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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3) – 영화로의 초대

소록도 답사기를 공유했더니 도진순, 한경구 두 분이 각각 한센병과 관련된 일본 영화를 소개했다. 도 교수가 추천한 ’앙, 단팥인생 이야기‘는 일본식 단팥빵인 ‘도라야키’를 만들어 파는 중년남자 센타로를 주인공으로 한 단정한 스토리다. 어느 날 기형 손가락을 가진 도쿠에 할머니가 나타나 자신을 아르바이트생으로 써달라고 말한다. 처음엔 거절했다가 마지못해 받아들였는데 할마니가 정성스레 씻고 달여서 만든 앙의 맛이 소문이 나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정작 단것을 싫어하던 센타로도 비로소 도라야키의 참맛을 알게 되고 일상이 상당한 활력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도쿠에 할머니가 한센병 환자임이 알려지면서 가게는 손님이 뚝 끊긴다. 그 사실은 안 도쿠에는 가게를 그만두고 격리시설로 돌아갔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대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벚꽃이 참 아름답지 않나”라는 말을 하며 주변 사람들이 한 번 더 하늘을 올려다보도록 만들고, “팥에는 진심을 담아야 해”라며 열성을 다해 팥을 젓는다. 벗을 삼으라고 가져다 준 새장의 새를 숲속으로 날려보냄으로써 자유에의 갈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의 시나리오와 연출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맡았고 이 영화는 제68회 칸 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초청작·개막작이었다. 나가세 마사토시가 센타로를, 영화 <도쿄 타워> 등에 출연했던 배우 기키 기린이 도쿠에 역을 맡았다. 일본다운 잔잔한 영화로 한센병 환자의 차별과 격기에 대한 문제제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경구 교수는 ‘모래그릇’이란 일본 영화를 강추했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작가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모태로 한 것인데 노무라 요시타로 감독이 1974년에 발표한 영화다. 이 ‘모래그릇’은 이 작품 외에도 2004년, 2011년 TV 드라마로 거듭 제작될 정도로 인기를 끈 작품이었다 한다.

도쿄 열차역에서 한 노인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어 수사가 진행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신원조차 밝혀지지 않았던 그 희생자는 한 시골 마을에서 순경으로 재직하며 많은 덕망을 얻었던 선량하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아내와 사별하고 퇴직을 한 뒤 고향에 와서 잡화점을 운영하다가 어느 날 그렇게 시체로 발견된 것인데 대체 그는 누구고 왜 죽었으며 누가 살해한 것인가를 추적하는 형사의 집념을 그린 내용이다.

작은 단서를 바탕으로 수사를 집요하게 전개해가는 중견형사 이마니시(탄바 테츠로)와 젊은 형사 요시무라(모리타 켄사쿠)가 스토리를 구성하는 주역이다. 이 두 형사는 ‘카메다’ 라는 단어의 추적에서 시작하여 흥미로운 발상의 고리를 통해 좀더 분명한 단서를 찾게 된다. 마침내 정치계의 거물의 딸과 연애하는 젊고 유망한 음악가 와가 에이료(가토 고)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된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고아라고 알려진 에이료는 스스로 자수성가한 음악가로 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고, 전직 장관의 딸 사치코 라는 아름다운 연인과 연인 관계이지만 뭔가 외골수적 모습으로 음악에 몰두하는 인간이다.

많은 대사와 복잡한 수사극으로 전개되던 작품이 어느 순간 대사도 거의 없이 거지처럼 유랑하는 소년과 병든 아버지의 가슴 아픈 여정으로 돌변함으로써 영화는 전혀다른 결말로 이어진다. 나병에 걸려서 정처없는 떠도는 아버지와 함께 거지 부자 생활을 하던 어린 소년, 이 소년을 양자로 받은 이가 곧 죽은 형사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자신을 철저히 숨겨서 비로소 사회적으로 성공 직전에 다달은 에이료가 자신의 신원을 눈치 챈 은인을 죽이게 될 정도로 한센병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배제가 심했던 사회의 비극적인 결말이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수사 드마라 장르지만 잔혹하고 비정한 내용이라기 보다는 가슴 아픈 인간적 내용을 담은 전개. 사건의 진실을 발표하는 이마니시 형사가 감정에 북받쳐하는 장면도 인상적이고, 한센병 이라고 불리우는 나병환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을 지적하는 엔딩 부분도 인상적이다. 현재 이 한센병은 적절한 치료가 되면 전염되지 않고 치료와 완치가 가능한 병으로 분류되지만 예전에는 문둥이라고 불치병처럼 인식되었다. ‘벤허’ ‘빠삐용’처럼 이 영화도 모든 비극의 시작이 나병이 원인이 된 것이고 복잡한 인간사, 가족사를 거치면서 30여년전의 비극이 결국 예기치 못한 살인사건으로 옮겨간 종말이었다.

