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땅 위에 살다

오랜 아파트 생활을 마감하고 단독 주택으로 이사한 후 땅 위에 산다는 느낌이 새삼 와 닿는다. 넓지는 않으나 정원이 있고 소나무와 대추나무, 살구나무와 매화나무가 줄장미와 함께 자라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 밖을 나서도 동네 한바퀴를 돌아도 흙과 땅이 보이는 환경 그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아파트 생활이 무려 40년이었으니 그간 땅은 여행할 때만 밟는 곳처럼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공중에 떠서 살다가 땅 위에 내려와 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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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讀五車書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3층 로비에 ‘수독오거서’라는 글씨 액자를 걸었다. 김명환 관장의 부탁으로 두보의 시구 중 한 부분을 쓴 것인데 학생들이 더 많은 책과 가까이 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한자와 친숙하지 않은 지금의 학생들을 감안하여 아래에 한글로 그 뜻과 함께 중앙도서관이 지혜로운 인재의 산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재직한 모교의 중앙도서관에 정성을 담은 글을 기증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 그것이 학생들에게 격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기쁘고 보람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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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and new

조형근 박사가 장인이 만든 수제품 만년필을 보내왔다. 정성이 깃들였을 그 만년필을 대하니 초보 강사 시절 ‘old and new’란 쪽지와 함께 받았던 선물이 떠올랐다. 그 속에는 붓과 만년필이 들어있었는데 보낸 분의 탁월한 감각에 감탄했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학자에게 문방사우나 필기구에 대한 욕심은 없을 수 없다. 실제로 붓과 펜은 동양의 선비와 서양의 지식인들의 가장 중시하던 아이템이었다.

동서양 문명이 붓과 펜 위에 성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편리한 연필과 불펜이 등장하면서 점차 일상에서 멀어졌고 컴퓨터 시대가 되어서는 아예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뛰어난 글을 쓰는 작가나 학자들도 정작 글씨는 초등학생 같은 경우도 적지 않다. 붓으로 쓴 글씨에 놀라는 중국 학자도 적지 않다. 기술이 동서문명을 통합시키고 있다고 환영해야 할 지 오랜 문명의 품격을 폐기한다고 아쉬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짐을 정리하면서 붓과 만년필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어떤 것은 자주 써서 손때가 묻었고 어떤 것은 아예 새 것으로 남아 있지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는 시대의 ‘new’는 디지털 첨단기기의 몫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붓과 만년필에 담겨온 정성과 품격은 결코 사라지거나 무의미해지지 않을 것이다. ‘流水居然’이란 글씨까지 새겨진 정갈한 만년필을 접하니 法古創新을 표방한 새로운 도전을 해볼 마음이 생기는 듯 하다. 무모한 과욕일까 참신한 발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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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축의 시간

어제 오늘 달라지는 잔디와 나무잎의 초록빛을 감상하다가 아 어제가 5월 18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자 고요하던 마음에 파문이 인다. 40년 전 그 날 아침 신문을 보면서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그 이후의 역사적 부침, 오늘의 정치적 소란에 대한 소회까지 파장의 폭은 넓다. 평온하던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 애써 생각의 깊이를 축소시키려 하는 나를 발견한다.

개인이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시간과 공동체의 역사가 구성되는 시간은 그 결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나라의 흥망성쇄가 개인의 생노병사와 별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할 수 없으니 양자가 모두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인류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실존적 시간은 부차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헤겔은 ‘역사의 간지’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종교가 가르치는 우주적 시간, 신의 개입, 카이로스의 순간은 국가공동체가 전유하는 시간감각의 한계를 더 문명론적이면서 실존적인 차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코로나의 위험, 기술문명의 충격 앞에서, 여전히 삶의 무게와 질병의 두려움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5월 18일을 맞이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간감각을 국가화하지 않으면서 개인의 실존적 삶과 문명사적 시간성까지 포괄하는 해석의 폭과 다양성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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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탈출

