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아버지 기일을 하루 앞두고 고향 선산을 찾았다. 마산, 진주 등지에 흩어져 사는 누이들도 함께 모여 산소를 둘러보았는데 입구 돌계단도 부분적으로 무너져 내렸고 봉분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조부모 산소로 이어지는 길은 찾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네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오가는 사람 대부분이 고령자들이고 젊은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누이와 자형들도 대부분 70을 넘기셨고 나 또한 70 줄에 들어서기 직전이니 고령화가 내 실존이 되어 있는 셈이다.
점심을 함께 한 후 부친이 교장으로 재직하셨던 안의초등학교 앞의 한 까페에서 옛 추억을 이야기하고 정담을 나누었다. 누이들과 자형들도 대부분 교직에 계셨던 탓에 이곳이 낯설지 않다. 그러던 중 앞으로 산소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화제가 되었다. 지금처럼 아는 분에게 벌초를 부탁할 수 있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데 모두가 공감했다. 자식들이 이곳까지 찾아와 성묘를 할 것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성묘라는 관행이자 도리가 언제까지 존속하게 될지도 자신하기 어려울만큼 시대상황도 달라지고 있다.
누이 한분은 부모 묘소를 가까운 곳으로 이장하면서 평토장을 하고 작은 비석만 세워두자고 했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채 잡초로 뒤덮인 산소를 그냥 두는 것은 민망하고 도리도 아니라는 이유다. 또 다른 누이는 굳이 평토장도 할 필요없이 우리 세대에까지만 성묘문화를 지키면 될 것이라 했다. 그 이후 누구도 찾지 않은 묘가 되어 잡초가 우거지는 것도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두 분의 주장은 다른 듯 하고 실제 격론도 이어졌지만 기실 공감하는 부분이 더 컸다. 이제 성묘와 관련한 의례를 우리 세대에 간소화하고 다음 세대에까지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육체와 영혼을 구별하는 기독교 신앙이 깔려 있다.
장남으로서 내 의견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나도 언젠가는 이 문제에 대한 결단이 필요할 때가 오리라는 생각을 한다. 나 스스로도 이런 성묘문화에 철저하지 못한데 내 자녀들이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리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성묘나 제사가 90년대 이후 새롭게 부각된 데는 계층의 분화에 따라 새로운 가문의식, 뿌리 의식이 커진 영향이 없지 않다. 더하여 영화나 미디어에서 그것을 한국의 전통풍습으로 재구성한 이유가 크다. 다종족화가 진행되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더더욱 이 문화가 강조될 수도 있겠다.
솔직히 나는 조상이나 가문, 뿌리에 대한 의식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이유가 컸을 듯 한데 실제로 나는 제사나 문중행사가 낯설다. 어릴 적부터 고향을 떠나 혼자 유학하며 생활한 나의 성장과정이 개인주의적 성향을 강화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내 아들 대에 이르면 훨씬 이런 문화는 약화될 것이 분명하고 나는 그것에 별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는다. 다만, 부모님이 보여주셨던 독특한 삶의 자세와 정신적 지향, 조부로부터 이어진 문인적 지향과 선비로서의 자긍심은 잊지 않고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인데 그 분리가 가능할까? 그것은 어떤 가문의식과 의례를 필요로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