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에이티즈 게릴라

이틀간 에이티즈의 노래를 계속 들었다. 이번에 발매한 앨범 8집 타이틀곡 ‘게릴라’ 영상을 유투브에서 보게된 것이 계기였다. 이들이 해외에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고 특히 올해 초 유럽 현지공연에 수만의 청중을 열광시킨 그룹이란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최근 빌보드 차트의 상위에 진입하고 국내에서도 상당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하지만 굳이 이들의 노래를 찾아 들어보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이들이 발산하려는 메시지가 내 사회학적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노래를 음악 외적인 시각에서 평가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에이티즈 같은 아티스트의 경우는 그런 시각에서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고 유용하리라 생각을 한다.

실제로 이번 앨범 발매에 앞서 공개한 트레일러와 포스트는 문명론적 관점에서 읽어야 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아이돌의 역동적인 노래에 어울리지 않는 디스토피아적 도시공간이 영상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나키스트를 상징하는 문양을 영상 속에 또렷하게 배치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해적과 게릴라의 이미지를 내걸고자 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음악적이기에 앞서 사회문화적으로 답할 쟁점이다. 체계적으로 통제되고 감시되는 현실의 벽과 그 ‘지겨운 반복’을 부셔버리려는 자유로운 영혼을 대비시킨 노랫말들과 영상은 아티스트로서의 에이티즈 나름의 현실진단이자 응답인 셈이다. 세상을 바꾸고 벽을 허물라는 과격한 구호를 외치면서도 개개인의 필링, 감정, 사랑, 자유를 강조하는 모습에서 수십년 전 전세계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비틀즈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들이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열렬한 사랑을 받은 이유 가운데는 그런 점도 있을지 모른다.

이번 8집 앨범에 수록된 7곡은 서로 연결된 메시지로 뚜렷한 서사성을 지니고 있는데다 그 내용이 갖는 사회문화적 함의가 강렬하고 만만치 않다. 곡의 제목들만 봐도 프로파간다, 사이버펑크, 게릴라, Where Do I Go, 뉴월드 등으로 문명비판적 시리즈물을 방불케 한다. “세상이여 깨어나라”고 명령조로 일갈한 뒤 거짓, 통제, 규율, 증오, 이기심과 같은 저항할 대상을 열거하고 “우리를 감시하는 하늘의 눈(“eyes in the sky”)을 보라고 외친다. 또한 거짓과 감시로 박제된 디스토피아적 현실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움직임, 감정의 힘을 느끼기 시작한 자들의 결집과 각성,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힘과 운동을 강조한다. 동영상의 화면에는 프랑스 혁명, 감시사회, 대중통제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오마주되어 있고, 공식 설명 영상에서는 보다 직설적으로 이 게릴라적 저항운동의 의의와 그 범위를 언급하기도 한다.

가사들도 의외로 직설적이다. 시적이기보다 산문적이고 은유적이기보다 선언적이다. 그래서 노래말에 담긴 지향과 주장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내 안의 무언가가 계속 눈뜨려 하고 있어. 눈을 떠 느껴 봐, 하늘에 날린 빛처럼 우린 자유로워…(섹터1) /사슬에 묶인 듯 꼭두각시 같은 춤사위만, 무엇도 느낄 수 없는 이곳은 full of lies (사이버펑크) / 두 귀를 막은 채 두 눈을 가린 채 똑같은 인형처럼 살 수 없잖아 이제 시간이 됐어, 우리 필로 세상을 깨워, break the wall, 세상을 바꿀 우린 게릴라 (게릴라). / 눈을 떠 진실들과 마주할 때 비로소 세상은 바뀔 수 있어, 어둠이 걷힐 때는 한 줄기 빛이면 충분하지, 천둥처럼 깨워 세상을, 신세계가 눈앞에 곧 다가올 이 시대. 새로운 세계를 준비해.. (뉴월드)

유투브로 노래와 영상을 들으면서 나는 소설 ‘멋진 신세계’를 생각했다. 고도의 과학기술에 기반한 감시사회의 도래, 인간의 기계화를 추적한 문명비판물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이 암울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출현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에이티즈의 앨범에서도 완벽하게 관리되는 세상, 뻔한 행동이 지겹게 반복되는 현실 앞에서 내면의 감정, feeling,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저항의 연대를 형성하는 것을 주요한 모티브로 삼는다. 노래로 예술로 감정과 필링으로 암울한 시대상을 깨트리자는 메시지가 강렬하다.