아파트를 벗어났다. 결혼 후 40년 가까이 몸에 밴 아파트의 편리함 대신 흙과 정원을 손 보는 즐거움으로 바꾸고 싶은 바램의 결과다. 휘어진 살구나무 가지에 줄을 매 주면서 맛보는 새로운 기쁨이 앞으로의 기대감을 높인다. 하지만 분주한 일상과 각종 모임에 익숙해진 탓인지 오랜 삶의 방식과 연결망에서 소외될 수도 있으리라는 일말의 불안도 없지 않다. 일과 여유, 대화와 사색, 함께와 홀로의 균형을 찾아가는 일은 내게 주어진 새로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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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연휴 속 5.4운동

[중국현대사를 만든 세가지 사건]이란 제목으로 중국 100년사를 살핀 백영서 교수는 1919년의 5.4운동,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89년의 톈안문 사건을 상징적인 모멘텀으로 설명하였다. 실제로 한 세기 전 오늘 발발했던 5.4운동은 비단 중국현대사에서만 중요한 사건이 아니다. 두 달 앞서 분출한 조선의 3.1운동과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이 연동된 동아시아적 변혁의 한 국면이었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변화와도 맞물린 ‘새 시대’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民, 자각한 주체의식이 부상했고 청년, 학생, 노동자, 지식인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2021년 5월 4일을 보내며 한 세기 변화를 또다른 차원에서 실감한다. 정작 중국부터 노동절 연휴의 대이동 소식에 뭍혀 5.4운동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점점 더 일본중심적이 되어가는 일본이나, 3.1운동조차 데면데면하게 보낸 한국이 5.4운동에 주목할 리는 더더욱 없다. 격동의 20세기 초, 동경과 상해와 서울을 오가며 서구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던 당대 지식인의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모습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에 비해 시장을 통해 서로의 연결성을 절감하는 기업인, 가치사슬과 인터넷으로 얽힌 정보와 사물의 조밀한 연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실제로 정치인과 지식인, 공적 담론을 주도하는 지도층들과는 달리 일상의 삶에 충실한 경제인과 열린 가슴으로 문화를 소비하는 평범한 대중들에게서는 보다 열린 소통과 연대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지식인 중심의 과거사 해석에서 벗어나는 것을 환영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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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일어난 사건

자주 지나치던 집 주변의 한 아카시아 나무가 활짝 꽃을 피웠다. 얼마전까지도 기미가 없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같은 나무들도 이제야 조금씩 꽃망울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녀석은 아예 만개했다. 나무들도 그들 간에 경쟁을 할까? 아니면 유난히 성급한 녀석일까? 경쟁이라 하기에는 다른 나무의 속도에 관심이 없고 성급함이라기엔 제 갈 길을 가는 모습이 또렷하니 굳이 말한다면 개성이라고 할 밖에 없다. 세상사의 흐름이나 주변의 평판을 아랑곳하지 않고 우주의 섭리와 자신의 생명력에 순응하면서 분출하는 이 놀라운 아름다움은 매년 이맘때 주어지는 계시적 사건이다. 섭리와 개성과 자연스러움이 함께 연동하는 우주적 신비를 드러내는 징표로서의 사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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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의 인지부조화

4월의 마지막 날이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의 평화 퍼포먼스로 온 나라가 흥분했던 때가 불과 3년 전, 냉랭한 2021년 오늘의 한반도 상황을 보며 지난 3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생각하게 된다. 남북의 지도자가 판문점, 평양, 백두산에서 포옹하고 악수하며 내놓았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한 약속이자 미래의 비전일까? 안팎의 상황 변화로 이제는 시효가 끝난 낡은 구상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정략과 트릭의 산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허상이었을까?

