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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포럼 -헬싱키,반둥,한반도

2차대전 종전 80주년, 한국 해방 80주년, 반둥회의 70주년, 헬싱키 협정 50주년을 맞이한 2025년,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가 주관한 베를린 포럼이 Korea At a Crossroads 란 주제로 11월 19-21일간 열렸다. 이번이 여덟 번째인데 유럽 내 한반도 문제, 특히 평화와 통일에 관심을 가진 많은 학자, 전문가들이 모이는 뜻깊은 행사다. 유럽도, 한반도도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모두가 공유하는 가운데 노학자와 새 세대의 젊은 연구자들이 함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열기가 뜨거웠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는 기회가 되어 개인적으로 더 기뻤다. SIPRI 소장을 역임한 평화연구자 Dan Smith, 주한 독일대사를 지냈고 내가 서울대 강연자로 초청한 바 있던 Nobert Bass 박사, Korea World Forum에서 자주 만났던 전 유럽의회 의원 Glyn Ford, 유엔인권 한국사무소장을 역임한 UNHCR 안윤교 전문관, 임상범 주독일 대사 등과 반가운 인사를 했다. 특히 제9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장으로 이번 행사를 공동 호스트하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온 김범수 교수와 통평원 세계한인 통일평화 최고위과정 원우인 비엔나의 정종완 팬아시아 회장, 베를린의 David Jang 사장과 유익한 담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참 좋았다.

주제가 2025년에 걸맞게 시의적절했다. 헬싱키의 교훈과 반둥의 정신을 어떻게 한반도 문제에 적용할 수 있을지, 특히 한반도의 평화구축의 맥락에서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첫날은 SIPRI 의 소장을 역임한 Dan Smith 박사가 “The Korean Peninsula: Cracking the Code of the Security Dilemma”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Gwendalyn Domning, Michael Staak 교수, 차지호 의원 등이 참여한 패널 토론이 이어졌다. Smith 박사는 신뢰가 부족한 국가들 사이에 나타나는 안보딜렘마를 해소하기 위한 접점과 계기를 만드는 실천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헬싱키 선언이 결과적으로 유럽의 해빙과 독일통일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한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면서 목적론적 해석을 경계했다.

둘째날 오전에는 헬싱키 협정의 정신과 그 효과를 검토하고 오늘날 한반도 문제에 줄 교훈을 논의하는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허지영 박사는 현상태의 인정, 대화촉진, 지역협력강화가 중요하다고 했고 다자적 engagement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Howe 교수는 현실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시각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무엇보다 ‘타자’를 인정하고 새로운 미래를 구성해가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강조했다. M.Staak 교수는 CSCE 중심으로 과정중심적 접근, 주변국가들과의 협력, 신뢰구축, 영역별 협력 같은 중요한 교훈을 헬싱키 협정으로부터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한반도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했다. 대체로 전날 기조강연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작은 접점, 가능한 대화와 신뢰조성의 작은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언급되었다.

오후 세션은 반둥 70년과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자리였다. UNHCR 안윤교 님이 “From Geneva to Global South: Understanding Human Rights Interactions”를 발표했다. 제네바에서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 차원의 UPR을 통한 북한의 반응은 결코 미미하거나 부정적이지 않다는 점, 인권의제를 통해서도 대화를 이어갈 공간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Kee Park 박사는 “DPRK’s pivot away from ROK’s aid money: Is Inter-Korean cooperation over?” 라는 발제를 통해 현재 남북한 의료지원과 협력의 현실을 논의하고 특별 펀드조성 방안 등을 제안했다. Tony Binn 교수는 아프리카에서의 ODA 중요성과 그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여러 교훈들을 발표했다. “Rethinking Korea’s ODA and Global South Policies” 란 제목처럼 반둥을 직접 논의하는 대신 Global South와의 교류지원사업을 통해 한국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되었다.