두 작품 모두 한센인과 한센병을 직접 조명하거나 거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을 매개로 작동하는 일본 사회내의 강한 편견, 거부감, 그로 인한 아픔과 비극을 그리고 있다. 아름다운 인간애, 한센인도 꼭같은 인간이라는 자각, 잘못된 사회적 관습과 규범에 대한 비판이 잔잔하게 깔려져 있는 수작들이다. 소리높여 외치는 개혁이나 정의의 주장이 아닌, 평범한 일상 속에서 확인하는 고귀함과 어리석음이 새삼스럽다. 일본에 비해 우리는 너무 요란한 구호들이 난무하면서 저런 조용한 내면적 성찰은 오히려 부족한 면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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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면역

놀라운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놀란 때가 얼마되지 않았는데 오늘은 이스라엘-이란 전쟁 뉴스에 놀란다. 코로나 펜데믹에 놀라고 로스앤젤레스 대형 산불에 놀라다가 지구촌 곳곳에서 빈발하는 지진과 홍수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Chat GPT 라는 낯선 존재를 만난지 불과 2년인데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든 인공지능의 끝모를 파워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다.

놀라움은 내 자신에게서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옛날 같지 않은 몸상태에 놀라고 깜박거리는 내 기억력 감퇴에 화들찍 긴장한다. 갑작스런 친구의 부음 소식에 놀라고 내 나이가 70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전혀 몰랐던 지식들, 천문학과 물리학의 세계를 조금씩 접하면서 내 지식과 사유가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알고 놀라고 새로운 영역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현상들에 두 눈이 번쩍 뜨이곤 한다.

‘놀라움’에는 두가지 다른 감정이 포함된다. 경이로움을 느끼며 내 마음을 여는 wonder 와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려드는 fear가 그것이다. 노란 국화꽃 앞에서 우주의 신비를 느낀 시인의 놀라움이 wonder 라면 군사분계선 철책 앞 젊은 초병에게 들리는 이상한 소리는 전형적인 fear 로서의 놀라움이다. 희로애락을 넘나드는 우리는 너나 없이 이런 두 종류의 놀라움을 겪으며 산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 – 나쁜 게 아니다. 뇌과학적으로 모든 놀라움은 낯선 외부자극으로 뇌가 고도의 각성상태로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 이 자극이 위협적인가 안전한가에 따라 상반된 두 반응이 분기된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몸은 편안, 뇌는 보상모드’라는 하이브리드 상태가 되어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가 강화된다. 반면에 자극이 위협이라고 판단되면 교감 신경이 활성화되고 회피 회로가 강화되며 스트레스를 높여 부정적인 정서를 불러온다.

wonder 와 fear를 나누는 요인이 외부자극에 대한 내면적 평가라는 사실은 내가 내 정서의 주체가 된다는 뜻이어서 반갑다. 하지만 주관적 해석이 미치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안, 위기, 불쾌, 혼란의 반응을 야기시키는 자극들이 적지 않다. 경기불황, 대중혐오, 전쟁위험, 기후위기 등은 내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자극들이 아니다. 각자도생, 무한경쟁의 시대상황도 마찬가지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고 그런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정서에도 면역력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을 키우고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할 수 없다면 견디고 이겨낼 맺집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 내 마음으로 통제가능한 자극에 대해서는 가급적 긍정적 활력이 되도록 wonder 의 감정에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일상의 주변에 널려있는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고 그 신선한 파장에 놀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내가 좌우하기 어려운 외부의 충격과 놀라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다. 일단은 거리감을 갖고 그 맥락을 이해하려는 공부하는 자세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다는 것이 염려를 해소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희로애락의 감정에 내 몸과 마음이 휩쓸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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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움을 위하여 1]

놀라운 세상이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보내세요 함께 못가서 정말 미안해요’ – 한 때 선망의 도시였던 로스앤젤레스가 작년엔 대형산불로 올해는 격렬한 시위충돌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고조되고 있는 핵전쟁의 위혐에 놀라고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유럽의 예측불허 긴장이 초래할 충격에 놀란다. 코로나 펜데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동남아에서 전해지는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 소식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놀라움은 지구적 대형 사건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내 일상에서도 나를 놀라게 하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갑자기 키오스크 주문으로 바뀌고 사람대신 로봇이 등장한 동네 식당에서 놀라고 인공지능 탓에 일취월장하는 학생들 보고서에 놀라다가 그런 AI 비서를 손바닥에 두고 사는데 점점 길들여져가는 자신에게 놀란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 – 나쁜 게 아니다. 놀랄 수 있기에 위험을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다. 또 놀람 자체가 무미건조함을 해소하는 활력이 되기도 한다. ‘놀라는 것’이 활발한 삶을 가능케 한다는 뇌과학자의 강연을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일까 한 시인은 ‘절대로 달관하지 말고 아이처럼 울고 웃으라’고 했다. 달관한다는 것은 곧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우리말 ‘놀라움’에는 두가지 전혀 다른 감정이 포함된다. 경이로움을 느끼며 놀라워하는 wonder 와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려드는 fear가 그것이다. 노란 국화꽃 앞에서 우주의 신비를 느낀 시인이 표한 놀라움이 wonder 라면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는 위험지대 젊은 초병이 겪는 놀라움은 전형적인 fear 다. 희로애락을 넘나드는 우리는 너나 없이 이런 두 종류의 놀라움을 겪으며 산다. 가급적이면 wonder 의 감탄과 함께 살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이 꼭 그럴 수는 없다. 특히 2025년 오늘은 fear 의 놀라움을 증폭시키는 시대다.

뇌과학적으로 놀라움은 낯선 외부자극으로 뇌가 고도의 각성상태로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 곧이어 이 자극이 위협적인가 안전한가에 따라 상반된 두 반응이 분기된다. 안전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wonder 의 느낌이 뒤따르고 ‘몸은 편안, 뇌는 보상모드’라는 하이브리드 상태가 되어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가 강화된다. 반면에 자극이 위협이라고 판단되면 교감 신경이 활성화되고 회피 회로가 강화되며 스트레스를 높여 fear, 즉 두려움의 정서를 가져온다.