아나키즘의 세계관을 표방하면서도 과거 유럽의 68세대나 미국의 히피들에게서 보였던 거칠고 퇴폐적인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주목할 일이다. 멤버들은 한결같이 단정하고 깔끔하며 밝은 표정으로 역동적인 군무를 춘다. 영화배우를 뺨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과 단정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이들과 노랫말에 담긴 강렬한 저항서사는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아름다운 개성과 저항의 파워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한국 아이돌 문화의 놀라운 혁신일지 모르겠다. 에이티지는 그런 가능성을 전형적으로 또 성공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할만하다. 나름의 세계관을 노래 속에 담아 전파하려는 이들의 원대한 포부가 앞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지 궁금하다. 이 대담한 그룹의 활동이 예술적으로는 물론이고 사회문화적으로도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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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와 주자

여름 무더위를 이겨내려고 며칠 소동파의 적벽부를 써보고 있다. 행서로 이름난 명의 문장가 문징명의 서첩을 임서하는데 점점 더 글씨보다는 글의 내용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화자와 객이 나누는 두 갈래의 생각은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잘 어우러져 글 전반의 격조와 정감을 고조시킨다. 참으로 명문이구나 싶다.

객은 인생의 짧음과 강물의 끝없음을 비교하며 이를 슬퍼한다 (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窮). 하지만 물이 제 아무리 흘러도 강은 그대로이고 달이 수없이 차고 기울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들어 화자는 이렇게 응대한다. 변함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일순간이고 불변의 시각에서 보면 만물이 끝이 없다고. (客亦知夫水與月乎? 逝者如斯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蓋將自其變者而觀之則天地曾不 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則物與我皆無盡也)

성리학의 근간을 구축한 주자는 소동파 같은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사회가 어지럽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질서와 분수를 중시하고 위계적인 사회관계를 중시하는 주자학의 관점에서 도교적인 생각이나 행동은 위험해 보였을 법도 하다. 유교입국을 추구했던 삼봉 정도전도 그런 생각을 가졌을까?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는 주자를 숭앙했지만 동파의 태도를 나쁘게 보진 않았다 한다. 한국의 유자들이 중국에 비해 산림처사의 기질을 좀더 강하게 지녔던 탓이었을지 모르겠다. 어쨋든 중국에서도 조선에서도 이 글이 불후의 명문으로 인정되었던 것을 보면 사람의 정서가 유학적인 것만으로 환원되기는 어려웠음이 분명하다.

개인의 삶도 공동체의 질서도, 자연의 생태계도 과도한 욕망으로 고통을 받는 21세기 오늘 더 필요한 자세는 어떤 것일까? 주자와 같이 옳고 그름을 항상 의식하면서 노력하는 적극적 주체형일까 아니면 동파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여유와 관조의 인간형일까? 자문하는 중 “조물자”라는 글에 눈이 간다. 만물은 다 주인이 있어서 내 소유라 할 것이 없지만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은 제아무리 가져도 금할 자가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조물자의 끝없음이고 우리가 함께 기뻐할 일이 아닌가.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者之所共樂)

