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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1980년대에 전북대학교에서 90년대에는 서울대학교로 옮겨 오랜 기간 교직생활을 함께 한 우한용 교수, 서경호 교수와 저녁을 함께 했다. 두 분 다 나보다는 선배지만 비슷한 시대에 대학생활을 했고 같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 인연으로 서로 좋아하고 최근에는 페북과 유네스코 활동을 통해 간간히 교류하기도 하는 사이다. 하지만 여유롭게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갖지 못했기에 정년을 한 이후 언제 한번 보자 하다가 이제야 그 약속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서경호 교수가 예약해둔 장소는 경복궁 옆 서촌의 한 조그만 한옥 까페 ‘한옥달’이었다. 좁은 골목길 안쪽 오래된 한옥을 그대로 활용하고 내부에도 전통적인 가구와 소품들을 배치한 예스런 분위기가 문화인들이 좋아할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한국측 위원장으로 활약한 서교수께서 경복궁의 문화재청에서 회의가 있을 때 종종 이용한 곳이라 했다. 음식도 이태리식을 한국인 입맛에 다소 퓨전화 한 것인데 맛깔스럽고 좋았다. 때마침 얕은 눈이 내려 작은 마당이 하얗게 덮였는데 강하지 않은 조명과 어우러져 옛날 어느 시대로 내가 돌아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한용 교수는 단편 10권, 중편 2권, 장편 5권의 소설집을 펴넨 중진 소설가다. 시집도 여러 권 출간했으며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다루면서 문학의 지경을 넓히는데 지금도 열정적인 분이다. 이 날도 소설집 [왕의 손님]을 증정받았다. 페북에도 적극적으로 글을 올리는 우교수의 글쓰기는 일상의 소재에서 인생사의 굴곡과 지혜를 찾아내는 중후하고도 맛깔나는 글로 페친들 사이에 정평이 나 있다. 나도 우교수가 올리는 글들은 늘 정독하는데 동서양의 시나 경구, 문학과 예술에 얽힌 각종 에피소드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소개하는 그의 글을 읽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올리는 글인데도 글의 길이와 깊이가 어느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여서 읽을 때마다 그 기억력과 상상력, 문장력에 경탄하곤 한다.

모임 바로 전에 뉴질랜드와 타이티를 여행하고 돌아왔노라 했다. 그 여행이 고갱에 대한 탐구와 맛닿아 있다는 것을 페북에서 읽어 알고 있었지만 쉽지 않은 여행동선을 들으면서 인문학자다운 탐사여행이란 생각을 했다. 내 페북에 보스톤 미술관에서 찍은 고갱의 대작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작품을 내 사진으로 올렸는데 우교수께서 ‘왜 그림 속에 웃는 여인은 없는가’고 물었었다. 고갱에 대한 깊은 관심과 맛닿아 있음을 뒤늦게 알았지만 제대로 답을 할 식견이 내겐 없었다. 고갱이 문명화된 빠리를 떠나 자연 그대로라 상상한 타이티로 갔으나 정작 파페에테는 당시에도 이미 도시화되어 있었던 현실에 실망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고갱은 파페에테의 ‘반얀트리’ 아래에 앉아 건너다 보이는 섬 우레아를 내다보고 또다른 탈출을 꿈꾸었다고 우교수는 적었다. 타이티를 두루 다니면서 그 답을 얻으셨을까?

서경호 교수는 [신해경연구]를 비롯하여 중국 고전문학의 탁월한 업적을 남긴 중문학자다. 또 [자메이카]라는 제목의 두툼한 장편소설을 상재한 작가이기도 하다. 하바드 대학에서 박사를 받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지구촌 곳곳의 문화유적에 해박한 분이다. 전북대 시절부터 그의 자유롭고 폭넓은 식견과 문화적 포용력을 좋아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장으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융복합적 사고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늘 강조한 분이기도 하다. 작년부터 나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을 받아 간간히 회의에서 뵙는 기회가 있었지만 좀처럼 긴 시간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갖지 못했다.

나는 서교수님을 볼 때면 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린다. 탁월한 중문학자가 소설을 썼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소설이 다룬 시공간적 배경의 스케일이 매우 큰 것에 더욱 놀랐다. 그 소설은 한반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지구적인 동학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미래의 어느 시점을 상정한 상상력이 빚어낸 그 작품은 예상 가능한 국내의 징치동학과 해외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치밀하게 녹여내 미래학 탐구서로 사용되어도 좋을 정도였다. 이 소설에서는 한반도가 통일되는 대신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일종이 완충구역을 두자는 안이 미국을 비롯한 주변강국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소설적 상상력이지만 역사적인 개연성이 없다 할 수 없는 미묘한 포인트가 흥미롭지만 무겁게 전개된다. 임진왜란 전후하여 주변국가들 사이에 한반도 분할안이 여러 차례 등장했던 역사적 경험들을 떠올렸었다. 새 소설은 쓰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치신다. 한반도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재미있고 역동적이기보다 힘겹고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이행하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두 병의 와인을 비우면서 나눈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즐거웠고 유쾌했으며 식견이 넓어지는 망외의 소득까지 있었다. 까페가 문을 닫는 시간까지 떠들다가 지하철도 함께 타고 각자의 집으로 갔다. 떠나기 전 찍은 사진을 다음날 보냈더니 우교수께서 ‘이 건달들을 어찌할 것인가’라고 적고 ‘호모 비아토르’라고 덧붙였다. 여행하는 자,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자라는 뜻인데 프랑스 철학자 마르셀이 인간의 속성으로 규정한 말이라 한다. 그 표현이 정겹게 느껴져 이 사진에 ‘호모 비아토르 – 아름다운 건달들’이란 이름을 붙여두었다. 모두들 건강하고 그 멋진 필력과 상상으로 더 많은 작품 남기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