외부자극에 대한 내적 의미부여에 따라 wonder 와 fear가 분기된다는 설명은 흥미롭다. 외부자극 그 자체보다도 이것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주관적 해석체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살면서 체득한 누적된 경험과 장기기억, 내면화된 world model 이 판단의 중요한 참조기준을 제공한다. 인간이 신처럼 외부환경을 초월할 수는 없지만 격동의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여지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fear 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경기불황, 혐오와 불신, 전쟁위험, 기후위기 등 모두가 부정적인 놀람의 요소들이다. 외부자극에 눈을 감고 무관심해짐으로써 감정의 동요를 회피하려 하지만 그것이 해법일 수는 없다. 그런 소극적 태도로는 평정심을 강화하기보다 정서적 회복력의 감퇴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라 – 이것은 놀라움의 감정에도 적용가능한 지혜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놀라움의 정서에 좀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나아가 외부자극에 의미부여하는 독해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의 경이로움을 찾아 내 정서의 면역력을 키우는 일을 시작하려 한다. 초등학교 시절 나를 들뜨게 했던 보물찾기 시간처럼, 지나치기 쉬운 놀람과 감동의 소재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찾아내려 한다. 일상 속에서 경이로움을 확인하는 것은 곧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상의 주변에 널려있는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고 그 신선한 파장에 놀랄 마음의 준비를 하려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단단해진 내 놀람의 힘으로 격동의 시대가 빚어내는 염려와 불확실성에 당당히 맞서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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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되기, 제자되기

스승의 날이 하루 지난 16일, 서울에서 두 모임이 있었다. 점심은 제자들이 나를 위해 마련해준 자리였고 저녁은 내 세대 동학들이 대학 시절 은사님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사회 곳곳에서 중견으로 활동하는 제자들에게 ‘스승’이란 이름으로 축하를 받은 일도 감사하거니와 다들 현역에서 은퇴한 백발의 동학들이 90을 바라보는 선생님을 모시고 담소를 나눈 것도 아무나 누릴 복이 아니다.

점심에 모인 7명의 제자들과 반가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아무래도 최근 젊은 세대의 경험과 관심사들이 주를 이루었다. 정치 문제로부터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학계로부터 문화계에 걸쳐 다양한 화제가 오고 갔다.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 북한의 현실과 남북관계의 미래에 대해, 대학현장과 박물관에서의 컨텐츠 생산과 유통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엔 나를 위시해 한두해 밑의 후배들 포함해서 역시 7명이 모였다. 지도교수이셨던 신용하 교수님은 최근 좌골신경통으로 보행에 다소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지팡이를 짚고 참석하셨다. 이 자리에 오기 어려워질까 학술원 행사에도 양해를 구하고 불참하셨다 했다. 그 불편함을 제외하면 여전히 탁월한 기억력, 학문적 열정, 정확하고 분명한 자기관리가 여전하셨다. 최근의 저서를 가져오셔서 각자에게 직접 서명을 해고 전달해주셔서 제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신 것도 예와 다름이 없다.

밤늦게 기차로 집에 오면서 내가 누린 이 양면의 행복을 곰곰 되돌아보았다. 좋은 스승을 만난 복, 고마운 제자들을 만난 복 – 그 어느 쪽이 더 크다 할 것 없이 내 평생을 이끈 두 축이다. 감사한 마음 한켠에서는 스승의 기대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한 불민함에 대한 송구함이, 또 다른 한편에는 제자들의 잠재력을 키워주면서도 단단한 지적 훈련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심정이 솟구친다. 나는 제자로서도 분에 넘치는 스승의 복을 누렸고 선생으로서도 과분한 제자들의 사랑을 입었다.

점심 시간에 제자들이 사온 케잌을 자르면서 함께 ‘스승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다들 노래를 부르며 계면쩍어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는 어버이시다….’ 그 가사는 지극한 정성을 담았지만 지금 시대, 고등교육 현장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서둘러 저 노래는 ‘초등학교 선생님’께 어울린다고 둘러대었지만 과연 대학에서의 스승과 제자 간에는 어떤 존경의 마음이 핵심을 이루는 것일까 생각했다. 지식을 주고 받은 관계를 넘어 삶과 시대를 읽는 눈과 결을 공유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저녁에 신용하 교수님은 당신의 오랜 학술활동을 정리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학’, 그리고 ‘꿈을 설파하는 스토리’ 에 전념했노라 하셨다. 식민사학의 극복, 동북공정과의 싸움, 한국적 사회학의 정립을 위한 노력, 문명적 뿌리에 대한 탐구가 그것이라 했다. 지금은 그 마무리 작업의 하나로 ‘문명의 사회학’을 집필하고 있다 하셨고, 갑자기 허리와 다리의 통증으로 연구와 집필이 중단된 것을 매우 안타까와 하셨다. 덧붙여 당신의 책이나 연구, 예컨대 ‘21세기 한국의 발전전략’이나 ‘고조선 문명론’이 학계로부터는 냉대를 받았지만 수많은 기업인과 젊은이, 시민들로부터 관심과 반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은 꿈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마무리를 했다.

