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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광야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깊은 감회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광대한 에메랄드빛 호수와 깍아지른 봉우리의 장관이 주는 호쾌함에 우선 놀라지만 백두란 말에 담긴 어떤 미묘한 정서가 마음 속에서 뭉클 솟아나는 걸 누구라도 느끼게 된다. 오랜 한반도 민족사에 얽힌 서사들을 떠올리고 이곳을 성산으로 숭배하던 사람들이 오늘 우리의 선조였고 현재까지 이어진 공동체의 바탕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천지 앞에 서서 눈앞의 현실에 일희일비하고 노심초사해온 그간의 삶을 되돌아본다. 긴 시간의 흐름과 장대한 만주벌판을 생각하며 우리는 망망대해로 흐르는 한 작은 물줄기에 다름없다는 겸손한 생각도 하게 된다. 오랜동안 풍화로 흘러내린 암석류, 완만히 펼쳐진 고산지대의 능선, 그 사이에 핀 이름모를 야생화, 매순간 변화하는 구름과 기상이 자연 본래의 위엄, 원시적인 것의 숭고함을 깨닫게 한다. 여러 면에서 천지에 오르는 것은 구도자의 여정과 닮아있다.

다행히 천지는 쾌청한 날씨 덕에 유난히 푸르고 아름다왔다. 내 사진을 본 한 지인이 북파의 천지가 남성적인데 비해 남파의 천지는 여성적이라 평했다.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나는 이곳에서 이육사의 시 ‘광야’를 떠올렸다. 육사도 저 시를 쓸 때 이 백두의 장엄한 위용을 생각했을 것 같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모든 산맥이 바다를 연모해 휘둘릴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을 땅,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 지면서 새로운 길이 난 곳, 장차 백마탄 초인이 와서 새로운 꿈을 이루게 할 약속의 공간을 ‘광야’라 이름했던 것이리라.

​천지의 모습과 함께 육사의 광야를 전지 한장에 썼다. 아름다운 천지보다 원시적인 천지, 산과 강이 생기기 전 태초의 이미지를 그리고 싶었다. 글씨도 가급적 그 분위기에 맞는 서체로 구상했다. ‘우리가 바라는 우리’라는 테마로 통일과나눔 재단이 광화문에 문화행사를 연다고 해서 그곳에 이 작품을 걸기로 했다. 지진과 홍수와 전쟁과 갈등으로 세상은 한층 더 격랑을 만날 듯 싶고 한반도에도 긴장과 불신의 벽이 점점 높아가는데 우리는 통일의 미래를 어떻게 꿈꾸어야 할까? 백마탄 초인이 올 때를 기다려야 할까?그 때가 오기는 할까?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 마음의 본질은 간절한 희망일 터, 가난하지만 부지런히 노래의 씨를 뿌리는 일은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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