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소동파와 주자

여름 무더위를 이겨내려고 며칠 소동파의 적벽부를 써보고 있다. 행서로 이름난 명의 문장가 문징명의 서첩을 임서하는데 점점 더 글씨보다는 글의 내용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화자와 객이 나누는 두 갈래의 생각은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잘 어우러져 글 전반의 격조와 정감을 고조시킨다. 참으로 명문이구나 싶다.

객은 인생의 짧음과 강물의 끝없음을 비교하며 이를 슬퍼한다 (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窮). 하지만 물이 제 아무리 흘러도 강은 그대로이고 달이 수없이 차고 기울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들어 화자는 이렇게 응대한다. 변함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일순간이고 불변의 시각에서 보면 만물이 끝이 없다고. (客亦知夫水與月乎? 逝者如斯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蓋將自其變者而觀之則天地曾不 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則物與我皆無盡也)

성리학의 근간을 구축한 주자는 소동파 같은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사회가 어지럽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질서와 분수를 중시하고 위계적인 사회관계를 중시하는 주자학의 관점에서 도교적인 생각이나 행동은 위험해 보였을 법도 하다. 유교입국을 추구했던 삼봉 정도전도 그런 생각을 가졌을까?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는 주자를 숭앙했지만 동파의 태도를 나쁘게 보진 않았다 한다. 한국의 유자들이 중국에 비해 산림처사의 기질을 좀더 강하게 지녔던 탓이었을지 모르겠다. 어쨋든 중국에서도 조선에서도 이 글이 불후의 명문으로 인정되었던 것을 보면 사람의 정서가 유학적인 것만으로 환원되기는 어려웠음이 분명하다.

개인의 삶도 공동체의 질서도, 자연의 생태계도 과도한 욕망으로 고통을 받는 21세기 오늘 더 필요한 자세는 어떤 것일까? 주자와 같이 옳고 그름을 항상 의식하면서 노력하는 적극적 주체형일까 아니면 동파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여유와 관조의 인간형일까? 자문하는 중 “조물자”라는 글에 눈이 간다. 만물은 다 주인이 있어서 내 소유라 할 것이 없지만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은 제아무리 가져도 금할 자가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조물자의 끝없음이고 우리가 함께 기뻐할 일이 아닌가.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者之所共樂)

노력과 수고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고, 만물의 영고성쇄를 조망하면서도 덧없음의 허무에 빠지지 않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자기 삶에 대한 당당한 자부심과 유일한 존재로서의 자긍심과 함께. 유아론을 벗어나 타자 및 만물과 공존하고 겸손할 줄 아는 것 – 매우 요긴한 지혜이자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이를 위해서는 적벽부의 내용처럼 만물의 주인인 조물자에 대한 믿음이 불가결할지 모른다. 그 믿음 위에서 화자의 관조와 객의 노래가 통했을 것이다. 주자와 유학, 근대 합리주의 정신이 놓친 것이 조물주에 대한 이 경외의 심성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보면 여전히 우리는 주자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