꿈을 심어주는 지적 작업 —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 내가 ‘꿈의 사회학’을 강의하면서 마음 속에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공부할 때는 ‘꿈’을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늘 부차적으로 대했던 것 같다. 나는 실증과 분석, 자료와 논리를 가장 중시했고 그런 점에서 과학주의, 합리주의, 주지주의의 성실한 추종자였다. 꿈과 지향, 의지의 영역에서 벗어나려 했고 중립적인 태도를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내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가졌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신교수님께서 당신의 꿈을 이어받를 제자를 한 사람도 키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꽃힌다. 공식적으로는 내가 서울대 사회학과의 사회사 후임자로, 한국사회사학회의 다음 세대 대표격으로 활동한 것은 분명하고 나름 그 역할은 최소한이지만 감당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역사사회학, 한국사회사, 민족사회학 등의 영역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공부 이외의 일에 곁눈질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도연구, 고조선 문명연구에 합류하라던 제안을 끝내 수용하지 않았던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송구스러운 부분이다. 내 성향상 지금이라해도 선뜻 그 분야 연구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선생님의 저 꿈, 실증적 학문 너머에 자리한 일생의 열정과 기원에 대한 이해는 좀더 깊고 충실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열흘 전 한완상 교수께서 전화를 하셔서 장시간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는 중에 ‘내가 사회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크리스챠니티가 중요한 요인의 하나인데 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후학이 없다’고 안타까와 했다. 당신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간행하는 일을 내가 맡아주기를 바란다는 말씀도 여러차례 하셨다. 내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여러모로 서운해 하신다는 주위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에 한 교수님의 영향이 컸는데 그 분의 기대와 꿈도 내가 이어받질 못한 셈이다.

스승이 되는 것도 일생의 과업이라면 제자가 되는 것도 평생에 걸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정년으로 마무리될 수도 없고 스스로의 인격과 품성을 다듬어 가는 것, ‘신독’의 자기관리가 흐터러지지 않게 노력할 일이다. 그것만이 내가 받은 제자로서, 스승으로서의 큰 복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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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

헌재의 판결을 보고 난 후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올린 글귀가 ‘사필귀정’이었다. 모든 일은 결국 바르게 해결된다는 사자성어로 정의는 마침내 승리한다는 뜻으로도 종종 해석된다. 옳은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겐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경구임은 분명하다. 일의 결국이 좋을 것을 믿는 믿음은 난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물론 현실이 늘 이 말을 증명해주진 않는다. 옳은 행위를 추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성공하거나 그 뜻을 이룬다는 보장이 없다. 때로는 편법을 일삼는 사람이 위세를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엇이 ‘바른 결과’ 인가를 둘러싸고 사람들의 이견도 해소되기 어렵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그 마지막 결과를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정답도 있기 어렵다.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아닌 한 한 세대를 지나서야 ‘귀정’의 결말이 나타나는 과정을 견뎌내기는 힘들다.

이번 탄핵인용을 두고서 ‘사필귀정’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생각도 각양 각색일 수밖에 없다. 야당의 입장에서는 탄핵인용으로 당대표의 사법리스크를 벗고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에서 이미 ‘귀정’의 큰 걸음이 내디뎌진 것이라 볼 것이다. 탄핵인용을 환영하지만 민주당에 호감을 갖지 않는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헌정질서가 회복되고 극단적 분열을 방지할 여건이 마련된 것을 ‘귀정’이라 여길 것이다. 반면 대통령의 복귀와 이재명의 유죄판결을 ‘바라고 있던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들만의 ‘귀정’에 대한 집착과 반감을 견지할지 모른다.

앞으로 벌어질 대선정국과 그 이후의 사태진전을 겪으면서 이 말은 끊임없이 재해석될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완료태로 해석되어선 안된다. ‘귀정’을 독점하는 세력의 정당화 논리로 변질되는 것은 더더욱 피해야 한다. 이 말은 향후에 이루어질 상태를 소망하는 미래형 명제이고 모두가 함께 이루어야 할 책임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헌재의 결정이 ‘사필귀정’의 중요한 국면임은 분명하지만 이후의 사태진전이 모두가 바라는 ‘귀정’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다. 역사와 타자 앞에 더욱 겸손해져야 할 이유다. 그런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네 글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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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커트 교수 부음

카터 에커트 교수님 부음을 뒤늦게 접했다. 그의 온화한 웃음과 다정한 모습이 떠오른다. 4년 전 하바드대 패컬티 하우스에서 함께 점심을 하며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건강이 그동안 많이 나빠지셨다는 후문이다. 이제 뵐 수 없게 되었다니 안타깝고 황망하다.

에커트 교수님과의 인연은 1989년 내가 엔칭펠로우로 간 후부터 맺어졌다. 그때 에커트 교수님은 UW에서 학위를 받고 막 하바드에 합류한 젊은 교수였다. 아직 테뉴어를 받지 않았지만 한국 근현대사를 책임진 자리인데다 제자와 후배를 잘 챙기고 폭넓은 식견의 소유자여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당시 하바드의 한국학 연구는 족보연구의 대가인 와그너 교수가 대표하고 있었기에 근현대사보다는 조선시대사가 더 중심을 이루었던 것 같다. 엔칭연구소 부소장인 베이커 씨도 한국관련 연구자들에겐 큰 힘이 되어 주셨다.

