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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고 전시

하동에서의 전시가 진행되는 중 뜻밖에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진주지역 문화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여대표는 감사하게도 내 전시를 진주에서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때마침 진주문고 40주년을 기념하는 해여서 여러 전시가 기획되고 있는 터라 그 일환으로 전시로 7월 29일부터 8월 10일까지 진행되었다.

진주문고라는 큰 공간, 현대적 분위기의 전시실이 하동 빈산갤러리와는 또다른 느낌을 주었다. 고즈녁한 풍경이 없는 대신 서점과 연결되어 책을 보러오는 많은 사람들과 자연스레 만나는 장점이 크다. 박경리 작가를 좋아하는 90대 어르신도 만나고 20대 청년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박경리 선생과 내 어머니가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란 생각때문인지 특별한 친근함을 느꼈다. 진주여고(일신고녀)는 작년에 100주년을 맞았는데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의 하나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외우 이종민 교수와 김사인 시인이 우정출연해 주어 작가와의 대화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교수는 생각지도 않게 그동안 내가 간간히 쓰고 그린 작품들을 모아 ppt 로 참석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나를 ‘작가’ 처럼 대우해 주었다. 김사인 시인은 진솔하게 내 글씨 속에 담긴 정성을 읽어보라고 덧붙임으로써 내 격을 높였다. 박남준 시인, 한길사 김언호 대표도 자리를 함께 했고 지역의 문화계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진주와 마산의 누이 가족도 참석해 주어 감사했다. 다음날에는 정근식 교육감, 한경구 교수, 김시연 사장 등도 내려와 격려해 주었다. 마지막날엔 전 인제대 총장 성창모 박사가 힘든 발걸음을 해주었다.

온종일 진주문고를 중심으로 책과 사람과 문화의 연결이 신선하게 이루어지는걸 경이롭게 경험했다. 건강한 지역의 문화생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 단면을 본 느낌이다. 이 소중한 경험을 어떻게 기록해둘까 고민하던 중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의 글을 접했다. 과분한 평가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저런 정성과 노력이 진주문고 책방을 주목할만한 문화공간으로 만든 원동력이었으리라는 생각에 그의 글 일부를 옮긴다. 그 바램대로 간밤의 단비같은 시원함과 풍성함이 사회 곳곳에 가득하길 기원한다.

[박명규 서예전 2] – 진주문고 여태훈

하동 악양 빈산 갤러리에서 시작된 박명규 서예전이 진주에서 끝났다. 박경리 선생 탄생 100주년, 진주문고 창립 40주년 맞이 특별 기획이었다. 열흘간 전시된 작품은 수많은 갤러리의 탄성을 자아냈고 비치된 방명록 3권이 모자라게 감상평을 남겼다.

전시 이튿날 대담이 백미였다. 이종민 교수의 박학다식과 순발력 있는 진행, 박명규 작가의 막힘없는 술술 답변, 두 분을 오가며 빠진 것은 채우고 모자란 것은 살을 붙여 완벽한 보충을 해주신 김사인 시인. 2시간을 넘겨도 자리를 꽉 채운 독자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세분의 정담에 귀를 기울였다.

작가와의 만남 다음 날(7.31)엔 정근식 서울시 교육감이 전시장을 방문했다. 권순기 경남 교육감도 오셨다. 덕분에 경남과 서울시 교육을 책임지는 두 수장이 저희 서점에서 자리를 함께한 영광스러운 장면을 남기게 되었다. 두 분은 기꺼이 서점을 위한 응원과 모델을 자청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지필묵을 보고 연필보다 붓을 먼저 잡았다는 박명규 작가. 작품은 필법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단아하고 자유롭다. 칠순을 넘긴 노학자의 꼿꼿한 기상이 낡지 않았고, 오히려 현대적인데 캘리그라피와는 다른 질감을 보여준다.

