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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감각

아들로부터 아이폰과 애플 워치를 선물받았다. 서울에 있는 아들, 미국과 대전에 있는 딸네가 모두 아이폰을 쓰는 관계로 이전부터 같이 연계되면 편리할 것이란 말을 들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갤럭시폰에 익숙해 있는데다가 굳이 교체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해 몇 년간 그냥 지내왔다. 내가 쓰고 있는 폰이 5년 가까이 되어 새 것을 구해야 할 즈음임을 알고, 아이들이 새해 선물을 이것으로 하자고 논의를 했다고 한다. 이번엔 기쁜 마음으로 그러자고 했고 아들과 애플 매장을 들러 원하는 모델을 골랐다.

처음에 손에 잘 잡히는 다소 작은 사양을 선택했다가 아무래도 화면이 작은 듯 해서 교환 가능 기간이 지나기 전에 좀더 큰 모델로 바꿨다. 그 덕분에 하얀색 포장박스를 뜯는 소위 언박싱을 두어 차례 해보는 경험도 했다. 이전에 쓰던 폰의 앱과 데이터를 옮기면서 매장에 와 있는 젊은 세대들과 같은 테크놀로지, 같은 문화를 교감한다는 근거없는 즐거운 감정도 잠시 느꼈다. 한동안 손목시계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애플워치는 가볍고 각종 메시지 확인과 전화 수신도 가능해 의외로 편리하다. 수면상황을 체크하기도 하고 내 운동상태를 실시간 알려주기도 해서 인공지능이 보다 본격적으로 연결되면 글자 그대로 유능한 개인 비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핸드폰이 모든 사람들의 필수품이 되었고 나도 오랫동안 사용해온 터라 폰을 바꾸는 것이 그다지 새로울 일이 아닌데 의외로 기분이 좋다. 아이들로부터 받는 선물이라는 것이 그 첫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랑을 주던 입장에서 장성한 자녀들의 정성을 받는 위치에 놓인 부모의 뿌듯한 감각이라 할 수도 있겠다. 데이터나 사진의 공유가 보다 손쉬워지고 가족간 함께 할 엡들도 있다고 하니 기계의 도움으로 가족의 친밀감이 더 높아질 것을 기대해본다.

요즘 반려동물이 가족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애플 같은 기기가 그런 매개고리가 되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그만큼 인간사회를 구성하고 이어주는 매개역할로 동물과 기계의 비중이 커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핸드폰을 통해 연결되는 정보와 사람의 네트워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데 독특한 디자인과 문화적 감수성이 동반되는 아이폰 세계가 주는 감각의 힘을 가만히 지켜보며 음미해 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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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갑진년 새해를 맞이했다. 31일 자정 가까운 시간, 시편 23편을 가족이 함께 읽으며 한 해의 감사를 나누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많은 사람이 건강 문제로 힘들어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시대에 무탈하게 2023년을 보내게 된 것 자체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정년 이후의 불확실한 여정에도 이만큼 안정된 상태로 소프트랜딩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다. 돌이켜보면 긴 인생길에서 만난 어려운 순간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내 발목을 잡을만큼 결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예기치 않게 다가온 행운과 도움의 손길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둔다’는 표현대로 긴 인생길에서 값없이 받은 것이 많으니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자녀 세대에도 같은 축복이 임할까 염려가 없지 않다. 세상이 점점 더 혼돈스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역병이 온 인류를 위협하고 곳곳에 비난과 혐오의 언설이 차고 넘친다. 유럽과 중동의 전쟁은 끝나지 않고 새로운 대립과 충돌의 우려를 키운다. 동북아의 지정학도 불확실성이 커지고 양안이나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도 높아간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근간을 이루던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의 정치적 퇴행은 너무 심각하여 21세기 인류문명이 아노미 상태에 봉착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문명위기론, ‘말세론’이 득세할 좋은 환경이다.

오랫동안 안정과 성장을 구가했던 한국은 이제 확실한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커질 조짐이다. 젊은 세대는 구직난, 양극화로 고통을 받는 가운데 세계 최고의 저출산으로 사회전반의 활력상실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일찍부터 무한경쟁에 내몰린 젊은이들은 협력과 우애보다 이익과 경쟁을, 사랑과 신뢰보다 싸움과 불신을 몸에 익히는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한다. 챗 GPT 로 촉발된 인공지능의 일상화가 새로운 갈등해소와 참신한 생활방식을 가져다 주기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비인간화, 기계화, 감시와 통제의 그림자가 얼마나 짙어질지, 우리 사회가 또다른 야만상태로 향하는 레트로토피아가 되지 않을지 우려도 적지 않다.