나는 체류기간이 좀더 연장되어 가족들이 먼지 귀국하고 혼자 6개월을 더 머무르게 되었다. 새로운 집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에커트 교수께서 여름기간 해외에 가 계실 예정이라며 자신의 집을 쓰도록 해 주셨다. 덕분에 무더운 여름 두 달을 켐브리지의 멋진 아파트에서 기거하는 행운을 누렸다. 집을 깔끔하게 관리하시던 분이셨기에 여간 큰 호의가 아닐 수 없었다.

90년대에는 한국학과 관련한 국내외의 시각차가 현저해지던 때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청소년기를 지나는 때와 비슷하다할까. 주관적인 고집도 형성되지만 아직 어른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과도기… 당시 나는 청소년 같은 기개로 해외의 한국학자들을 다소 낮추어 보았다. 그건 80년대의 시대정신을 공유했던 많은 사람들과 다를바 없었다. 하지만 에커트 교수는 그런 태도들을 별로 개의치 않으셨을 뿐 아니라 종종 경청하기도 했다.

이후 에커트 교수는 자신의 박사논문을 수정해서 Offsprings of the Empire 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후일 [제국의 후예]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는데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민중주의 시관이 널리 확대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자의식도 강한 때였던 까닭에 삼양사라는 기업사를 통해 한국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을 밝힌 저작에 호감을 갖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서평이나 학술적 토론보다 막연한 거부감과 선입견이 작용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신기욱과 로빈슨이 편집한 Colonial Modernity in Korea 책자에 에커트 교수가 쓴 “Hegel’s Ghost” 라는 챕터는 에커트 교수에 대한 한국학자들의 비판을 더욱 가중시켰다. 나 역시 이 글에 대해선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국연구자들이 스스로의 세계관과 학문적 패러다임을 성찰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웠던 지적 지체의 소산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몇 년 후 나 스스로 한국사회사연구가 민족주의적 지향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고 나아가 근대성과 식민성의 착종을 주요한 연구쟁점으로 제기하게 되었음을 에커트 교수가 아셨을까…

이 년 전 낸시가 저 세상으로 갔는데 이제 에커트 교수가 별세하셔서 내가 하바드에서 교류하고 인연을 맺었던 두 분의 소중한 분들을 더이상 볼 수가 없다. 안타깝지만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길… 명복을 빌며 지난 후의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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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과 힐링

일본은 단층대에 있어서 화산과 온천이 많다. 2022년 일본 환경청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온천지는 약 2,900 여곳, 원천 총수는 약 28,000개나 있다. 거의 모든 곳에 온천이 있다고 보면 된다. 온천은 질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탕치(湯治)라 불리는 온천 요법이 널리 행해져왔다. 에도시대에 특히 탕치가 유행했고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의학적으로도 온천의 효능이 확인되면서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

영화나 홍보매체에서 보는, 눈쌓인 절경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모습은 유키미부로(雪見風呂)라 불리는 곳이다, 탁트인 설원이나 설산을 보며 자연 속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이런 곳은 경치가 좋은 대신 교통편이 대체로 좋지 않고 규모도 크지 않다. 또한 눈이 너무 쌓이거나 혹은 눈이 자주 내려 시계가 좋지 않아 실제로 그림 같은 정경을 즐기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성공했을때 보는 절경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여서 마니아들은 기상자료를 확인하면서 찾아가곤 한다.

유명한 온천은 료칸이라는 전통 숙박시설과 함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료칸은 일본의 전통 주택 형식의 시설로 다다미방과 온천욕장, 그리고 일식 코스인 가이세키 요리가 제공된다. 객실 내에 독립된 노천탕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료칸온천도 접근성이 그다지 좋지 않은 곳이 많고 가격도 비싸 편리하거나 가성비가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유카타를 입고 정성스러운 서비스를 받으면서 일본의 문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여서 찾는 사람이 많다. 최근 관광문화가 변화하면서 이런 전통적 료칸온천의 비중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온천욕장에는 사찰의 약수터마냥 온천수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이런 방식을 카케나가시(かけ流し) 라 하는데 뜨거운 물이 새롭게 계속 공급되어 깨끗하고 신선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려면 욕탕의 규모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실제 이 방식을 사용하는 온천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무리 일본이라고 해도 온천이 대규모로 커지면 유량이 부족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여서 다소 인공적인 조처가 따를 수밖에 없다. 흘러내린 온천수를 다시 되돌려 사용하는 방법도 종종 사용된다고 한다.

물의 온도는 법률상 25도만 넘으면 온천으로 인정된다. 원천(原泉)의 온도는 각기 달라서 사람이 사용하기 편하도록 데우거나 식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여행객이 많이 몰리는 온천지역은 온천수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부분적으로 재활용한다. 조성온천(造成温泉)이라 해서 물을 땅속이나 화산의 증기를 이용해 끓이기도 한다. 이것도 온천이라 할 수 있느냐는 논란도 있지만 카케나가시를 무난히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물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온천여행이 보편화되면서 전통적인 료칸온천보다 좀더 편리하고 대중적인 방식이 확대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숙박, 음식, 온천을 같은 장소에서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온천호텔이다. 온천 료칸에 비해 저렴하고 다수가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유명한 온천 관광지에는 거의 온천호텔이 존재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료칸 형식을 따라 가이세키같은 식사를 제공하는 곳도 있다, 야마구치 일원에서는 유다온천이 유명한데 옛날에 흰여우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발을 담근 연못에서 온천물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하기에도 전통적인 료칸온천과 함께 바다를 내다보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온천호텔이 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와 쉼을 얻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다. 이미 정년을 지나 해야할 과제나 공부거리가 딱히 부여되지 않는 즐거운 여행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야마구치와 하기의 온천에서 설산의 노천온천에서 느낄 법한 고급한 경치감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탕치는 경치의 좋고 나쁨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해묵은 상념과 욕심을 내려놓고 자연이 주는 따뜻함으로 몸과 마음의 찌꺼기를 닦는 것에서 힐링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일본의 ‘탕치’를 즐기고 21세기 형 ‘힐링’도 누려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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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숨은 기독교인