전시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을 사연과 사람은 남았다. 책과 사람이 만나, 사람과 사람을 잇는 40살 책의 집에 기분 좋은 빚과 빛이 쌓여만 간다. 모처럼 간밤부터 시작된 단비가 지리산 자락에 내린다. 사납지 않은 순한 비가 메마른 대지를 흠뻑 적시고도 남아 섬진강을 채우고 남해로 잘 흘러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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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100주년 기념 서예전

6월 27일부터 7월 18일까지 개인 서예 전시회를 열었다.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전시로 “비오고 바람불고 눈오고”라는 표제로 하동의 작은 갤러리 빈산에서 열렸다. 5년 전 서울대에서 전시회를 한 적이 있고 간간히 작품 의뢰를 받기도 했지만 막상 ‘초대전’이나 ‘서예가’라 적힌 것을 보노라니 계면쩍음이 앞서지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설렘도 함께 느껴진다.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너른 벌판을 내다보는 언덕, 폐가를 갤러리로 만든 작지만 정겨운 전시장 – 최참판댁의 크고 웅장한 건물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전시장으로 올라오는 돌담길, 소박한 갤러리, 그 앞 마당의 감나무가 마치 토지속 평범한 농민들이 살던 현장에 와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박경리 선생도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과 시, 대담 중에서 마음에 와닿는 글들을 골라 만든 23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적절한 구도와 서체를 구상하느라 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쓸수록 모자람을 느끼고 아쉬웠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시도를 할 동기도 생겼다. 그 애씀 속에서 나름 아름다운 한글의 조형미를 제법 살렸다는 자부심도 가져보는 전시다. 김석영 님이 초한 갤러리 빈산의 “기획의 글”을 옮겨 적는다.

고난을 통해 피어나는 우주적 생명의 찬가 – 박명규 서예전에 부쳐

“사시장철 갠 날만 있다믄 그기이 어디 극락이겄나.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오는 그기이 땅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이치이드시 사람으 경우도 매한가지 이치일 기니…….” 소설 『토지』 속 윤보의 이 한마디는 박경리 작가가 평생을 통해 일궈온 ‘생명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 선생은 인간의 삶을 자연의 거대한 순리와 동일선상에 놓았다. 기쁨과 평화 같은 ‘갠 날’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닥치는 시련과 고난인 ‘비바람과 눈보라’ 역시 생태계를 유지하려는 ‘자연의 ‘순리이고 ‘우주의 섭리’라는 깨달음이다. 온 생명이 겪는 생로병사의 굴곡이 모두 천변만화의 날씨와 다를 바 없다. 당연히 ‘인간’이란 존재 또한 그러하다.

<박경리작가 탄생 100주년 특별기획전>의 다섯 번째 무대에 정헌靜軒 박명규 작가를 모셨다. 그는 평생을 한국사회사와 평화학 등을 탐구한 ‘사회학자’이자 연구 틈틈이 붓을 들고 묵향에 젖어 온 ‘서예가’이다. 박경리 선생의 문학을 사회사적으로 규명하려고 남다른 공을 들여 세상에 알린 이력이 있다. 문학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선생을 기리는 건 흔한 일이나 사회학자의 눈으로 선생의 문학과 사상을 조명하고, 그 정수를 길어내 그것도 외양간 갤러리에서 붓끝으로 재해석까지 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이번 무대가 오롯이 박경리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비영리 헌정전시>로 이뤄진다는 점 또한 특별하다.

작가는 박경리 선생의 글과 문장의 행간에 서린 생명사상을 붓끝에 실어 펼쳐내고 있다. 작가의 어머니와 선생이 진주 일신여고 동창인 인연으로 선생의 사상이 담긴 문장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다고 한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 흔쾌히 동참하고 혼신을 다해 작품을 준비한 까닭이다. 이십여 점의 작품에 작가가 기울인 공력이 다채롭게 스며있다. 작가의 글씨는 사회학자의 지성과 전통 서법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깊은 울림을 준다. 서법에 바탕을 두었으나 ‘선비풍의 글씨’에 머물지 않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한글 서체의 조형미’를 살려서 획의 강약과 농담, 그림의 자유로운 변용까지 나타내어 정갈하면서도 풍요롭기 그지없다.

작가는 “글기둥 하나 붙들고 예까지 왔네”라는 선생의 고백처럼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언어의 몸부림’을 ‘서예’라는 몸짓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했다.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우리 많이 살았다. 여한이 없제.”, “슬픔도 기쁨도 왜 그리 찬란한가”,“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 등과 같이 선생이 남긴 문장마다 서린 자연과 생명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이 작가의 필치에 실려 되살아난다. 작가가 비뚤배뚤 얽히고설켜 서로 기댄 듯 어울려 핀 민들레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씨 “험난한 로정, 아아 너는 피었구나”(「민들레」)를 보는데 왈칵 눈물이 솟는다. 아아. 이게 우리 ‘인간 존재의 모습’ 아닌가.