셋째날은 이곳의 젊은 신진 연구자들의 발표가 있었는데 전날의 전문가들 토론 못지 않게 신선하고 활기찼다. 내 개인적으론 이 세션이 더 흥미롭고 좋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Emytro Andrianov 는 이광수, 한용운, 김소월의 문학 속에 나타난 서사를 통해 Literary Memory와 National Healing 을 연결시키는 문화사회학적 분석작업을 수행했다. 중국에서 온 Yujin Xu는 한국 MZ세대의 통일의식을 분석적으로 검토하면서 세대간의 의식차, 그 속에 나타나는 시대의식과 집합적 꿈의 변화를 추적하고자 했다. 한국 연구자들도 쉽지 않을 문학작품의 결을 추적하고 조사연구의 문항과 응답의 향방을 이론화하려는 젊은 학자들의 지적 역정이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몽고 출신의 Munkhzul Bat-Erdene는 Small State’s Shelter Seeking Diplomacy를 이론적으로 검토하면서 몽고가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에 작용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주목하고자 했다. Small State 라는 규정이 자칫 잘못된 프레임을 강화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반둥의 정신을 현재의 한반도에 접목시켜보려는 진지한 태도나 몽고의 지정학적 함의를 주목해보자는 제안은 신선했다. Natalia Matiaszczyk은 폴란드와 독일의 화해를 위해 각 지방도시들이 어떤 활동과 연대를 보여주었는지를 한일 도시간의 사례들과 비교했다. 역시 두 비교사례에서 지방도시의 현저한 자율성 차이를 통제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지방 차원에서 평화구축과 신뢰조성의 실천을 사고할 필요성을 보여준 것은 뜻깊은 점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배운 자리였다, 긴 회의와 토론을 마치면서 두가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헬싱키의 교훈을 강조한 유럽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가능한 것, 실천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현재의 북한태도를 고려할 때 대화와 접촉이 불가능할 큰 아젠다, 예컨대 통일, 비핵화, 인권 등은 내세우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는 조언이 많았다. 하지만 과연 그런 접근이 대화와 신뢰조성을 보장할 것인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때로는 쉽지 않지만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헬싱키 협정에서 인권을 끝내 고집하면서도 현실적인 관계에서는 유연한 태도를 취했던 방식을 꼭 손쉬운 접촉우선이라 하기는 어렵다. 가치지향이 없는 당장의 효과만을 중시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도 깊이 숙고하면서 헬싱키의 교훈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생각은 차지호 의원이 제기한 인공지능의 영향이다. 앞으로 ODA를 비롯하여 국제적 협력이나 교류에서 첨단기술, 인공지능이 미칠 충격 및 여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이 회의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향후 깊이 숙고할 쟁점임에 분명하다. 인공지능이 단순히 기술혁신에 머물지 않고 자원분배, 고용변화, 사회적 관계 조정, 나아가 군사기술과 안보영역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이기 때문에 남북관계나 사회전반의 평화구축에서도 이 변수는 피하기 어려운 문제다. 현 정부나 국회에서 AI기반 사회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직은 슬로건 차원에 머무는 느낌이어서 더욱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학문 분야에도 세대교체가 진행중이고 유능한 젊은 세대의 한국연구자를 배출하는 것은 어디든 중요하다. 시니어 전문가들과 주니어 연구자들 사이의 관심도 같지 않고 문제의식도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의 경우 세대경험, 시대상황이 너무 다르고 접하는 정보의 차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 좋은 환경일수 있지만 그만큼 한국사회의 역사적 뒤틀림과 내적 문제를 접해볼 기회는 줄어든다. 그런 점에서 여러 세대의 다양한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진지한 발표와 토론을 거듭한 이 포럼 자체가 매우 귀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런 포맷을 유지하는데는 보이지 않게 수고하는 분들의 헌신과 집념이 필수적이다. 이은정 교수를 비롯한 몇 분들의 열정이 참으로 소중하고 고마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