막부 시대 무사 전통이 뚜렷한 도시 하기에 다소 어울리지 않은 유적이 하나 있다. 기독교 순교자 기념공원이다. 기독교 탄압이 혹독했던 시기,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마을의 신도 3800명이 전국 각지로 유배되었고 그 중 약 300여 명이 하기로 보내졌다. 이들은 삼 년간 혹독한 고문과 굶주림 때문에 40 여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고난을 받았다. 그때의 박해와 인고의 흔적을 기려 세워진 것이 이 순교자 기념공원이다. 1605년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한 모리 번의 중신 부젠 수령 구마가야 모토나오의 비도 함께 서 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우리에도 잘 알려진 소설인데 일본의 기독교 박해가 그 배경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려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 그 숭고한 죽음에도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허무감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작중의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뜻하는 후미에를 밟으면서 “밟아라. 아픔을 알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나는 그 아픔을 알고 있다”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비로소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요지의 소설인데 그 배경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일본에 전파한 이들은 센고쿠 시대 일본과 무역을 하던 스페인,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이전엔 ‘자비엘’로 불렸던 프란시스 하비에르(F. Xavier) 가 그 선구자였고 현재 야마구치에는 하비에르 기념성당이 있다. 그의 일본선교에 도움을 준 장본인이 하기 일대의 다이묘 오우치였다. 야마구치와 나가사키 일원의 다이묘들은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를 허가했고 신자도 늘어났다. 다이묘 가운데서 신자가 된 자들도 여럿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조선에 온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은 후 지방의 다이묘들이 서양과 무역으로 세력을 키울 것을 우려하여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강력한 기독교 탄압정책으로 선회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597년에 자행된 나가사키 기독교도들의 집단 처형이다. 도요토미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도 금교령을 내리고, 가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나가사키의 애환은 그 때부터 여러 차례 계속되어 메이지 유신 직후까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숨어 지내게 된 기독교인을 가쿠레 키리스탄이라 부른다.

1637년 키리시탄을 중심으로 막부의 지배에 저항하는 시마바라 난이 일어났다. 일본 최대의 농민봉기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혹독한 기독교 탄압의 계기가 되었다.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은 정권을 엎으려는 반란분자’라고 생각하여 기독교인을 색출하는 악명높은 후미에를 만들어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 엔도 슈사쿠 [침묵]의 배경도 바로 이 시기인데 당시 순교한 많은 신자들이 후미에 앞에서 침묵하는 신에 대해 물었을 법한 주제를 다룬 것이다.

1858년 개항 이후 외국인에 한해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에 오우라 천주당이 건립되었다. 성당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은 250여 년 전 순교한 바스챤의 예언을 이곳에서 확인하고자 했다. 1865년 4월 일부 카쿠레 키리시탄이 신부에게 “성모 마리아님의 성상은 어디 계시나요?”라고 물었고 신부가 안내해 주자 전원이 함께 기도를 했다. 오랜동안 숨겨왔던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신자 발견’이라고 부른다.

2년 뒤인 1867년 우라카미 지역의 신도들이 불교식 장례를 거부함으로써 숨어 지내던 키리스탄의 존재가 드러났다. 비밀 교회당을 급습한 것을 시작으로 신도 68명이 일제히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외국 공사들이 강하게 항의하여 처형은 면했지만 대부분 하기, 후쿠야마 등지로 유배되었다. 이들은 노골적인 고문만 받지 않았을 뿐 물과 음식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지급되었고 더위와 추위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식으로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유배된 3394명 중 무려 662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1873년 금교령이 폐지되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살아 남은 이들은 대부분 유배지에서 풀려났고 통상적인 형태의 가톨릭으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종교적 내용과 형식이 많이 변해서 오히려 “조상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라며 가톨릭으로의 원복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몇 안 되는 구전 전승만으로 종교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실제 이들의 신앙은 매우 밀교적인 특성이 강했고 불교 등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또한 라틴어 기도문이 음차된 염불같은 오라쇼를 주문처럼 외우기도 해서 인류학자나 종교학자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과 유사하면서도 희생자 솟자가 더 많았을 일본의 기독교 순교사를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한국은 그 순교자들의 희생 위에 기독교가 널리 받아들여졌고 크게 융성했지만 일본은 지금도 기독교인의 숫자가 매우 적다. 엔도 슈사쿠가 카쿠레 키리스탄의 발견을 주제로 새로운 소설을 쓴다면, 아니 오늘의 일본 기독교를 대상으로 소설을 쓴다면 제목을 무엇으로 했을지 궁금하다. 여전한 침묵? 깨어진 침묵? 이상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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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와 감사

오늘이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이다.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주일이긴 하지만 사실 자연적 조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전통시대의 절기가 기독교와 결합된 문화적 현상이다. 농사든 목축이든 한 해의 소출을 거두어야 할 계절에 그 때까지 얻은 축복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기독교 문명이 아닌 사회에도, 또 세속화가 현저히 진행된 21세기에도 가을의 추석이나 Thanksgiving Day를 기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릴 적 시골에서 이 계절엔 추수가 일상이었다. 들판에는 누런 곡식이 익고 그것을 베어 탈곡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국민학교에까지 ‘가정실습’이란 이름으로 며칠 쉬곤 했는데 추수에 바쁜 일손을 도우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농사를 짓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 시기에 크고 작은 일들을 하느라 바빴다. 나처럼 농사와는 무관한 아이들은 추수가 끝난 논에서 ‘이삭줍기’를 하곤 했다. 추수가 끝난 허허벌판 같은 논밭에서 하나 둘 주운 이삭들이 모여 가마니가 되는 모습을 보고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었다.