노력과 수고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고, 만물의 영고성쇄를 조망하면서도 덧없음의 허무에 빠지지 않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자기 삶에 대한 당당한 자부심과 유일한 존재로서의 자긍심과 함께. 유아론을 벗어나 타자 및 만물과 공존하고 겸손할 줄 아는 것 – 매우 요긴한 지혜이자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이를 위해서는 적벽부의 내용처럼 만물의 주인인 조물자에 대한 믿음이 불가결할지 모른다. 그 믿음 위에서 화자의 관조와 객의 노래가 통했을 것이다. 주자와 유학, 근대 합리주의 정신이 놓친 것이 조물주에 대한 이 경외의 심성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보면 여전히 우리는 주자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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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한과 때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에 다 때가 있나니 /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아침에 전도서 3장을 읽다가 며칠전 정전기념일, 북한의 전승절 기념식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을 전한 영상을 떠올린다. 남북협력과 북미협상에의 기대보다 핵무력에 기초한 자주노선의 길을 견지하겠다는 분명한 선언이었다. 특히 한국에 대해 전례없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것이 예사롭지 않다. 윤석렬 정부의 출범이나 남한 보수층의 대북 비난이 빌미가 되었을 테지만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쇠퇴, 미중 대립의 격화와 북중관계의 호전이라는 달라진 국제환경이 체제내구력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킨 결과임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북한의 호전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언사의 표출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한 시대가 가고 있다는 예감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낯설게 느껴졌다. 탈냉전 이후 30년간 남북의 대화, 화해, 접촉, 신뢰가 2018년 한껏 고조되었다가 비행기 추락하듯 향후의 기대감마저 현저히 위축시킨 지금, 다시 그런 시대를 전제한 대응이 가능할지 의구심이 크다. 물론 냉전시대의 대결로 회귀하거나 일전불사를 외치는 무책임함이 그 대응책일 수는 없고 우리 사회 한켠에는 여전히 그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과연 그 기대가 지속가능할까를 회의하게 만드는 상황이 너무 뚜렷한 것 같아 편치않다.

범사에 기한이 있다… 사랑할 때와 평화할 때의 기한이 다 된 것인가.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 (전도서 3장 5-8) 이제는 되지 않을 미련을 갖기 보다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가 답답하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되기보다 걱정을 더하는데 지혜자의 훈계에서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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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정준영 교수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연구]라는 책을 출간하고 보내준 것을 두 달이나 지나서 훑어보았다. 경성제국대학은 국립서울대학사를 포함하여 한국학술장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제도사나 정책사 차원이 아닌 지식사의 대상이 된 경우는 드물다. 學知의 탐구와 연결, 그 사회역사적 영향이란 묵직한 시선으로 이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시도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6명의 학자를 다룬다. 경성제국대학 초대총장이자 저명한 동양학 연구자였던 핫도리 우노키치, 도쿄대 사학과 출신으로 초창기 조선사학 연구를 주도한 오다 쇼고와 이마니시 류, 도쿄대 지나철학과 출신으로 중국의 학술문화가 조선과 일본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추적한 후지쓰카 지카시와 아베 요시오, 미국 유학자이자 독실한 기독교도로 강압적 식민정책을 비판했던 이즈미 아키라 등이다. 이들 연구자들의 학술활동을 통해 식민주의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어떻게 지식의 형태로 공존할 수 있었는지를 탐색하고 있다. 식민통치와의 연결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사실왜곡이나 정책효과만으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문제의식이 야심차다.

식민사학의 극복을 부르짖은지 수십년이고 한국학의 전 세계적 확산을 지향하는 지금, 식민지 시대 일본인 학자의 조선연구를 추적하게 만든 동력은 무엇일까? 이태진 교수가 주도한 총서기획이 ‘식민사학의 극복’을 표방한데서 그 답의 일단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문제의식에 더하여 정치사나 제도사의 시각과 다른 지성사의 독자적 공간을 탐색하려 한다. 다루어진 6명의 인물들은 개인적으로 성실하고 유능한 학자들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문화통치의 주요한 기능수행자였다. 연구자의 시대적 환경과 학문적 가치지향 간에는 암묵적 협력과 잠재적 긴장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이들에게 이 문제는 2차방정식이 3차 방정식으로 바뀌듯 더 복잡했을까 아니면 오히려 1차 방정식처럼 단순화되어 있었을까? 결국 연구자의 존재구속성과 자율성이란 쟁점으로 이어지는 지성사 고유의 문제와 맞닿는다.

