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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가 된 유네스코

장성의 필암서원을 다녀왔다. 입구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이란 간판이 우뚝하다. 서원 내 마루에는 오드레 아즐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서명이 담긴 “서원, 한국의 성리학 교육기관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한다”는 확인서가 걸려있다. 2019년 이곳을 비롯하여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등 9곳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년 전에는 통도사, 부석사 등 한국의 전통사찰 7곳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이들 산사 에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는 자랑스레 세워져있다. 한국 유교와 불교의 유산이 모두 유네스코로 인해 세계적 유산임을 공인 받은 셈이라 할 수 있겠다.

유네스코 표지판은 그 자체 문화 브랜드다. 조선왕조실록이나 KBS 이산가족찾기 자료의 가치는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사실로 설명되곤 한다. 아리랑이나 판소리, 종묘제례약의 품격 역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이란 해설로 뒷받침된다. 지방정부들이 앞을 다투어 자기 지역의 유무형 문화유산의 가치를 확인받고자 유네스코 문을 두드린다. 집 가까이 있는 고등학교 교문에는 ‘유네스코 협력학교’란 간판이 걸려있다. 대학입시 부담이 강한 한국에서 유네스코가 표방하는 지속가능교육의 가치들이 실제로 학교현장에 얼마나 비중있게 반영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학교의 자긍심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네스코가 이런 브랜드 파워를 갖게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다른 어떤 국제기구도 갖지 못한 유네스코만이 지닌 문화적 영향력이다. 그런만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국가적 관심사가 되고 문화다양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든든한 기반이 된다. 하지만 일본의 군함도 유적 소개와 사도광산 등재추천에서 식민지 역사경험을 배제하려는 시도, 중화민족의 문화력을 확인하려는 자국주의 기획이 고조되는 중국의 문화공정에서 보듯 아직은 인류보편의 역사이해보다 국가주의적 역사해석에 더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문화가 상품이 되고 팩트보다 상상력이 힘을 얻는 시대가 될수록 관광자원을 위해 과거유산을 침소봉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쉽다.

조용한 산사나 서원 앞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란 표지판을 보는 사람들이 떠올리는 생각은 무엇일까? 민족적 자부심? 관광자원의 우수함? 지역적 정체성? 유네스코의 정신은 이런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권의 자긍심과 무형예술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인류보편의 지적 도덕적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다. 과연 21세기에 저 브랜드가 그런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관건은 유네스코가 확보한 이 독특한 브랜드 파워를 새로운 지구적 문화실천과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혁명으로 삶의 전 영역이 크게 변하는 시대에 과거보다는 미래, 자랑보다는 책임, 지역보다 인류를 표상하는 형태로 유네스코 브랜드 파워가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필암서원 앞에서 일본의 군함도, 중국의 문화공정이 떠올라 유네스코라는 멋진 브랜드 파워와 인류평화란 미래과제에 대해 갖게된 생각의 한 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