activities · life · 시공간 여행

북중국경을 지나며 – 시 한수

일주일에 걸친 북중국경지역 답사를 마치며 일행 중 한분이 한시를 한 수 지어보자 제안했다. 그에 응할 실력은 못되지만 해보고 싶은 마음은 동했다. 부친께서 생전에 어려운 한시작법이나 차운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한시를 지어도 좋지 않겠냐고 이를 한시 신체시 (新體詩)라 이름한 바 있었다. 그 생각에 기대어 느낀 바를 적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沿邊本意結兩岸 圖們橋上無人聲 (연변 지명의 본뜻은 양안을 잇는 것인데, 도문의 다리 위엔 오가는 사람이 없구나) // 欲對龍井先驅者 東洲古家變其義 (용정에서 선구자를 만나보려 하나, 윤동주 옛집은 그 뜻이 전같지 않네) // 天池風光如前秀 分界鐵線警笛高 (백두산 천지의 풍광은 여전히 빼어난데, 국경선 철망에선 경적소리가 시끄럽다) // 自遠方來卒本城 皇宮舊址盛雜草 (먼곳에서 애써 졸본성을 찾아 왔으나 왕궁의 옛터엔 잡초만 무성하구나) // 實見好太王碑文 懷憶千年古史蹟 (광개토왕비문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천년 옛 사적을 떠올리며 추억한다) // 五女山傳朱夢業 誰言此地高句麗 (오녀산은 주몽의 건국위업을 전하고 있지만, 오늘 누가 이 땅을 고구려라 칭할 것인가) // 鴨綠江上望義州 默念恨別已百年 (압록강 위에서 신의주를 바라보며 한스럽게 나뉘어진지 어언 백년임을 생각한다) // 難免悲感世上事 豈不待後靑年起 (세상사 비감함을 누를 길 없으니 어찌 후대 청년들 일어나길 기다리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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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접경지대 답사 – 압록강 유역

다시 긴 시간을 달려 단동에 도착했다.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신의주 풍경의 변화가 우선 눈길을 끌었다. 고층건물이 꽤 들어섰고 붉고 둥근 랜드마크 건물이 또렷하다. 카지노장으로 알려져 있다는데 아직 개장은 안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위화도에는 최근에 완공된 깔끔한 고층건물들이 십수개 동 연이어 들어섰다. 자체적으로 역동적인 생활공간이 될 곳은 아닌 듯 하지만 북한 내부에도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현장으로 다가왔다.

단동시의 압록강변은 매우 활발하고 역동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신의주와의 연계와는 무관하게 중국측의 발전이 추동한 결과로 보인다. 중국인들의 국내관광이 활발해지면서 이곳도 주요한 대상지가 되고 있다는데 조선족이 주도하는 음식문화,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K-Culture, 변경지에서의 독특한 분위기 등이 여행을 자극하는 요인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압록강변 넓은 지역을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강 건너 북한은 그다지 관심거리가 아닌 듯 했다.

단동은 중국의 역사해석, 정치교육의 현장으로 그 중요성이 더 커지는 모습이다. 두만강변에서도 그런 모습이 뚜렷했지만 6.25때 끊어진 압록강철교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 단동은 더욱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전에 비해 ’항미원조전쟁‘에 대한 설명과 사진자료들이 더 분명해졌고 이곳을 ‘항미원조전쟁출정지’로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기념품점에도 ’항미원조‘를 테마로 한 물건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런 경향은 동북지방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경향이라 하겠다. 관광과 역사와 정치가 중화주의 세계관을 매개로 곳곳에서 정교하게 결합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압록강변의 백화점과 상점들은 불야성처럼 밝고 ’한조(韓朝)상점‘이란 상호도 눈에 띄었지만 남북한과 중국을 한데 잇는 변경도시로서의 역할은 제한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 모습이다. 십여년 전에 북한과 중국을 잇는 신압록강대교가 거의 완공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기대감을 가졌었다. 북중간 경제가 활발해지고 한국과의 관계도 강화될 것을 기대하여 인근지역에 부동산 개발붐이 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완공 이후 북한측 연결부분 공사미진으로 오랫동안 개통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니 아직은 정중동이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단동철교에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컨테이너 화물차량이 줄을 이어 서 있어 어떤 부분에서는 유의미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저 물동량의 변화가 얼마나 지속적일지, 인적 교류로 어느 정도 발전할지 앞으로 지켜볼 일이겠다. 북한이 적대적 2국가론을 내세우고 러시아와의 관계가 현저히 가까워진 이후 북중간 협력이 어느 정도 진행될지는 예측하기 쉽지 않다. 다만 향후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중국 관계의 중대한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고 그럴수록 이 지역은 또다시 주목 받을 것이다. 때마침 북한에서 신압록대교 개통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보인다는 뉴스도 접했고 북미대화의 가능성도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반도가 어떻게 안정과 평화를 제도화하고 궁극적 통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배전의 지혜와 숙고가 필요한 때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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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접경지역 답사 -고구려 유적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온 후 서쪽으로 달려 집안에 도착했다. 압록강변 고구려의 옛 도읍이 있던 곳이다. 십여년 전 서울대 교수들과 실크로드 답사를 하면서 서안의 둔황고굴을 들린 후 티벳 방문이 무산되어 대신 이곳을 왔던 적이 있다. 그 때에 비해선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호텔시설도 꽤 좋아져 오는 길이 훨씬 편해졌다. 이곳의 압록강은 강폭이 넓지 않고 북한의 만포시와 연결되어 있지만 변경지대로서의 특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곳은 고구려 역사와 관련한 고대사의 주요 현장이다. 주몽이 졸본성에 나라를 세운 후 두 번째 도읍을 세운 국내성이 있던 곳이 집안이다. 시내에 성곽의 일부가 남아있고 호텔 앞을 흐르는 훈강이 비류수로 비정된다 한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환도산성에는 건물들이 있던 주춧돌이 발굴되고 성곽의 일부가 남아있어’고구려왕성지‘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위용을 체감하기에는 유적이 너무 소략했다.