냉정히 볼 때 이 세 가지 측면은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 모든 정치적 기획은 선의와 명분 못지 않게 정략적 판단과 이해관계를 내포한다. 동기가 순수하고 당위성이 또렷하지만 현실성이 없는 정책이 있다. 정략적인 이해타산에 기초했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 모든 측면을 함께 고려하면서 총체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전략적 실천의 관건일 터이다. 그러려면 자신과 상대방이 내세운 명분과 당위가 얼마나 타당한지, 그것에 기초한 현실진단은 얼마나 적확한지, 미래전망의 근거는 얼마나 확실한지 냉정히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2018년 일련의 역동성은 ‘민족”에 대한 서울과 평양의 공감에 기초하여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만큼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민족을 항구적인 범주로 간주하고 민족감정이나 민족의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 상수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네이션 (nation)에 해당하는 민족은 종족이나 혈연, 언어를 주요한 요소로 하지만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한국사에서 ‘민족’이란 말은 1905년 보호국화 이후 일본으로부터 소개되고 식민지로 전락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사용된 개념이다.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도 존속가능한 역사문화공동체의 항구적 실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20세기에 비로소 내세워지고 내면화된 새로운 개념 범주다. 신채호가 1909년 ‘국민’ 개념과 ‘민족’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를 힘써 설명한 것도, 동아일보가 1920년 3.1운동으로 조선인이 ‘민족’을 발견했다고 언급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은 각기 자신을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로 자임했다. 지금도 남북관계를 ‘국가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고 부르는 것은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를 민족관계라고 부르는 것도 두 체제를 넘어선 공통분모를 강조하고 통일을 목표로 하기 위한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신만을 ‘국가’로 간주하는 태도가 깔려있는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에도 ‘나라’ 의식은 뚜렷했고 중국과의 영토구획을 ‘국경’이라 불렀지만 오늘날과 같은 주권공동체로서의 근대국가 개념은 1897년 독립협회활동 이후 자리잡았다. 국권강화, 국권회복 운동의 목표로서 헌법, 정부, 주권, 국민, 외교 등의 개념과 더불아 자리잡은 것인만큼 남북한 모두가 자신의 체제정당성을 위해 매우 강조해온 개념 범주다.

판문점에서 남북정상이 서로의 손을 높이 들고 천명한 3년 전의 약속이 금새 빛이 바래고 긴장상태로 바뀐 것은 ‘국가’ 차원을 뒤로 미루어둔 채 ‘민족’범주만을 부각시킨 편의적 접근이 초래한 예상가능한 결과다. ‘우리민족끼리”라는 슬로건은 잠시의 화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국가관계와 갈등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다. 남북한은 언제든 필요하다면 민족개념을 뒤로 하거나 무시할 가능성이 높은데 수령 유일체제를 최고가치로 강조하는 북한은 특히 그러하다. 앞으로 북한은 점점 더 민족개념을 약화시키고 국가주의를 강조할 개연성이 크다. 이 불일치를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정책의 의외성과 불확실성에 대응할 총체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앞으로 절실하고도 긴요한 숙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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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재산권

4월 26일이 셰계 지적재산권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니 21세기적 현상임이 분명하다. 지적소유권이라고도 불리는 이 권리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첨단 지식, 혁신적 아이디어와 컨텐츠의 홯성화의 근간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BTS를 비롯한 K-Pop과 한국 영화가 전세계에서 환영받을 수 있게 된 것도 무형의 문화상품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제도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인류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해온 공유자원과 오랜 커먼즈들이 사유화, 상품화의 대상이 됨으로써 빚어지는 문제들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적 재선권의 보호와 그 과실의 범인류적 공유가 서로 함께 갈 수 있는 방도를 찾는 일이 더더욱 중요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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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와 1 사이

서울대 도서관에서 제작한 서예전 영상이 갑자기 삭제되었다는 연락을 아침에 몇 분들로부터 받았다. 알아본 결과 도서관 담당자가 내 직함 표기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유투브 주소가 달라진 탓으로 빚어진 일이었다. 새 주소로 그 영상은 다시 열렸지만 어제까지 이 영상을 본 600여명의 기록은 사라졌고 내용을 모르는 분들은 이 자료가 사라졌다는 생각을 계속할 가능성도 있다. 기술적인 요인이나 행정적 조치 만으로 0와 1 사이, all or nothing 을 오갈 수 있는 디지털 자료의 특성을 실감하면서 이 양면성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가 큰 숙제임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