내 자녀를 위시해서 젊은 세대가 살아갈 21세기 미래는 얼마나 약육강식의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N포세대임을 강조하며 무한경쟁과 개인주의의 세례를 듬뿍받은 저들에게 시편 23편은 어떻게 들릴까? 권력과 돈의 위세가 날 것 그대로 작동하는 한국사회에서 선한 목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순한 양의 모습을 권유할 수 있을까? 험난한 시대를 뚫고 나가야 하는 자녀들을 생각하면 미래를 염려할 필요 없다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게 솔직한 심경이다. 신앙이란 모름지기 시대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견고한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겠지만 어슬프게나마 미래를 내다보는 사회과학자의 입장에서 그런 확신이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2024년도 여전히 여호와는 내 목자시고 우리를 외부의 위해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새해를 맞이하자고 가족들에게 권면의 말을 했다. 하지만 내 말에 강한 확신이 실리지 않음을 스스로 느낀다. 먹을 풀과 마실 물이 철따라 주어질 것이고 일상의 평안도 허락하실 것이라고 애써 강조하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나 자산을 본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 했는데 ‘믿음이 없는 자야’ 라는 힐난이 들려오는 것 같다. 새해를 맞이하며 시편 23편을 다시 읽으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는 말씀을 새삼 다시 묵상한다. 올 한 해 깊이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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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생, 소확행, N포

학생들 리포트를 읽다가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는 어휘가 달라지고 있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몇 년 전 N포세대라는 말이 많이 쓰였는데 언젠가부터 소확행이나 욜로라는 말이 강조되었고 올해엔 유난히 갓생이란 말이 곳곳에 등장한다. 취업, 연애, 결혼, 주택 등을 포기해야 한다는 N포론은 미래에의 희망이 사라진 세대의 좌절감을 표상한다. 소확행이란 말은 대단한 목표의 추구 대신 소소한 즐거움, 일상의 작은 만족을 추구하려는 지향을 가리킨다. N포에서 소확행으로의 변화가 유의미한 새로운 움직임인지 아니면 현실도피적 자기위안에 그치는 것일지 불분명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2023년에 처음 접한 갓생이란 말은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지닌다. 신이라는 뜻의 ‘갓(God)’과 인생의 ‘생(生)’을 합친 갓생은 신과 같은 삶, 모범이 되는 부지런한 생활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갓생 살기’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매일 30분씩 걷기, 하루에 영어 단어 10개 외우기 등과 같은 소소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열심히 이루어 가는 삶을 가리킨다. 거창한 목표를 향한 경쟁은 아니지만 자기성장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적극적 계획, 예컨대 다이어트, 영어회화, 음악활동, 춤배우기 같은 것이 갓생의 내용을 채운다. “갓생 가자!”, “겨울방학 때 정말 갓생 살 거예요.” 같은 표현에서 이런 경쾌한 부지런함을 느낄 수 있다. 양극화 현상에 분노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힘들어하던 이전의 N포론이나 현실도피적 소확행론에 비해 건강한 적극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갓생이 젊은 세대의 정서가 새로운 형태로 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일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갓생이란 말을 쓰고 ‘갓생 가자’고 외치는 그 태도 속에 이전의 모습, 익숙한 태도의 잔상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대론에 더이상 갇히고 싶지 않은 건강한 자신감이 갓생이란 말 속에 담겨있지만, N포세대의 불안과 좌절을 어쩔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 체념의 그림자도 없지 않다. 비트코인 광풍처럼 일확천금을 노리는 로또 심리가 스며있다는 평가도 있다. 한마디로 갓생은 적극적인 주체성을 반영하는 말이면서도 체념적 현실수용의 또다른 표현일 수 있다.

어쨋든 N포와 소확행과 다른 새로운 말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N포라는 말에 부수되는 세대적 우울감을 부정하고, 소확행이라는 수입어에 담긴 수동적 자기위안도 벗어나 개성적인 주체성과 적극적 생활태도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부분적이나마 확인되기 때문이다. 어느 대학 교수가 소확행 대신 대불행 (크고 불확실한 행복)을 추구하자고 주장한 적이 있지만 젊은층에게 불확실함을 직면하라는 권유가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개인별로 적절한 새 화두를 찾아가는 저 흐름 속에 담겨있는 절박함, 상상력, 수용과 혁신의 발상을 포괄적으로 파악하고 격려하는 것이 앞으로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갓생이 2024년에는 어떤 의미를 지니며 젊은세대의 공감을 불러올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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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칭과 탕탕평평

하바드 옌칭 한국학회 모임이 12월 13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있었다. 내가 회장을 끝낸 후인데다 정근식 회장과 한승미 교수가 열심히 준비해 주어서 편한 마음으로 참석했다. 이번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되는 영정조대의 시문과 회화전인 ‘탕탕평평’을 관람하고 ‘정조와 궁중회화’에 대한 강연을 듣기로 되어 있었다. 참석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최종고, 임지현, 김준환 교수 등 오랫만에 뵙는 분들이 여럿 계셔서 반가왔다.

발제자인 유재빈 교수는 영정조대 궁중화원제도의 변화 배후엔 시화를 통해 정치변화를 꾀하려 한 국왕의 의지가 있었다고 보았다. 도화서의 개혁, 특히 차비대령화원의 설치가 그런 의도의 산물인데 사적도, 궁중 계병, 화성원행도병 등의 제작과 유포를 통해 왕조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시문과 회화를 통해 국정운영의 변화를 꾀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는 설명이 흥미로왔다. 유교수로부터 저서인 [정조와 궁중회화]를 받았는데 부제로 달린 ‘문예군주 정조, 그림으로 나라를 다스리다’라는 말이 그런 시각을 잘 요약해주는 듯 했다. 문예군주라는 말, 그림으로 다스린다는 말에서 신선하면서도 과연?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느낌도 든다.