일본에 중점을 두면서도 중국, 일본, 조선을 가로지르는 문명 교류사의 맥락에서 조선을 연구했던 이들의 유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도 남겨진 과제다. 저자는 이 책에 “지양으로서의 조선, 지향으로서의 동양”이란 부제를 달았는데 지양과 지향의 종합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실제로 후지쓰카가 청조문명의 조선전파가 독특하고도 독보적임을 확인하고 홍대용, 박제가, 김정희의 높은 성취를 평가한 것, 아베 요시오가 송명학의 일본 전래길에 우뚝 선 퇴계 이황을 주목한 것은 지금도 의미있는 지적 유산이 되어 있다. 한양대 정민 교수는 후지쓰카 교수의 컬렉션 일부를 하바드 옌칭 도서관에서 찾아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고 식민지 하에서 한중일을 잇는 네트워크는 더욱 확대된 것이 사실이다.

식민지 하 동양연구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뒷받침하는 작업이 되고 말았고 결국 해방후 그 맥이 단절되었다. 하지만 냉전기를 겪으면서 기피되고 잊혀진 것일 뿐 그것을 지적으로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면으로 부딪쳐 그 유산과 싸울 기회를 갖지 못한 채 1990년대 이후 한중일을 함께 사고하는 논의는 급격히 증대했다. 일본 학계의 논의가 적극 소개되고 중국과의 교류가 급진전하면서 한중일 학술회의가 붐을 이루기도 했다. 그 맥락에서 동아시아 범주가 주목을 받았고 동북아 지역연구의 중요성도 높아졌다.

다시 동북아는 정치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숨고르기를 하는 형국이다. 미중의 패권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중관계도 소원해지고 한일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중국은 중화주의로의 노골적인 경사를 뚜렷이 하고 있고 일본도 자국주의로의 걸음을 가속화한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동북아시아는 어떻게 상상되어야 할까? 오늘의 동아시아나 동북아는 동양학의 지향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 가치와 문명의 차원에서 서구의 존재는 배제해도 좋은가? 질문은 계속되고 공부할 과제는 끝이 없다. 정교수를 비롯한 유능한 후학들의 건투를 비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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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의 세계화?

보스턴에서 만난 적 있던 Peggy Levitt 교수가 자신이 쓴 논문을 보내왔다. 하바드 한국학연구소에서 개최한 문화관련 심포지엄에서 만났다가 심보선 교수와의 인연을 알게 되었고, 마침 한국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직후라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이후 다시 전반적인 한국상황을 알고싶다고 해서 약 한시간 반 정도 인터뷰를 하기도 했었다.

글이 던지는 질문이 신선하다. 저자들의 관심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 담겨있다. ” How does art from what have been culturally peripheral countries that were not former colonies of Western powers scale shift or find its way to the global center? What can the Korean case tell us about the circulation of contemporary literature in a “small language?” 한마디로 서구 식민지도 아니었던 주변부 국가의 예술이 지구적 중심부로 진출할 길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한국의 사례는 그런 ‘소수 언어’가 세계문화에 대해 미치는 영향력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가?

BTS의 인기와 K-Culture 의 영향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아직 적절한 설명틀은 보이지 않는다. 누구는 정부의 정책효과로 설명하고 누구는 한국인의 독특한 기질을 강조한다. 필자들은 문학의 “하부구조”라는 말로 포괄될 수 있는, 쓰기, 읽기, 출판, 마케팅의 플랫폼, 통로, 켄테이너, 대문들에 주목한다. 한국문화의 세계화가 주변부-중심부 패러다임의 단순성을 극복하고 비서구 사회의 문화가 지구적 중심성을 획득할 수 있는 설명도식으로 보완, 활용될 수 있을지 기대해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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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을 넘어서”

백광열 박사가 공들여 번역한 책을 보내왔다. 호주 캔버라 대학의 황경문 교수의 Beyond Birth 를 옮긴 것인데 다소 도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문제의식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한국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보편적 발전도식에 맞추려는 시각을 거부하고 전통시대의 한국적 특성이 누적적으로 작용한 장기효과에 주목한다. 사회혁명이 부재한 사회로 파악하면서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주요한 지위상승을 이룬 엘리트의 성장과 그 과정의 성격을 설명하려 한다.

