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온 후 서쪽으로 달려 집안에 도착했다. 압록강변 고구려의 옛 도읍이 있던 곳이다. 십여년 전 서울대 교수들과 실크로드 답사를 하면서 서안의 둔황고굴을 들린 후 티벳 방문이 무산되어 대신 이곳을 왔던 적이 있다. 그 때에 비해선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호텔시설도 꽤 좋아져 오는 길이 훨씬 편해졌다. 이곳의 압록강은 강폭이 넓지 않고 북한의 만포시와 연결되어 있지만 변경지대로서의 특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곳은 고구려 역사와 관련한 고대사의 주요 현장이다. 주몽이 졸본성에 나라를 세운 후 두 번째 도읍을 세운 국내성이 있던 곳이 집안이다. 시내에 성곽의 일부가 남아있고 호텔 앞을 흐르는 훈강이 비류수로 비정된다 한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환도산성에는 건물들이 있던 주춧돌이 발굴되고 성곽의 일부가 남아있어’고구려왕성지‘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위용을 체감하기에는 유적이 너무 소략했다.
그 아쉬움은 통구고분군 앞에서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이 일대에 고구려 무덤은 만여기 이상 존재한다는데 실제 전기차를 타고 돌아보아야 할 정도로 넓은 지역에 수많은 무덤들이 빼곡하다. 일대는 ’고구려고묘박물관‘이라는 야외전시관으로 단장되어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의 세력이 왕성했음을 느끼기엔 충분하지만, 무덤만 남아있고 다른 유적은 거의 사리진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고구려의 역사적 존재감은 역시 광개토대왕비에서 명료해진다. 호태왕비라 적힌, 6미터를 훨씬 넘는 거대한 비석이 주는 압도감은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1775자가 또렷한 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은 육안으로 읽을 수 있다. 글씨와 석각이 모두 뛰어나 비문의 탁본 자체가 예술품 같다. 동북아 고대사를 실물로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인데 일부 글자가 보이지 않고 그 해석을 둘러싸고 한중일 학계의 논란도 뜨겁다. 이어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을 들러 석실 내부까지 둘러보았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일컬어지는 장수왕릉은 잘 단장되어 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이전에 비해 감동이 덜한 느낌이었다.
다음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졸본성이 있던 오녀산성으로 향했다. 평지에서 바라보는 오녀산은 천혜의 낭떠라지로 둘러쳐진 높은 곳으로 수성에는 유리한 지형임은 한눈에도 분명해 보였다. 입구에는 ”고구려시조비”라는 큰 돌비석이 서 있고 주몽의 건국을 알라는 안내문이 서있다. 천여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산성과 주거지터, 제사터 동이 있다. 최근에 건립되었다는 말을 탄 주몽의 동상까지 세워져 있다.
천여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하는 입구에 이곳 역사를 기록한 돌비가 시기별로 서 있다. “기원전 37년 북부여 왕자 주몽이 졸본천 (지금의 환인)에 정착, 고구려국을 세웠다” ”기원전 34년 주몽이 부족에게 명하여 학령에 왕성을 축성하게 했다 (지금의 오녀산성)“ ”기원전 19년 9월 태자 유리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 2대왕 유리명왕이 되었다“ ”기원후 32년 12월 한나라 광무제가 구려후를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기원후 167년에서 619년까지 신대왕 영류왕 등 9왕이 졸본천으로 가 시조묘에 제사하다“ ”기원후 2004년 7월 오녀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네번째 돌비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졌다.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정권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는 중대한 내용이었다. 중국의 후한서 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한국의 삼국사기와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후한서는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고구려가 한나라에 조공을 바친 후 제후국으로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고 오녀산성의 네 번째 돌비는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소급하여 해석하면 주몽도, 유리왕도, 고구려 벽화나 고분군도 결국 중국제국, 중화문명의 한 부분으로 설명될 소지가 강해질 것은 분명하다.
역사를 흔히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 등으로 구분하지만, 현실에서 고대사가 가장 치열한 정치적 논란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동지방의 오랜 갈등의 뿌리에는 종교적 성지를 둘러싼 대립이 놓여있고 그것은 다시 고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에 맣닿아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미래를 내다볼 때 이 지역의 고대사가 어떻게 재구성되고 현재화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다. 고구려 유적지를 단지 흘러간 과거사로 바라보지 못하는 염려가 마음 한켠에 자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