‘탕탕평평전’은 그런 시각을 반영한 기획인 듯 했다. 2024년이 영조 즉위 300년이 되는 해여서 영조와 정조가 글과 그림을 어떻게 국정운영에 활용하려 했는지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붕당정치의 폐해가 심했던 이 때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인재를 고루 기용한다는 기조로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탕탕평평이란 말은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이라는 [상서]의 황극조에서 나온 표현으로, 국왕의 위상을 북극성에 비유하여 임금의 중심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탕평이란 말은 인재를 고루 등용하거나 정파를 두루 포용한다는 뜻을 직접 담거나 신료들의 역할을 중시하는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임금의 역할, 국왕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전시실 입구에서 영조가 쓴 글씨를 만났다.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是小人之私意” 라는 글인데 1742년 사도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영조가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군자는 친밀하지만 편파적이지 않고 소인은 파당을 지으면서 친밀하지 않다”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라는 논어의 글을 토대로 군자의 공심과 소인의 사의를 대비시킨 것이다. 단정한 글씨체가 아름다왔고 영조의 각오나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를 느낄 듯 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죽이고 만 영조의 심경 변화와 궁중 내 정치 동학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1762년 영조가 죽은 세자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지었다는 ‘사도세자묘지’나 정조의 사도세자 추존과 어보를 둘러보면서 어지러움마저 느끼는 듯 했다.

영조와 정조는 화원들로 하여금 공신들의 초상을 제작하고 그 옆에 시를 지어 병기하곤 했다. 영조는 박문수의 초상을 제작하게 했고 대동법을 주도한 김육의 그림에 시를 지어 붙이기도 했다. 정조는 강세황의 초상을 그리게 했고 그가 죽은 후 역시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글을 보냈다. 정조가 심환지와 주고 받은 편지인 ‘어찰첩’도 전시되었는데 은밀한 편지 속에 마음속의 불안을 위무받고 싶은 국왕의 심정이 담겨 있다. 글씨는 활달하고 명필이라 할 만한데 내용은 쓸쓸하고 안타깝다. ‘화성원행도’를 비롯한 그림에서 국왕 주도의 국정운영을 시도하려는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18세기 세계사는 얼마나 격동의 시기였는지를 잠시 생각했다. 시와 그림, 화원을 통한 국정개혁이나 탕평정치의 시도는 고상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런 접근이 현실정치의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웠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文治를 강조한 유교국가의 독특함이기도 하고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는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 문명사적 발전일 수는 있겠는데 그것이 ‘文弱’의 폐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무슨 조건이 더해져야 할까 생각하게 된다. 무기의 힘과 돈의 위세가 나날이 커져가는 21세기여서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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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럽의 추락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김구림 작품을 둘러보다가 문득 같은 공간에서 몇 달전 임옥상의 ‘지금 흔들리는 땅’ 전을 관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80년대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작가였지만 그 틀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와 주제로 혁신적인 작품활동을 열정적으로 해 온 분이다. 특히 흙과 쇠를 주요 소재로 활용한 대형 작품들은 캔버스와 전시관을 넘어서 넓은 도시와 현장, 광장과 건물 들에 설치되어 왔고 그 혁신적인 방식과 선명한 주제를 좋아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지난 전시에서도 흙으로 만든 캔버스에 그린 홍매, 백매 등의 매화 연작과 대한민국헌법 전문을 쇠판 위에 큰 산 형상으로 써내린 대작은 관람객의 눈길을 끌기 족했다. 지난 정부에서는 촛불시위 현장을 형상화한 그의 작품이 청와대에 걸리기도 해서 언론의 관심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자신의 주장과 논지를 분명히 하면서도 사람들과의 소통을 중시하고 다양한 계층의 전문가들과 교유관계를 넓히려 노력한 탓에 유명 셀럽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개방적인 태도와 SNS를 통한 적극적인 소통노력이 더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누렸다. 그의 전시가 있는 화랑에서는 언제나 작가와 사진을 함께 찍으려는 수많은 관람객들, 사인을 받으려 줄을 선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국내외의 많은 관객들로부터 환호를 받은 지난 전시회를 옆에서 보면서 ‘셀럽’이란 존재가 저런 것이구나를 실감하기도 했다. 학자나 작가들 가운데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려하고 자기 작업공간에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임 화백은 누구보다도 소통과 만남을 강조하고 또 즐기는 분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달만에 너무도 상황이 달라졌다. 과거 그가 데리고 있던 연구원에게 잘못된 행동을 했고 결국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충격파가 문자 그대로 일파만파다. 작가 개인의 이미지와 평판이 추락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설치되어 있던 곳곳의 작품들이 철거되었고 여러 활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줄을 잇는다. 성추행이라는 사안 자체가 개인적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쉽지 않다. 작가로서 너무 많은 대중적 사랑과 인기를 누려온데다 어느새 정치적 도덕적 영향력까지 지니게 된 그간의 셀렵화가 이런 위험을 배태한 주요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작년 수많은 관람객들의 환호와 존경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모습을 보면서 저 과도한 인기가 가져올 위험은 없을까 일말의 불안감이 잠시 스쳤던 것 같기도 하다.