추수를 상징하는 것은 주곡인 벼가 자란 논 만이 아니었다. 겨울을 대비하여 김장과 월동에 필요한 무, 배추, 고추를 비롯하여 밭농사의 마무리도 중요했다. 누런 호박도 거두어 들이고 타작이 끝난 작물의 잎이나 줄기로 자반을 준비하기도 했다. 내게는 나무에 열린 과일들을 따던 기억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마을 곳곳에 감나무들이 있어 빨간 감들이 달려 익어가는 가을 풍치를 더하곤 했는데 대부분 이 계절에 따서 보관하거나 곶감으로 만들게 된다. 높은 곳의 일부 감은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다. 그래서인가 지금도 상점에서 감을 보면 다른 어떤 과일보다 ‘가을’을 떠올리게 된다.

추수를 하면 감사가 따르게 마련이었던 것 같다. 흉년도 있고 생각보다 소출이 적은 경우도 태반이지만 추수하는 그 시간만은 풍요롭고 뿌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감사의 대상은 ‘자연’이나 ‘신’을 향하게 되니 바울의 표현대로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었다고 할 것이다. 농부의 땀과 수고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바람 햇볕의 도움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농부들로서 추수와 감사가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를 따라 비가 내리고 햇볓이 쬐어 이루어진 결실이라는 것이 너무도 절실하여 표하게 되는 감사를 폄하할 일은 아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보면 우주적 절대자, 삼라만상의 창조주에 대한 감사라 해도 무방할 일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현대사회에서 추수는 더 이상 자연과 계절에 연동되지 않는다. 월급형태의 소득이 주어지고 주식시장은 거의 실시간으로 이익이 달라진다. 더구나 학생이나 청소년, 퇴직한 세대나 실직자들은 ‘추수’의 감격을 느낄 새도 없다. 그러다보니 추수경험과 감사행위는 단절되었다. 긍정적으로 보면 감사가 어느 때든지 필요한 일상이 되었다 볼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더이상 감사를 절감할 절기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자연과 환경, 우주적인 섭리에 대한 생각을 할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햇빛과 바람, 비와 온도 대신 직장과 가정, 국가와 사회를 생각하게 된 것이 근대화이고 합리화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댓가로 소중한 것을 잃은 셈이다.

자나간 내 생활을 되돌아보면 이런 사회적 변화가 내 일생 속에 고스란히 재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의식 속에서 감사하는 태도가 옅어진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사람이나 사회적 조건에 대한 것이었을 뿐 자연과 우주에까지 시선이 확장될 겨를이 없었다. 아니 어릴적에 지녔던 순수한 추수에의 감사도 ‘계몽’의 이름 속에서 사라졌다. 평소 감사한다는 생각 없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감사하자는 덕담도 적지 않이 했다. 하지만 세속적 잣대와 가치로 여러가지 염려와 후회들을 무시로 겪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총체적으로 감사의 마음, 추수의 기쁨이 사라진 탓일텐데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건강상으로도 넘어서야 할 내적 문제다.

스펄전 목사님의 ‘자아가 내게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자아에게 선포하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는다. 자아를 나와 등치시키면서 자아에 이끌려 다니는 것은 결국 나를 비주체적인 존재로 만들 우려가 크다. 인간은 본명 사회학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실존적인 단독자이기도 하다. 내 자아가 나의 중요한 실체이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일 수는 없다. 미드의 표현대로 ‘me’ 를 넘어서는 ‘I’에 대한 감각, 그 존재론적 자의식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것은 인생 후반에서 더더욱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종종 접하던 감사 관련 성구들을 되새겨보는 추수감사주일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전 5:16~18)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 95:2~3),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역상 16:3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시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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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전통건축물

시모노세키는 동아시아 근대화 과정과 관련이 깊은 도시인만큼 구시가지 일대에는 영국영사관, 니베초 우체국, 아키타 상회 건물 등 많은 근대건축이 남아있다. 반면 하기는 막부시대 이래의 오래된 전통마을, 구가옥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다. 특히 조카마치로 불리는 번청 성곽 주변의 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을만큼 과거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시간 관계로 모든 곳을 방문할 수는 없지만 오가는 길에 마주칠 수 있는 곳들이어서 하기시의 공간배치와 건물의 형태 차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걷는 것 만으로도 고급스런 여행이 될 수 있다. 상층 무사의 저택, 하급 사무라이의 집, 상인의 가옥 들이 어떤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는지, 사찰과 신사, 교육기관 등이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흙벽 담장과 좁은 도로를 걸어보는 것은 즐거움과 공부의 두마리 토끼를 잡는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기 일대의 대표적인 것을 간추려 소개해본다.

