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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원정의 유산

의친왕 이강이 조부께 써 준 글씨 현판 몇 점을 집으로 가져왔다. 이 현판들은 고향에 조부께서 건립한 정자에 걸려있던 것인데 십수년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정자가 무너져 현판들만 따로 떼어 고향 친지 집에 맡겨두었었다. 정자를 복원하거나 외부 공간이 있는 주택에 살게 되면 다시 걸어두리라 생각을 했지만 세월만 흘렀다. 그동안 현판이 두어점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누군가가 현판의 행방을 수소문한다는 소문도 들리는데다 현판을 맡아두었던 먼 친척도 세상을 떠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정자를 건립한 조부 화사 박영화는 특히 충효의 가치를 이 공간에 담고자 했다. 증조부인 애산 박준구를 기려 당호를 ‘애산당’으로 하고 인근 각처의 문사들이 보낸 시와 글들을 각자한 현판을 걸었다. 그런가 하면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글씨를 통해 국가와 왕조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담았다. 의친왕이 쓴 ‘先韓日月 李朝雨露’라는 글귀는 선한와 이조가 일월과 우로가 되라는 뜻을 담았다. 의친왕이 쓴 글씨 옆에는 ‘대한국 의친왕 전하 어하사친필’이라고 조부께서 각자해 두었는데 ‘大韓國 義親王 殿下’라는 표현이 어색하면서도 흥미롭게 와 닿는다.

함양, 특히 안의는 정자의 고장으로 불릴 정도인데 특히 화림동 계곡에는 농월정, 심원정, 동호정, 거연정 등 멋진 정자들이 줄을 이어 서 있다. 이들 정자는 모두 사면이 트여 주변을 내다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그런데 귀원정은 사면이 트인 정자를 한켠으로 하고 다른 한켠에는 방이 달려 있었다. 이 두 기능을 함께 담고 싶었던 모양으로 사면이 트인 공간에는 ‘귀원정’이란 현판을 달고 방이 달린 공간은 ‘애산당’이란 현판을 달았다. 정면 윗편에는 큰 글씨의 현판과 작은 글자의 현판들이 여러 점 걸려 있었고 기둥에는 대련으로 쓰여진 작품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정자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작은 실개천을 넘어 돌계단을 올라가 아름드리 벗꽃 나무를 마주하는 작은 마당에 격식을 갖춰 세워졌다. 옆으론 큰 바위가 있고 앞뒤에 작은 대숲이 우거져 우아했고 아름다왔다.

비닐 하우스에 보관되어 있는 현판들은 30여점이 넘었다. 오랜 시일 제대로 돌보지도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음에도 까만 옻칠에 흰 색으로 부각된 글씨들의 모습은 반듯하고 아름다왔다. 아마도 당대 제일의 서각 장인의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획이 분명함은 말할 것도 없고 깊이와 강약도 너무 명료하여 마치 최근의 작품을 보는 듯 했다. ‘이조 우로’라는 작품과 ‘경운독월은사정취’ 라는 의친황의 작품은 명필이고 아름다운데 모두 대련의 한쪽이 사라졌다. 누군가 몰래 가져가려다 한 쪽만 떼어내는데 성공한 탓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집안의 소중한 유산이자 지역의 문화재라 할수도 있을 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미안함이 솟구친다. 누이가 두어점 현판을 가져가기로 하고 나도 몇 점을 챙겨 오기로 했다.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이 보편화된 21세기에 이런 가문의 유산에 주목할 사람은 많지 않다. 가족들 조차 관심의 크기는 다르고 아이들 세대에서는 특별한 감정을 느낄 가능성이 별로 없을 것이다. 안의의 화림동 계곡은 선비의 문화를 체현하여 지역의 자긍심을 높이고 싶어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물좋고 산좋은 경승지의 표지일 뿐이다. 아파트의 공간이 일상이 되고 효율적인 도시살이가 보편이 된 시절에 선비의 정체성을 운운하는 것도 낯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와 글, 문인들의 교류를 중시한 조부의 자취를 접하노라니 마음 한켠에 뿌듯한 감정이 솟구친다. 시대에 맞지 않을지 모르나 이런 것을 집안에 내려오눈 향기라 해도 좋으리라. 제대로 관리도 하지 못한 처지에 자랑스레 내놓을 일은 아니겠으나 집안의 소중한 향취를 맛보고 귀히 여기는 마음은 그대로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