셀럽의 추락은 낯설거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고 21세기에 더욱 보편화되는 일이기도 하다. 셀럽이 실체가 불확실한 평판에 의존하는 까닭에 인기가 높아질수록 잠재적 위험도 따라 커지게 마련이다. 오늘날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확대 공유되는 정보때문에 인기가 요동치는 속도와 폭도 상당하기 어려울 정도다. [뉴파워]라는 책을 쓴 하이먼즈는 오늘날 새로운 권력이 대두하는 증거로 오랜 기간 권위를 행사해온 인물들이 인터넷의 해시테그 비판과 대중의 인기 철회로 하루 아침에 몰락하는 사례들을 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추행과 관련한 사안의 휘발성이 특히 커서 권위의 추락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한국에서도 하루 아침에 평생 쌓아온 권위와 영향력을 일순간 잃고 개인과 가족 모두의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셀럽의 몰락은 다시 일어서기가 쉽지 않은 충격임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이자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사건일 터이다. 하지만 셀럽으로서의 인기에서 비롯된 거품을 제거하고 단독자로서 다시 치열한 자신을 대면하는 실존적 전환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불행과 불운으로 좌절하면서도 그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갱생과 회생의 역량을 보여준 사례도 적지 않다. 창조적인 작업에 종사하는 예술인의 경우는 고통과 단절, 비난과 자학, 성찰과 재생을 통해 예술혼이 새롭게 강화되는 전환도 가능할터이다. 셀럽의 부상과 몰락을 바라보며 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인기에의 충동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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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과 백투더 퓨처

광화문 주변에서 예정된 회의 시간이 남아 국립현대미술관을 들렀다. 큰 기대 없이 갔는데 마침 김구림 전과 백투더퓨쳐 전시가 있어 좋은 시간을 가졌다. 백투더퓨쳐 전은 1990년대의 몇 작가와 작품을 통해 이 시기의 역동성과 이질성을 탐구한다는 의도로 기획된 전시다. 동명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전시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현재와 미래의 혼재, 긴장, 불일치를 드러내려는 전시여서 최근 ‘문명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로선 더욱 관심을 갖고 둘러보았다.

작품들의 형식과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회화 형태와는 크게 달랐다. 사회적으로도 그러했지만 미술계에서도 디지털 이미지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시도와 긴장이 커진 것이 1990년대였다고 한다. 현대미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작품 하나 하나에 대해 어떤 감동을 얻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불일치의 활성화, 이질성과 비평적 시공간, 미래간섭 혹은 미래개입 등의 설명을 읽으면서 이 격동의 시대를 되돌아볼 수는 있었다. 이질화와 혼성화의 충격, 불일치의 활성화, 미래개입 같은 개념은 마치 문명사를 서술한 책의 챕터와 유사해서 사회학적 문제의식과도 잘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이번 학기 수업에서 간간히 언급했던 엘빈 토플러의 [미래충격]을 떠올리면서 이 전시를 둘러보았다.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기획전과 달리 김구림전은 한 작가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개인전이었다. 김구림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활동해온 전위예술가의 한 명이다. 나도 그 이름은 들어본 바 있으나 실제 그의 작품을 이처럼 본격적으로 관람한 적은 없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하여 통상적인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고 일종의 설치미술적 성격도 있어 낯선 느낌도 적지 않다. 빗자루, 걸레, 의자 등 일상에서 발견되는 소품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배치하고 조명과 컬러를 더한 작품으로 문명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전위적인 분위기도 강하다. 그 독특한 분위기는 분명 강렬하게 다가오는데 내게 익숙한 예술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음-양’ 시리즈라는 제목이 내겐 어떤 힌트처럼 다가왔다. 음-양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어두움과 밝음 등 만물과 역사의 총체적 인식에 불가결한 사유의 틀이다. 오브제와 이미지를 혼합한 작품들을 제작하는 김구림 작가에겐 적절한 연작 컨셉이었을 법하다. 관람자로서도 다양한 메시지 해석이 가능한 제목이어서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내 마음대로 상상해 볼 여지를 주어 좋았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부분은 주로 바이올린 악기 몸통을 활용하여 여성의 몸과 임신, 출산과 생명의 연속성을 드러내고자 한 일련의 작품들이었다. 여성의 몸을 통해 남녀가 사랑하고 인간의 생명이 잉태되고 세대가 이어지면서 인류가 존속해올 수 있었던 것, 이를 통해 음과 양, 육체와 정신, 지배와 헌신 등 복합적인 변증법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다소 선정적일 수도 있어 보이는 방식으로 바이올린의 몸통을 변형하고 다양한 소재들과 결합시킨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이번 학기 다루었던 ‘포스트휴먼’의 쟁점, 기계와 생명, 인간과 자연, 탄생과 소멸 같은 우주론적 의미를 연결해 보기도 했다. 21세기 미래에서는 텍스트와 이미지, 예술과 학문,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가 계속 크로서오버되고 융복합되면서 재구성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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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번역성경