그 아쉬움은 통구고분군 앞에서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이 일대에 고구려 무덤은 만여기 이상 존재한다는데 실제 전기차를 타고 돌아보아야 할 정도로 넓은 지역에 수많은 무덤들이 빼곡하다. 일대는 ’고구려고묘박물관‘이라는 야외전시관으로 단장되어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의 세력이 왕성했음을 느끼기엔 충분하지만, 무덤만 남아있고 다른 유적은 거의 사리진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고구려의 역사적 존재감은 역시 광개토대왕비에서 명료해진다. 호태왕비라 적힌, 6미터를 훨씬 넘는 거대한 비석이 주는 압도감은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1775자가 또렷한 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은 육안으로 읽을 수 있다. 글씨와 석각이 모두 뛰어나 비문의 탁본 자체가 예술품 같다. 동북아 고대사를 실물로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인데 일부 글자가 보이지 않고 그 해석을 둘러싸고 한중일 학계의 논란도 뜨겁다. 이어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을 들러 석실 내부까지 둘러보았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일컬어지는 장수왕릉은 잘 단장되어 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이전에 비해 감동이 덜한 느낌이었다.

다음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졸본성이 있던 오녀산성으로 향했다. 평지에서 바라보는 오녀산은 천혜의 낭떠라지로 둘러쳐진 높은 곳으로 수성에는 유리한 지형임은 한눈에도 분명해 보였다. 입구에는 ”고구려시조비”라는 큰 돌비석이 서 있고 주몽의 건국을 알라는 안내문이 서있다. 천여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산성과 주거지터, 제사터 동이 있다. 최근에 건립되었다는 말을 탄 주몽의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천여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하는 입구에 이곳 역사를 기록한 돌비가 시기별로 서 있다. “기원전 37년 북부여 왕자 주몽이 졸본천 (지금의 환인)에 정착, 고구려국을 세웠다” ”기원전 34년 주몽이 부족에게 명하여 학령에 왕성을 축성하게 했다 (지금의 오녀산성)“ ”기원전 19년 9월 태자 유리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 2대왕 유리명왕이 되었다“ ”기원후 32년 12월 한나라 광무제가 구려후를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기원후 167년에서 619년까지 신대왕 영류왕 등 9왕이 졸본천으로 가 시조묘에 제사하다“ ”기원후 2004년 7월 오녀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네번째 돌비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졌다.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정권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는 중대한 내용이었다. 중국의 후한서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한국의 삼국사기와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후한서는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고구려가 한나라에 조공을 바친 후 제후국으로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고 오녀산성의 네 번째 돌비는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소급하여 해석하면 주몽도, 유리왕도, 고구려 벽화나 고분군도 결국 중국제국, 중화문명의 한 부분으로 설명될 소지가 강해질 것은 분명하다.

