그러려면 저 열정과 수고, 기억력과 성실함이 내게도 있어야 할텐데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