신복룡 교수가 신구약 성경을 번역하고 그간 학연을 이어왔거나 관심을 보인 사람들에게 그 파일을 직접 보내주셨다. 구약과 신약, 천주교 판과 개신교 판의 네 개 파일로 이루어진 오랜 작업의 결과물을 보면서 감탄과 함께 깊은 감동을 느낀다. 성경을 통독하거나 필사하는 신자는 더러 있지만 번역을 한다는 것은 실천은 물론이고 생각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배후에는 라틴어 성경의 번역작업을 수행한 에라스무스와 루터가 있었고 이후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위클리프, 메튜 등의 역할이 컸다. 한국의 경우에도 로스와 이수정, 언더우드, 서경조 등이 성경 번역에 큰 역할을 담당했고 독자적인 성경번역을 수행한 개인이나 집단이 없지 않다. 성경이 정경 (canon) 으로서의 번역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적 권위를 지닌 위원회나 공회가 번역의 주체가 되는 것을 당연시해 왔지만 구체적인 번역작업을 수행한 분들의 헌신과 역량을 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공식출판에까지 이르지 못했고 본인 스스로 번역이 아니라 ‘교감’이라고 표현했지만 성경의 개인번역이 시도된 것 자체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신교수는 신학적 논란에 개입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작업을 원칙으로 내세웠지만 이런 번역을 시도하게 된 내면의 문제의식, 기존 번역에 대한 미흡함이 없을 수 없고 군데 군데 고민의 흔적을 각주의 형태로 담고 있다. 가끔 과감한 독자적인 번역을 시도한 부분도 발견된다. 예컨대 요한복음의 첫 부분에 나오는 Logos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자리인 “성자”(聖子)로 번역한 것을 들 수 있겠다. 영문판 Bible은 이를 “Word”라고 번역했고, 중국어 판본은 “도”(道)라고 번역했으며, 일본어 판본은 言(ことば)로 되어 있는 부분이다. ‘말씀’이라는 번역어는 매우 잘 된 선택일 수도 있고 종종 그렇게 해석되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자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 옳다는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사실 성경의 번역은 늘 세계문명사의 중요한 계기적 사건이었다. 기원전 3세기 히브리어 구약이 희랍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여 70인역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기독교의 유럽전파의 주요한 기초가 되었다. 르네상스는 라틴어 정경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됨으로써 말씀을 누구나 자기 언어로 접할 수 있게 된 종교혁명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일어난 대전환이었다. 성경이 독일어로, 불어로, 영어의 King James 판으로, 다시 미국의 NIV나 현대인을 위한 성경으로 번역되는 과정은 좁게는 번역의 역사이지만 크게는 세계종교의 보편사, 인류문명의 일대 전환을 수반한 사건이었다. 그런 흐름은 동아시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중기인 1790년대에 4복음서의 30% 정도가 번역된 [성경직해]가 간행되었으니 한국에서도 성경번역의 역사는 꽤 오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성경번역 300년] 책에서는 중국 경교의 소개, 고려시대의 동방기독교 , 임진왜란에서의 천주교 수용 등을 ‘성경수용의 여명기’라고 서술하면서 성서번역의 역사를 최소한 300년 이전으로 소급할 것을 주장한다. 한글성경이 오늘과 같은 체제로 나타난 것은 19세기 말인데 번역자에 따라 용어선택이 달라 ‘하나님’과 ‘상제님’과 ‘천주’가 같이 쓰이고 ‘도’와 ‘말씀’이 같은 역어로 혼용되기도 했다. 성서해석학의 진전에 따라 용어의 통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지만 지금도 신구교 사이에, 또 각 교단별로 사용되는 번역어가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보수적인 일부교단에서는 ‘성서무오설’을 번역본에도 적용하려 하지만 상이한 언어로의 번역에서 의미 변형과 왜곡의 문제를 피할 수 없어서 시대에 따라 늘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이 대두될 수 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신복룡 교수가 개인적으로 신구약 성경을 새롭게 교감하고 독자적인 번역작업을 수행한 것은 놀랍고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신복룡 교수는 이미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삼국지]를 다양한 원어와 판본들을 비교하면서 한국어 번역본을 출간한 바 있다. 그 이전에는 구한말 선교사들이 남긴 한국관련 기록들을 정확하게 번역소개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런 작업들은 다양한 동서양 언어에 통달해야 함은 물론이고 상이한 시대의 문화, 언어관습, 문화의 전승과 교류에 대한 폭넓은 인문학적 이해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번의 성경 번역에서도 신구교가 공동 번역한 [성서](서울 : 대한성서공회, 2001)와 한국 천주교의 [성경]. The New English Bible(NEB : Oxford/ Cambridge Version, 1970 )을 저본으로 삼고,The Holy Bible(New International Version : NIV, 2002), The Holy Bible(New Revised Standard Version : NRSV, 1991), [우리말 성경](두란노서원, 2004), 일본어 판본인 [聖書](東京 : 日本聖書協會, 2002), 중국어 판본인 [聖經](臺灣 : 聖經資源中心, 2017 : 和合本)을 참고하여 작업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오랜 시간과 신심이 담겨있을 이 작업이 더욱 새로운 의미와 영성의 진작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며 신교수님의 수고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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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사 문자동행전