역사를 흔히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 등으로 구분하지만, 현실에서 고대사가 가장 치열한 정치적 논란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동지방의 오랜 갈등의 뿌리에는 종교적 성지를 둘러싼 대립이 놓여있고 그것은 다시 고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에 맣닿아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미래를 내다볼 때 이 지역의 고대사가 어떻게 재구성되고 현재화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다. 고구려 유적지를 단지 흘러간 과거사로 바라보지 못하는 염려가 마음 한켠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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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국경지역 답사 – 두만강 유역

일주일간 북중국경지대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이 준비한 여행에 합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뜻깊은 여행을 했다. 두만강 동쪽 끝 방천에서 시작하여 도문, 연변, 용정, 송강하, 통화, 집안, 환인, 압록강 끝 단동을 거쳐 심양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삼십여년간 여러 차례 오고간 곳인데 최근의 변화가 생각보다 크고 생소한 장면들이 적지 않았다. 놀라움과 안타까움, 기대와 우려가 혼재하는 이중적 감정이 시종 떠나지 않았다.

연길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친 후 곧장 북중러 삼국의 국경지대인 방천으로 향했다. 두만강변의 모습은 예와 다름없었지만 국경 철조망은 더 새로워진 듯 했다. 훈춘 지역에 웅장한 세관건물이 세워져 있지만 아직 물류의 이동은 활발하지 않다 한다. 방천에는 9층 건물이 들어서 북중러 국경을 조망할 수 있었는데 발해문명의 고장임을 알리는 간판과 함께 “애국주의가 곧 중화민족의 민족심이자 민족혼“이라는 큰 표어가 걸려있다.

이튿날 아침 가본 도문의 다리는 이제 사람이 오가지 못한다. 대신 그 아래 ’두만강 나루터‘가 새로운 조망공간으로 변모했고 ‘성수동 까페‘라 이름한 대형 찻집이 관광객을 부르고 있었다. 피아노를 둔 서양식 인테리어와 서울 성수동이란 브랜드가 이곳까지 진출한 것이 놀라왔지만 전반적으로 도문의 외지고 낙후한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91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감흥을 잊지 못하는 나로서는 저 다리가 사람들로 북적일 날이 언제 올까 궁금했다.

새로이 건립된 연변박물관을 들러 보았다. 규모나 전시내용, 설명방식 등에서 그 수준이 놀라왔다. 연변 정도의 지방도시에 이처럼 거대한 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문화정책이 얼마나 조밀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컨텐츠의 서사가 정책적으로 체계화되는데 따르는 문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족을 비롯한 소수민족 고유의 문화와 역사적 역할은 그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중화민족‘의 다문화적 성격을 강조하는 기조가 뚜렷하다.. 만주지역을 개척해온 조선족의 활약상이 ’생산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 것도 같은 맥락일 터이다.

용정을 지나는데 가이드가 박경리 ‘토지’ 이야기를 했다. 이곳이 토지 2부의 주무대였기 때문인데 얼마전 끝낸 박경리 기념 서예전 생각이 났다. 그러고보니 하동 평사리와 진주에서의 전시를 끝내고 이곳 만주지역을 오게 된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사의 맥락에서 용정의 일송정, 명동촌 명동학교, 민족시인 윤동주를 떠올리는 기억은 점차 약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화민족의 역사서술이란 큰 틀 속에 조선족의 역할을 배치시키는 유적의 재해석 작업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 등정은 언제나 이 지역 여행의 핵심이다. 이전에 천지를 세번 올랐었지만 남파로 올라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송강하의 리조트에서 새벽 6시에 길을 나섰는데 북파나 서파에 비해 남파는 하루에 입장가능한 사람수를 훨씬 적게 제한한다고 한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별로 혼잡하지 않았고 큰 기다림 없이 13인용 승합차를 탈 수 있었다. 천지로 올라가는 길 바로 옆으로 북중 국경선을 알리는 철책이 길게 이어져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이십여분 동안에도 기상은 시시각각 변해 긴장하게 했지만 마침내 정상에서 파란 하늘과 툭트인 천지를 만났다. 과연 장관이었고 북파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수많은 인파로 자리다툼을 해야 했던 이전과는 달리 여유롭게 천지를 조망할 수 있어서 특히 좋았다. 전망 좋은 곳은 돈을 내고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이곳에서 돈을 아낄 사람은 없지 싶었다. 천지의 사진을 걸어두고 답답한 일상과 숨막히는 더위에도 가능하면 푸른 하늘과 파란 물빛을 잊지말고 지내자 마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