이 책은 중인, 향리, 서얼, 군인, 서북인 등 양반층에 비해 신분적 지위가 훨씬 낮았던 ‘제2신분집단’을 주목한다. 저자는 고려시대 이래 가문과 교육과 관료제의 복합적 연계 속에서 일종의 비귀족 엘리트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의 독특한 심성과 아비투스가 20세기 이래 특권적 엘리트층을 구성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전통사회의 특질을 세밀하게 밝히는 역사학적 실증을 넘어 한국사회에서 확인되는 서열의식, 신분의식, 평등의식, 공정의식의 기원을 탐구하려는 장기사회사적 시선이 신선하다.

영미권의 한국학 저술은 한국 학계의 문제의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서구중심적 서술이 이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동서양을 아우르는 비교사적 시각과 개념화 능력에서 주목할 만한 장점도 적지 않다. 이 책 역시 신분원리와 국가관료제의 공고한 결합, 그 틈새에서 생존해온 ‘제2신분층’의 기민함, 전통적 심성의 장기지속성 등의 주장은, 추가 분석이 필요하지만 흥미롭다. 조선시대 신분제도, 특히 양반지배층의 네트워크 특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연구하고 있는 백광열 교수가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 이런 저작을 번역 소개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뜻깊고 성원할 일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다시 출생과 가족, 신분을 주목하게 만든다. 교육을 통한 상승이동의 가능성이 막히면서 금수저 흙수저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 일각에선 평등주의가 너무 강한 사회라 하고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신분사회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지속적 발전을 위해 경쟁주의와 실력주의를 강화하자는 주장과 과다경쟁이 야기하는 사회공동체 해체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공존한다. 이 책의 제목인 Beyond Birth 가 특권층의 형성원리를 넘어 평등사회 실현으로 이어지려면 또 얼마나 많은 애씀과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인가? 책장을 넘기면서 떠올리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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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경이 앞에서

어제 밤 미국 항공우주국 (NASA)에서 제임스 웹 차세대 우주망원경으로 찍은 우주사진을 발표했다. 나는 실시간으로 현장자료를 보여주면서 전문가의 설명을 전하는 한 국내 유투브에 접속하여 시청했는데 심야 시간임에도 약 2만명이 접속했을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바이든 대통령이 미리 발표했던 첫 사진을 포함한 5컷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우주의 신비함과 경이로움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다양한 빛의 보석들을 진열한 것 같기도 하고 천지창조의 웅장한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걸출한 예술가의 신비한 작품을 보는 듯 싶기도 했다. 작은 모래알 정도의 우주 공간 속에 저토록 많은 은하들과 거대한 가스 성운이 존재한다는 것, 뭇 별들의 생성과 소멸이 지금도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우주를 광대무변이라 표현한 것이 결코 문학적 표현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천문학과 물리학 관련 글을 읽고 유투브 강연을 듣는게 일종의 취미가 된지 몇 년이 되었다. 십여년 전 유럽의 학자들과 civility 의 지구적 확산을 공동연구할 때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개념적 ‘entanglement’에 주목하자는 논의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고 결과물이 책자로 간행된 이후에야 현대물리학의 주요 개념임을 알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전혀 업데이트되지 않은 내 과학지식의 엉성함이 부끄러운 감정으로 남아 천문학과 물리학 분야의 강의와 영상들을 듣기 시작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적지 않고 듣다가 잠이 드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새로운 내용을 접하는 느낌이 상쾌해서 지금도 잠자리에선 음악 대신 과학강연을 틀어놓는 날이 많다.

아마추어 귀동냥 지식이지만 가랑비에도 옷은 젖는 법이다. 가볍게 흥미로 듣기 시작했지만 점점 내 생각과 사고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낀다. 실제로 빅뱅 우주론과 양자물리학의 설명들은 시간과 공간, 존재와 무, 힘과 에너지, 물질과 생명 등 근원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고 근대 과학주의에 근거하여 초월적 세계관을 우습게 보려던 지난날을 겸손하게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가 하면 휴머니즘과 민족주의, 근대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시야가 얼마나 좁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우주에 놀라면서도 다소 착잡해지는 마음을 숨기기 어려운 까닭도 저 세계관에 수반될 미래가 좀처럼 상상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칸트가 자신을 감탄하게 만들었다는 “밤하늘의 별과 내 마음 속 도덕률”을 떠올리면서 저 놀랍고 아름다운 우주의 이미지 너머에서 내가 찾아야 하고 또 확인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자문해 본다. 첨단 우주과학의 시대에 인문학과 사회과학, 신학과 역사학, 윤리와 정치는 무엇일 수 있고 무엇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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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너머’의 상상