서울대 화묵회가 주관하는 2023년 문자동행전이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서울대 문화관에서 열렸다. 매년 연례행사로 이루어지는 서예전인데 올해는 최치원의 시문을 중심으로 기획된 전시회다. 나는 지방에 있어 평일의 수업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는데 예년에 비해 작품들이 더 풍성해지고 글씨도 단단해 진 느낌이다. 수업때문에 19일 하루 지킴이로 전시장을 지켰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冠嶽士 文字同行展’ 이라는 전시회 표제가 새삼 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선비사 (士) 를 사용한 것이 새삼스러웠고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 생각하게 된다. 글씨를 쓰는 사람이 모두 선비일리 없고, 또 현대사회에서 선비란 개념의 적합성을 둘러싼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글씨를 쓰는 순간, 문장을 대하는 마음은 이전 선비의 그것과 같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 아닐까 싶다. 그래야 ‘문자동행’이라는 말도 살아난다. 문자와 더불어, 문자의 뜻과 함께 간다는 이 말도 곰곰 생각하니 예사로운 표현이 아니다.

나는 최치원의 ‘등윤주자화사상방’ 시와 굴원의 ‘어부사’ 두 점을 출품했다. 최치원의 시는 행서로 굴원의 글은 행초서로 써 보았다. 충분히 다듬어지지 못한 글씨이고 스스로 모자란 부분이 많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나름 애쓴 흔적이 담긴 작품이긴 하다. 세상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시인으로서의 정신을 새롭게 하려는 최치원의 마음과 어부의 초탈한 인생관을 통해 삶의 여유를 강조한 굴원의 정신을 느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마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꼭 그만큼 더 멀어지는 대상처럼 이들의 정신세계는 내가 미치지 어려운 곳에 가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문자동행’이라는 말이 ‘이들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가?’라고 묻는 물음인 듯하다.

수하 김길중 교수께서 오셔서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바드 엔칭연구소의 베이커 부소장을 통해 일전에 이야기를 들었고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정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는 처음이었다. 김교수님 글씨는 힘이 있고 필획이 유연하고 깔끔해서 아름다왔고 자작시를 출품하는 역량도 놀라왔다. 작년에 한글 작품을 전시했던 고희종 교수의 글씨도 필세가 좋고 ‘신독’이란 작품에서는 선비같은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장인성 교수의 ‘출몰자유진외경’이라는 작품에서는, 이전에도 그랬지만 자유롭고 도학적인 분위기의 멋스러움을 접한다. 회장인 양일모 교수의 글, 한참 선배인 권숙일 교수의 작품 역시 선비의 분위기와 학자로서의 개성을 느낄 수 있었고 김혜년, 권향숙, 김현미 님 등 오랜 연마로 다듬어진 작품을 보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았다. 운재 이승우 선생의 ‘천산 사야’는 글씨와 그림이 하나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서법을 지키면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인데 저런 경지에 이르려면 그만큼 많은 노력이 더해져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전시장엔 오랫만에 일부러 와주신 분들이 적지 않았다. 사회학과 원로교수인 한상진 교수가 이태리에서 잠시 방문한 연구자와 함께 들러주셨다. 최근 그림에 열심이신 심영희 교수께 전달하겠다 해서 녹음으로 작품 해설을 들려드리기도 했다. 김백영 교수는 화환을 들고 찾아와 축하해 주었고 아시아연구소의 민원정 교수는 커피 선물을 해 주었다. 곧 정년을 앞둔 김명환 교수도 방문해서 즐거운 이야기 나누었고 제자인 윤병훈은 세밀한 감상으로, 손명아는 맛있는 쿠키로 함께 해 주어 여러 관람자들과 나누는 기쁨을 가졌다. 김명환 교수는 도서관장 시절에 내 전시회 영상제작을 지원해주셨고 중앙도서관에 걸어 둔 ‘須讀五車書’ 작품을 내게 부탁하기도 하신 분이다. 여러모로 감사한 마음으로 선비로서 문자동행하는 생활을 계속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좋은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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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과 사상

월봉저작상 운영위원회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이선민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의 서울대 박사학위수여를 축하하는 모임을 10월 25일 조선호텔 중식당에서 가졌다. 심사위원인 이기동 교수, 도진순 교수, 나를 위시하여 한경구 교수, 이철우 교수, 일조각 김시연 사장도 자리를 함께 했다. 학부에서 한국사를 전공한데다 문화부기자로서 역사관련 지식과 정보가 풍부하고 필력이 좋은 것이 연구의 큰 자산이 되었겠지만, 뒤늦게 자료를 찾아 학술논문을 작성하고 학계의 까다롭고 성가신 심사절차를 밟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여 영예의 학위를 수여받은 것에 모두 경의와 축하를 보냈다.

