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7일부터 7월 18일까지 개인 서예 전시회를 열었다.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전시로 “비오고 바람불고 눈오고”라는 표제로 하동의 작은 갤러리 빈산에서 열렸다. 5년 전 서울대에서 전시회를 한 적이 있고 간간히 작품 의뢰를 받기도 했지만 막상 ‘초대전’이나 ‘서예가’라 적힌 것을 보노라니 계면쩍음이 앞서지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설렘도 함께 느껴진다.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너른 벌판을 내다보는 언덕, 폐가를 갤러리로 만든 작지만 정겨운 전시장 – 최참판댁의 크고 웅장한 건물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전시장으로 올라오는 돌담길, 소박한 갤러리, 그 앞 마당의 감나무가 마치 토지속 평범한 농민들이 살던 현장에 와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박경리 선생도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과 시, 대담 중에서 마음에 와닿는 글들을 골라 만든 23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적절한 구도와 서체를 구상하느라 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쓸수록 모자람을 느끼고 아쉬웠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시도를 할 동기도 생겼다. 그 애씀 속에서 나름 아름다운 한글의 조형미를 제법 살렸다는 자부심도 가져보는 전시다. 김석영 님이 초한 갤러리 빈산의 “기획의 글”을 옮겨 적는다.
고난을 통해 피어나는 우주적 생명의 찬가 – 박명규 서예전에 부쳐
“사시장철 갠 날만 있다믄 그기이 어디 극락이겄나.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오는 그기이 땅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이치이드시 사람으 경우도 매한가지 이치일 기니…….” 소설 『토지』 속 윤보의 이 한마디는 박경리 작가가 평생을 통해 일궈온 ‘생명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 선생은 인간의 삶을 자연의 거대한 순리와 동일선상에 놓았다. 기쁨과 평화 같은 ‘갠 날’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닥치는 시련과 고난인 ‘비바람과 눈보라’ 역시 생태계를 유지하려는 ‘자연의 ‘순리이고 ‘우주의 섭리’라는 깨달음이다. 온 생명이 겪는 생로병사의 굴곡이 모두 천변만화의 날씨와 다를 바 없다. 당연히 ‘인간’이란 존재 또한 그러하다.
<박경리작가 탄생 100주년 특별기획전>의 다섯 번째 무대에 정헌靜軒 박명규 작가를 모셨다. 그는 평생을 한국사회사와 평화학 등을 탐구한 ‘사회학자’이자 연구 틈틈이 붓을 들고 묵향에 젖어 온 ‘서예가’이다. 박경리 선생의 문학을 사회사적으로 규명하려고 남다른 공을 들여 세상에 알린 이력이 있다. 문학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선생을 기리는 건 흔한 일이나 사회학자의 눈으로 선생의 문학과 사상을 조명하고, 그 정수를 길어내 그것도 외양간 갤러리에서 붓끝으로 재해석까지 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이번 무대가 오롯이 박경리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비영리 헌정전시>로 이뤄진다는 점 또한 특별하다.
작가는 박경리 선생의 글과 문장의 행간에 서린 생명사상을 붓끝에 실어 펼쳐내고 있다. 작가의 어머니와 선생이 진주 일신여고 동창인 인연으로 선생의 사상이 담긴 문장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다고 한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 흔쾌히 동참하고 혼신을 다해 작품을 준비한 까닭이다. 이십여 점의 작품에 작가가 기울인 공력이 다채롭게 스며있다. 작가의 글씨는 사회학자의 지성과 전통 서법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깊은 울림을 준다. 서법에 바탕을 두었으나 ‘선비풍의 글씨’에 머물지 않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한글 서체의 조형미’를 살려서 획의 강약과 농담, 그림의 자유로운 변용까지 나타내어 정갈하면서도 풍요롭기 그지없다.
작가는 “글기둥 하나 붙들고 예까지 왔네”라는 선생의 고백처럼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언어의 몸부림’을 ‘서예’라는 몸짓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했다.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우리 많이 살았다. 여한이 없제.”, “슬픔도 기쁨도 왜 그리 찬란한가”,“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 등과 같이 선생이 남긴 문장마다 서린 자연과 생명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이 작가의 필치에 실려 되살아난다. 작가가 비뚤배뚤 얽히고설켜 서로 기댄 듯 어울려 핀 민들레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씨 “험난한 로정, 아아 너는 피었구나”(「민들레」)를 보는데 왈칵 눈물이 솟는다. 아아. 이게 우리 ‘인간 존재의 모습’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