중장기 남북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한 심포지엄에 종합토론의 좌장으로 참여했다. 다양한 주제들이 논의되는 가운데 한반도 기후위기와 생태환경을 다룬 한 발제자가 ‘인간 너머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남북간 협력이 사람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동식물과 자연환경, 생태적 차원의 교류에까지 넓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사회과학의 ‘물질적 전환’, 행위자 네크워크 이론의 문제의식을 남북관계에 적용하려는 시도로 참석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여러 분야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자는 주장을 접하게 된다. 인문학,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신학과 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이다. 근대 휴머니즘의 한계가 부각되는 반면 인공지능, 로봇, 알고리즘 같은 비인간적 행위자성 (Agency)은 더욱 확대되는 기술문명시대의 반영일 터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간과 자연, 생명과 무생물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던 상식이 크게 동요한 것도 한 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전근대적 사유라고 홀시되던 물활론, 생기론의 시각이 새로운 지적 자산이자 윤리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재조명되고 있고 SF 영화나 소설은 이미 비인간적 주체가 살아있는 행위자이자 사건의 주역으로 등장한지 오래다.

인간 너머의 접근이라는 시각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떳떳하게 내놓을만큼 우리는 그동안 인간중심적이었던가도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효율과 발전, 성장과 성공의 추구 속에, 민주화와 개인주의의 확산 속에 인간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전쟁과 대결, 불신의 시대를 살아온 한반도의 이념대립과 안보계산 속에 인간이 차지할 자리가 얼마나 확보되었던 것일까? 문화적 동질성이 외쳐지고 이산가족상봉의 감격을 공유하며 탈북자를 수용하고 교류 협력의 상생을 추구하자는 민족 담론 속에는 과연 진정한 인간적 시선이 자리하고 있었던가?

향후 우리의 접근은 인간을 뛰어넘는 것을 지향해야 할까? 오히려 인간을 주목하는 관점을 회복하자고 주장해야 할까? 아니면 인간-비인간을 함께 고려하는 제3의 길을 모색해야할까? 인간 너머를 강조하기에 앞서 던져보아야 할 질문이라 생각된다. 제3의 길이 종종 애매한 종합이 될 우려가 없지 않지만, 근대 휴머니즘에 내장된 인간중심성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그것에 담긴 인류적 자산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반도의 엄중한 현실 앞에서 인간의 자리를 제대로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절실하다. “인간과 함께 인간을 넘어”- 이런 모토는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추구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life · 오늘의 화두

물로 쓰는 글씨

우연히 해보기 시작한 물로 쓰는 글씨연습이 퍽 재미있다. 화선지에 물만 적신 붓으로 안진경의 ‘쟁좌위고’ 행서를 임서해 보는데 의외로 먹을 사용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게 획의 강약과 섬세함이 잘 드러난다. 글을 쓴지 십여분 만에 글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만 어차피 남기려는 뜻이 없는 연습일 바에야 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깨끗한 화선지를 다시 사용할 수 있고 연습이 끝난 후 붓을 빨아둘 필요도 없으니 금상첨화다. 짧은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기도 좋아 붓을 잡는 시간이 오히려 늘어나는 효과도 있다.

화선지에 공들여 쓴 글자가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삶의 한 단면을 보는 느낌이다. 정확한 필획의 모습을 구현하려고 최선을 다해 써 보지만 그 디테일은 서서히 사라지고 마침내 흰 화선지만 남는다. 어제의 행적과 성과가 어떠하든 늘 새로운 내일이 주어지는 인생의 이치와 같다고 할까. 어쩌면 우리 삶이 먹으로 쓰여지지 않고 물로 쓰여지기에 희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부끄럽고 안타까운 어제도 잊혀질 수 있고 늘 새롭게 시작할 내일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잘못도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구원사상이 과거에 억메인 인생에게 큰 해방의 복음이 될 수 있음을 몇 번이고 재생되는 화선지 속에서 떠올리게도 된다.