돌아와 논문을 살펴보니 제목이 “대한제국 후기 정치세력과 민족운동 연구”라 되어 있다. 1904년 이후의 수년간을 ‘대한제국 후기’라 이름한 것이 우선 눈에 띤다. 이기동 교수도 잠시 언급했지만 대한제국 자체가 10여년 짧은 시기인데 전기, 후기를 나눌만큼 충분한 근거가 있을지 논란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애국계몽운동기 또는 국권상실기 등으로 불리우던 시기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시대상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해 준 것이 신선한 느낌도 없지 않다. 이박사는 이 시기에 한국의 새로운 정치세력이 성장, 분화되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논문에서 다룬 주제와 쟁점들 중에는 나도 더러 다루어본 내용들이 적지 않다. 종교로서의 동학과 1894년의 농민전쟁, 진보회와 일진회, 안창호와 미주국민회, 천도교의 성격과 지향 등은 이런 저런 계기로 논문도 쓰고 발표도 했던 주제다. 특히 전북대 시절엔 호남지역의 지방사와 농민사를 천착하는 한편으로 한국근대사상사에도 관심을 가졌던 바여서 이 논문이 다루는 쟁점들이 낯설지 않았다. 다만 그 시절의 나는 정치사나 국가사보다 운동사나 지방사에 좀더 주목했던 탓에 이박사의 논문이 주목한 큰 흐름에 대해선 다소 관심이 덜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박사 논문은 대한제국 후기의 ‘신흥 정치세력’의 등장과 이들의 ‘민족운동론’을 검토하는 것이다. 신분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향반,서얼,중인층이 부상할 수 있었고 지역적으로는 평안,함경지방의 중앙진출이 가능해져 새로운 정치세력이 대두될 조건이 마련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배경에서 안창호와 국민회의 재미한인, 손병희 천도교와 동학 세력, 그리고 대종교로 이어지는 개신유학자 집단의 세 정치세력이 유의미하게 형성, 분화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 세력들의 지향을 각기 국민국가론, 부강발전론, 국수보전론으로 개념화해서 대비한다. 격동기의 흐름을 비교적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분석틀이라 할 만하다.

흥미롭고 중요한 연구라 생각되지만 ‘정치세력’ 형성의 실상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좀더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상이한 ‘민족운동론’의 분화는 기존 연구들에서 언급된 내용과 크게 다른 바가 아닌 듯 해서 개인적으로 정치세력의 기반에 대한 설명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도 일본의 도막파 세력과 한국의 개화파 세력을 대비하려 시도한 바 있었는데 ‘사회세력’의 분석이라 할만한 자료확보가 일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뜻을 이루지 못한 경험이 있다. ‘정치세력’이라 이름할 만한 사회세력의 형성을 논하려면 그 정치적 지향이나 사상적 동향보다도 핵심 인물들의 결집도, 광범위한 사회적 네트워크, 동원가능한 물질적 자원, 외부세력과의 연결, 내부의 정세판단 등이 소상히 확인되어야 한다. 세력화의 수준, 조직화의 정도, 물적 동원 역량 등을 평가할 수 있을 종합적인 변수분석이 이루어져야만 사회적 세력분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도 국민회, 천도교, 대종교라는 조직기반과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밝히고 있고 안창호, 손병희, 신채호 등 주도적 인물의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기에 그런 문제의식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세력화의 수준이나 정도, 역량의 입체적 분석에 이르기에는 미시적 자료나 인물간 네트워크의 강도, 자원동원의 수준과 실제 상황에 대해 객관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어쩌면 정치세력과 ‘민족운동론’을 연결시키려는 틀 자체가 정치세력화의 분석보다 민족운동론의 유형화로 이어지도록 만들었을지 모르겠다. 사상적 지향과 관련해서도 ‘민족운동’이라는 틀을 넘어서는 스펙트럼을 구상할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랜 중화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제질서로 이행하는 격동기에는 국가와 민족의 뱔견 못지 않게 세계와 개인의 발견도 결정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안창호와 신채호의 차이를 국민국가론과 국수보전론으로 대비하는 틀을 넘어서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의 긴장이 이 즈음 시작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사상적 분화의 계기에 대해서도 좀더 천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향후 이박사의 활발한 연구활동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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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나눔과의 인연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를 연구하던 동학들과 이만열 교수님과의 식사모임이 오랫만에 마련되었는데 수업때문에 참가할 수 없게 되어 이 기회에 그 분과의 인연과 그 영향을 생각해본다. 이 교수님으로부터 수업을 듣거나 직접 지도를 받은 적은 없으나 그 분으로 인해 맺어진 인연과 활동들이 나의 학술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사회학을 전공한 내가 민족, 통일, 평화 같은 쟁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냐고 누군가 물어보았을 때 나는 어릴적부터 듣고 자란 성경의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고 내가 한국근대사회사를 전공하게 된 한 배경이었지만 현실의 남북관계에 대한 구체적 관심으로 이어져 내 연구주제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된 데는 1994년 경부터 참여한 연구모임이 중요했고 그 중심에 이만열 교수님이 계셨다.

