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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해공, 2국가론

2월 6일 국민대 한반도미래연구원과 민주평통 교류협력분과위원회가 공동주최하는 라운드 테이블에 패널로 참여했다. ‘국제정세와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2024년을 전망한다’는 것이 전체 주제였다. 이 행사에는 조현 (서울대 교수, 전 유엔대사), 신각수 (세토포럼 이사장, 전 주일대사), 김천식 (통일연구원장, 전 통일부차관), 박명규 (GIST 초빙석학교수, 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 김병연 (서울대 교수, 전 국가미래연구원장)이 패널 발제자로 참여했고 김주현 초대 원장 (전 현대경제연구원장)이 좌장으로 토론을 이끌었다. 많은 숫자가 모인 것은 아니나 청중들의 경청하는 태도나 질문의 내용에서 진지함을 느낀 좋은 자리였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본관과 법학관 건물 입구에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이 서 있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소복히 눈덮인 동상 앞에서 잠시 국민대 설립자이자 초대총장이었던 해공을 떠올렸다. 해방 직후 건국을 담당할 인재양성을 위해 대학 설립이 긴요하고 그 새로운 대학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확신을 해공은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당시 미군정이 추진하던 ‘국립대학설립안’에 극력 반대했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1946년 9월 국민대학을 설립했다. 이 해에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과 서울의 국립서울대학이라는 두 대학이 쌍생아처럼 병립하게 된 현상은 제법 알려졌지만, 남한 사회 내부에서 국대안 파동 속에 국립 서울대와 민립 국민대가 함께 출범한 사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사립학교를 방문할 때면 으례 접하는 설립자의 동상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때부터인가 생각이 다소 달라졌다. 뚜렷한 사명감과 정신적 가치를 지닌 설립자의 삶이 귀감이 되는 경우에는 그런 상징이 대학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주요한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본 게이오대학에 있는 후쿠자와 유키찌의 흉상을 보았을 때 내가 느꼈던 부러움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해공의 동상 앞에서 변변한 상징적 인물을 내놓기 어려운 한국의 대학들, 특히 내가 다니고 근무했던 서울대학을 생각했다. 국립대학으로서 특정 인물로 상징화하기엔 어려움이 있을테고 보편적 인류적 사명감을 중시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빠리 소르본느에 꽁트, 파스퇴르, 위고의 흉상이 있음을 생각하면 그렇게만 해석할 일도 아닌 듯 싶다.

남북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려는 국민대의 정성은 해공 이래 대학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선한 노력이 아닌가 싶다. 김형진 교학부총장이 대독한 정승렬 총장의 인사말에서도 국민대의 이런 지향이 느껴졌는데 평화통일대학원 건립이 거의 실현단계에 도달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작금의 한반도 사정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일텐데 국민대의 건학이념에서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대체로 유사한 현실진단을 내리면서도 일부 쟁점에서는 상이한 견해들이 피력되기도 했다. 국제관계를 전망하면서 조현 교수는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약화, 유엔의 기능정지, global South의 확대, 경제와 안보의 수렴 등으로 인한 국제질서의 불안정성을 주요한 변수로 꼽았다. 특히 ‘취약국가 한국’이라는 표현이 눈에 띠었는데 변화하는 세계정세가 한국의 ‘취약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논지였다. 동북아 정세를 발표한 신각수 대사는 큰 틀에서 미중관계가 안정화되는 흐름을 보일 것으로 예측하면서도 중국경제의 부진, 미 대통령 선거, 북핵 고도화 등 여러 불확실한 변수에 대비해야 할 것을 지적했다. 특히 한미동맹을 위시하여 한일 및 한중간의 양자관계와 한미일 3각 협력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적극적 인태전략과 유럽연계를 통해 주변국에 의한 전략공간의 제약을 돌파할 필요성도 함께 지적했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김천식 원장은 1민족 1국가 1체제 통일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것과 남북한 동질성 회복노력을 지속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 맥락에서 북한의 최근 2국가론이 얼마나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지, 통일의지의 확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북한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고 특히 적대적 2국가론은 잘못된 발상임을 전제하면서, 남북간의 상호성을 규율할 전략적 프레임을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분단 80년이 가까워오고 유엔 동시가입 30년을 넘긴 남북한이 실질적으로 별개의 주권적 실체로 존재함을 인정하면서 상호통합을 추구하기 위한 새로운 발상과 동력을 탐색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의식에서도 무리하거나 급속한 통일보다는 평화공존 형태의 2체제 상태를 지지하는 경향이 높다. 이런 점에서 평화공존형, 통합지향형 2국가 상태를 필요한 중간단계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 쟁점은 객석에서의 질문과 토론으로도 이어졌는데 여전히 국가론과 민족론은 뜨거운 화두임을 느끼기에 족했다.

김병연 교수는 경제학자답게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빵에서 나오는 것이라 했다. 그런 맥락에서 김정은의 현 정책방향은 빵보다 총구를 중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 보았다. 내부의 시장효율성을 억제하면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는 오늘 북한의 경제는 지속가능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장기간의 국제제재와 내부자원결핍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강력한 군사주의와 동원체제를 유지해가는 나름의 물적 기반에 대해서 우리가 경시하는 것은 아닌지도 자문해 볼 일이다. 빵을 얻기 위해 총구를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독재자들도 역사에선 결코 드물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경제적 분석이 정치적 동학과 함께 숙고되어야 할 필요도 커지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세종으로 돌아온 다음날 RFA의 기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이날 내가 말한 논지를 잘 들었고 ‘한반도 2국가론’과 관련한 좀더 깊이있는 인터뷰를 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개학을 앞두고 여러 일들이 있는데다가 날짜 조정도 여의치 않아 다음 기회를 보자고 정중히 거절했다. 분명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북한에 대한 거부감과 따로 살자는 정서가 존재하지만 2국가론이라는 발상에 따르는 정치적 심리적 전략적 부담도 만만치 않아 고민스러운 것이 현실이다. 정주외국인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다종족 상황도 커지는 한국에서 전통적인 민족감정에만 기초해서 사회통합을 달성하기도 어려운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수년전에 “비대칭적 분단국가체제”로 이름했던 논지를 새롭게 다듬어 통일을 지향하되 2체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2 분단국가론”으로 좀더 정교한 틀을 발전시킬 필요를 느낀다. 나름 방향은 잡히는 듯 한데 당장 내딛을 길에 대한 확신이 아직은 부족하다. 아, 언제나 내 공부가 충분한 깊이에 도달할까, 임중도원 (任重道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