하지만 우리 삶이 전부 물로만 쓰여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끝끝내 없이지지 않고 인생 전반에 긴 영향을 남기는 과거도 적지 않은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로 쓴다고 생각했는데 사라지지 않는 과거도 있고 먹으로 썼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들도 적지 않다. 사라질 기억과 남길 과거를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먹과 물을 선택할 자유가 애초부터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붓으로 쓸 뿐이고 그것이 물로 쓰여질지 먹으로 쓰여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자의 권한일른지 모른다.

그래서 쓰는 순간에는 먹인지 물인지 의식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을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물로 쓸 때는 마음가짐부터 먹으로 쓸 때와 같지 않아 마음은 편한데 집중도가 떨어진다. 인생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내일이란 새로운 기회가 한없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오늘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약해지기 쉽다. 그렇다고 매일을 공든 작품 쓰듯 모든 힘을 쏟아붇는 것은 감당하기도 어렵고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물로 쓰는 여유와 먹으로 쓰는 집중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의 균형감이 중요할텐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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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가 된 유네스코

장성의 필암서원을 다녀왔다. 입구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이란 간판이 우뚝하다. 서원 내 마루에는 오드레 아즐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서명이 담긴 “서원, 한국의 성리학 교육기관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한다”는 확인서가 걸려있다. 2019년 이곳을 비롯하여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등 9곳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년 전에는 통도사, 부석사 등 한국의 전통사찰 7곳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이들 산사 에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는 자랑스레 세워져있다. 한국 유교와 불교의 유산이 모두 유네스코로 인해 세계적 유산임을 공인 받은 셈이라 할 수 있겠다.

유네스코 표지판은 그 자체 문화 브랜드다. 조선왕조실록이나 KBS 이산가족찾기 자료의 가치는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로 설명되곤 한다. 아리랑이나 판소리, 종묘제례약의 품격 역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이란 해설로 뒷받침된다. 지방정부들이 앞을 다투어 자기 지역의 유무형 문화유산의 가치를 확인받고자 유네스코 문을 두드린다. 집 가까이 있는 고등학교 교문에는 ‘유네스코 협력학교’란 간판이 걸려있다. 대학입시 부담이 강한 한국에서 유네스코가 표방하는 지속가능교육의 가치들이 실제로 학교현장에 얼마나 비중있게 반영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학교의 자긍심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네스코가 이런 브랜드 파워를 갖게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다른 어떤 국제기구도 갖지 못한 유네스코만이 지닌 문화적 영향력이다. 그런만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국가적 관심사가 되고 문화다양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든든한 기반이 된다. 하지만 일본의 군함도 유적 소개와 사도광산 등재추천에서 식민지 역사경험을 배제하려는 시도, 중화민족의 문화력을 확인하려는 자국주의 기획이 고조되는 중국의 문화공정에서 보듯 아직은 인류보편의 역사이해보다 국가주의적 역사해석에 더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문화가 상품이 되고 팩트보다 상상력이 힘을 얻는 시대가 될수록 관광자원을 위해 과거유산을 침소봉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쉽다.

조용한 산사나 서원 앞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란 표지판을 보는 사람들이 떠올리는 생각은 무엇일까? 민족적 자부심? 관광자원의 우수함? 지역적 정체성? 유네스코의 정신은 이런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권의 자긍심과 무형예술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인류보편의 지적 도덕적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다. 과연 21세기에 저 브랜드가 그런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관건은 유네스코가 확보한 이 독특한 브랜드 파워를 새로운 지구적 문화실천과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혁명으로 삶의 전 영역이 크게 변하는 시대에 과거보다는 미래, 자랑보다는 책임, 지역보다 인류를 표상하는 형태로 유네스코 브랜드 파워가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필암서원 앞에서 일본의 군함도, 중국의 문화공정이 떠올라 유네스코라는 멋진 브랜드 파워와 인류평화란 미래과제에 대해 갖게된 생각의 한 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