숙대 앞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회의실에서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발제와 토론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모임이었지만 진지함과 헌신성은 어떤 곳보다 강력했고 이교수님은 기도에서 참석자들을 ‘믿음의 동지’라고 종종 불렀다. 신앙의 열정에서 다른 연구자들에게 한참 못미치던 나는 늘 한 발만 걸치는 소극적 태도로 임했지만 그 문제의식과 분위기로부터 받은 영향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1997년 베트남 남북을 둘러보면서 통일의 현장을 답사했는데 버스 속에서 백종국 교수가 열정적으로 인도차이나 전쟁사를 이야기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호치민에서 만났던 남부출신의 학자가 베트남 통일은 실제로는 일방적인 ‘북화'(northernization)였다고 말해 놀랐던 것도 새삼 떠오른다.

2001년 2월에는 홍콩, 마카오, 대만을 답사하면서 ‘일국양제’의 현실을 함께 살펴보았다. 홍콩반환이 이루어지고 21세기로 접어든 직후여서 일국양제 구상이 갖는 미래적 전망에 관심이 적지 않았다. 이질적 체제를 융통성있게 수용하려는 중국의 유연성이 참신하게 여겨지기도 했지만 ‘하나의 중국’을 절대적 원칙으로 고수하는 베이징의 태도에 대한 홍콩의 우려와 대만의 거부감이 매우 큰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일국’과 ‘양제’의 의미와 양자 관계에 대한 해석은 현실정치에서의 역학관계를 떠나서 이론적으로만 접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 소중한 답사경험이었다. 그런 복잡함을 접하면서 당시 동행한 윤영관 교수께 국제관계가 왜 미묘하고 또 중요한지 실감이 난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2006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설립을 책임지고 초대소장을 맡게 되면서 이 분야 연구와 활동에 더 집중하게 되었는데 앞선 경험들이 적지 않은 자산이 되었다. 양안관계를 다루는 연구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양안협력의 현장들을 답사, 양측의 견해들을 경청하려 한 것도 이 답사에서 얻은 문제의식이 계기가 되었다. 한반도의 참조사례로 독일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양안관계를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음과 함께 교류협력의 기능적 파급력을 과신할 수 없다는 점도 주목할 것을 강조했다. 중국과 대만 사이의 교류협력이 급격히 진전되었지만 대만의 대중국 경계심과 독자정체성 요구는 더욱 강해지는 역설적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그것이 한반도에 주는 함의가 무엇인지 고민할 거리는 많아 보였다. [양안에서 보는 통일과 평화] 를 편집 출간하는 과정에서 15년 전 답사를 떠올리기도 했고 실제로 당시 보고서를 참고하기도 했다.

대북인도적지원사업을 오랫동안 주도하신 홍정길 목사님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의 유아원, 병원, 빵공장, 묘목장 등을 모니터링했던 것도 이 모임이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회로 활동한 덕분이었다.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향하는 직항비행기를 타고 평양일대와 묘향산 주변을 둘러보면서 같은 언어, 역사에 기반한 민족감정의 실체를 경험하기도 했고 그런 종족적 동질성, 전통적 역사공유가 통합과 호혜의 밑바탕을 이룰 충분조건이 될 수 있을까 자문하가도 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서 국민의 통일인식, 대북인식, 민족정서 등을 매년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기획한 것도, 북한주민의 의식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하려 애쓴 이유도 이 때의 경험과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2023년 한반도는 너무 달라졌다. 남북간 어떤 대화도 교류도 없고 불신과 경계의 언사들만 오가고 있다. 핵무력과 군사주의 노선에 더욱 집착하는 북한은 한국과의 관계에 기대가 없으며 오히려 적대적 대상이라고 공언한다. 김정은-푸틴 북러정상회담을 통해 위성기술과 무기체계의 협력을 약속하는 새로운 환경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한반도 남쪽에서는 한미동맹의 강화에 더해 한미일 3국의 군사협력이 강화되고 대북경계와 압박만이 강조되고 있다. 한중관계나 한러관계도 어려워질 것임은 분명해 그 후과가 어느정도일지 예측하기 어렵다. 국민들의 정서는 북한에 대해서도 중국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으로 변했고 젊은 세대들은 더이상 북한과의 통일에 기대를 걸지 않는 형편이다. 신냉전이 도래했다는 견해가 확산되고 교류협력을 통한 평화보다는 힘을 통한 평화를 추구하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이런 변화가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원한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당분간 이런 방향으로의 흐름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거대한 변화가 우리 내부만이 아니라 북쪽과 주변, 대륙과 해양 등 외부로부터 총체적으로 추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환의 시대에 아무런 성찰과 변화 없이 이전 논리를 고수하는 것은 지혜롭지도 못하고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원칙과 비전 없이 시류에 편승하여 과거의 경험과 노력을 전부 폐기하려는 태도도 문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관성과 신실함은 무엇이며 바꾸고 혁신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새로운 고민의 시작점에 서 있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