도코지 (동광사) – 1691년 3대 번주 모리 요시나리가 하기 출신의 명승 혜극을 개산으로 창건한 황파종의 사원이다. 총문, 삼문, 종루, 대웅보전은 모두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 뒤쪽 모리가문 묘소는 국가지정의 사적이며 요시나리에서 11대까지의 기수대 번주와 그의 부인 및 일족, 관계자의 무덤이 있다. 묘지 앞에는 500여개의 석등이 줄지어 있고 순난 11열사묘, 유신지사 위령묘 팔기 등이 있다.

쇼카손주쿠 – 요시다 쇼인이 1857년부터 2 년 반 동안 하급 무사와 서민의 자제들을 교육한 사설학원이다. 원래 야마가류 병학을 가르치던 사숙으로 설립자의 조카 요시다 쇼인이 재인수하여 존왕양이와 정한론를 가르치고 전파했다. 키토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타카스기 신사쿠 등 유신 지사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어 유신의 정신적 근거지로 평가받는다. 1859년 요시다 쇼인이 처형당하며 1차로 폐쇄당하고 1868년 메이지 유신 후 부활했다가 1876년 하기의 난으로 다시 폐교되었고 1890년 교육칙어로 완전 폐교됐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이 주변에 쇼인 신사가 건립되었고 2015 년 7 월 세계 유산 등록으로 등재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구옥 및 별저 – 이토 히로부미 옛 주택은 단층에 초가지붕을 얹은 100㎡ 넓이의 목재 가옥으로 1854년 그 부친이 입양을 통해 사무라이의 하인이던 미즈이 다케베 소유의 이 집에 정착했다. 이 구옥은 이토의 신분이 매우 낮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 옆의 잘 지어진 별저는 1907년 일본 정계의 거두가 된 히토 히로부미가 도쿄 중부의 에바라군 오이무라 마을에 지은 별장의 현관,대청, 별실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기토 다카요시 주택 – 목조 2층 건물 카와라부키(기와로 뒤덮인 지붕)형식으로 방 12개의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기토는 조슈와 사쓰마의 연합을 성공시켜 막부타도를 가능케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후일 정한론을 반대하고 입헌정체를 주장하였다. 그 아버지 와다 마사카게는 번의였는데, 하기의 주택에는 그 시절 의사의 생활을 엿볼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타카스키 신사쿠 집 – 일본판 양요였던 시모노세키 전투를 몸소 겪었던 타카스카 신사쿠는 막부의 조슈 정벌이 시작되자 고잔지에서 막부타도의 거병을 주도하여 메이지 유신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 동상이나 회천 기념비 등은 시모노세키에서 만날 수 있다. 하기의 집에는 산유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우물과 자작의 구비가 있다.

메이린칸 (명륜관) – 상층 사무라이만 입학할 수 있었던 하기번의 번교였다. 쇼카손주쿠가 신분에 무관하게 입학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하급무사는 물론이고 중인계급도 들어갈 수 없었던 전형적인 신분제 교육기관이었다. 국가 등록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본관 건물은 오랫동안 명륜 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고 최근 박물관으로 재정비되었다.

키쿠야 가문 저택 – 조슈번의 대표적 거상인 키쿠야 가문의 집으로 에도 초기에 건축된 일본 최고 주택에 속한다. 원래 오우치 가문의 호위무사로서 야마구치에서 살고 있었지만 오우치 가문이 멸망한 후에 상인이 되었다. 1604년에 모리 데루모토가 하기번으로 오면서 그에게 현재 장소의 부지를 하사받아 집을 지었다. 상인 가문으로서는 전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측에 속하는 400년의 역사가 있다. 본채에는 넓은 객실이 있으며, 본채를 비롯한 다섯 채가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약 2000평의 부지중 3분의 1만을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쿠보타 가문 주택 – 쿠보다 가문도 포목상으로 시작하여 2대 번주 때부터 주조업으로 전환해 큰 부를 축적한 거상이다. 구보타 가옥의 주건물은 에도 시대 후기에 지어졌는데 창고와 노동자의 숙소가 합쳐진 형태로 마주보는 기쿠야 가옥의 주 건물보다 높이가 더 높다. 메이지시대 중기까지 사용한 이 건물은 메이지 시대 명사들의 숙소로서 자주 이용되었다.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전기에 걸친 건물로서 하기성 조카마치를 대표하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조카마치 (성하마을) 구역 – 모리 데루모토가 1604년에 지은 하기성 아래 마을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은 지금 남아있지 않으나 260년간 번성했던 하기의 구 사무라이 가옥, 낡은 흙벽과 마을의 배치 구조는 막부시대 상인이나 번의 가신들이 살던 분위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지역이다. 모리 가문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했던 부유한 상인 가문의 주택, 도쿠가와 막부나 천황가에서 온 방문객의 숙소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환상적인 전통 고산수(가레산스이) 정원을 대중에게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하마사키 지구 – 하기성으로 들어오는 항구지대로 전통적인 마을 도로, 부지 할당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조슈번의 수도 하기가 모리 가문의 통치하에 발전하면서 항구 하마사키도 함께 커졌다. 1998년부터 항구의 역사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하마사키는 2001년에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현재 100채가 넘는 건물이 역사 지구의 일부로 보존되고 있고 이 중 44채는 1868년 이전에 지어졌다고 한다. 상당수의 건물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어 일본의 건축사를 알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