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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국가관계’의 미래

북한이 새해 벽두에 남북관계를 더 이상 동족관계가 아닌 교전상태에 있는 적대적 국가관계로 규정한다는 입장표명을 한 이래 그 후속조치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13일 조선중앙통신은 “대남 정책 전환 방침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대적 부문 일군(간부)들의 궐기 모임이 12일에 진행됐다”고 보도하면서 이 모임에서는 “북남관계 개선과 평화통일을 위한 연대기구로 내왔던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민족화해협의회, 단군민족통일협의회 등 우리 관련 단체들을 모두 정리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들은 북한의 대남 파트를 담당하는 외곽기구로 주로 남측과 민간 교류에서 역할을 해왔다.

‘특수관계론’에 근거한 남북관계를 일종의 국가관계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리 사회에서도 꽤 제기되었다. 북한 역시 실질적으로 두 국가론으로 전환해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지도 제법 되었다. 나도 남북한을 두 ‘분단국가’ 관계로 재정립함으로써 특수관계라는 규정과 남북연합이라는 중간단계를 새로운 틀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북한의 이번 결정은 경제난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남한에서 ‘자유민주주의’ 통일론이 부각되는 데 대한 방어적 대응일 수 있다. 하지만 핵을 보유한 군사강국으로서의 자신감에 기초한 공격적이고 전략적인 방향전환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북한의 속셈과 지향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지만 남한을 적대적 대상으로 규정하고 군사적 정복의지까지 내비친 현재로서는 ‘평화공존형 2국가’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민족관계를 부정하면서 통일의 정당성이나 필요성을 어떻게 정립할지를 놓고 북한에서도 논리적, 전략적 재조정이 뒤따를 것이다.

남북관계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뉴스인데 정작 국내 언론에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북의 말폭탄과 위협이 어제오늘이 아닌 상황에서 이런 무덤덤함이 우리 사회의 힘이기도 하고 일상의 안정을 지켜주는 조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심대한 상황변화가 진행되는데 눈앞의 권력투쟁과 손익계산에만 골몰하는 한국 정치와 사회의 민낯을 보는 느낌도 없지 않다. 항간에 해방직후 상황에 빗댄 염려도 등장하지만 여전히 국내 정파의 대립과 이해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지구적 흐름에 대한 총체적 시야가 아쉬운 감이 크다. 이런 가운데 [38 North]에 일주일 간격으로 해외 전문가들의 논평이 실렸다. 이 글의 일부 내용은 부분적으로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을 정확히 확인하고 싶어 정독을 했다. 한반도 문제에 오랜 경험과 식견을 가진 해외 전문가들의 분석인데 이 사안을 무겁고 진지하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로버트 칼린과 지크프리드 해커 두 분이 쓴 ‘김정은은 전쟁을 준비하는가?’라는 글은 현재 한반도 상황이 매우 위태로운 상태로 이행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논지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김정은은 전쟁을 선택하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을 수 있다 / 현 한반도는 ‘북한의 도발’이라는 상투적 용어로 설명할 수 없는 위험한 상태다 / 북한이 체제소멸을 감수하면서 전쟁을 할 리 없다는 믿음은 심각한 상황판단 오류다 / 2021년 이후 김정은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포기하고 다시 중,러와의 연대로 전환했다 / 북한은 세계적 조류가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한다 / 필요시 북한은 핵을 사용할 것이고, 현재의 핵탄두 숫자만으로도 가공할 재앙으로 귀결될 것이다.”

일주일 뒤에 유럽의 북한전문가 뢰디거 프랭크 교수의 글이 올라왔다. ‘북한의 새로운 통일정책’이란 제목에서 보듯 국제 지정학적 관점보다는 남북관계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 글이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 민족관계가 아닌 적대국가 관계라는 규정은 ‘우리민족끼리’ 노선의 포기를 의미한다 / 1972년의 김일성의 조국통일 3대 원칙 이래의 반세기 전략을 실패로 규정함으로써 선대로부터의 유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 동독이 걸었던 길과 유사한 변화가 예상되는데 북한의 광범위한 위험회피 전략과 연결될 것이다 / 통일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보다 공격적인 노선으로 변화할 것이다 / 한국이 민족공동체론을 독점함으로써 골든 타임을 맞이할 수 있다/ 한국내 진보세력은 타격을 입을 것이고 보수세력이 힘을 가능성이 있다”

이 두 글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안팎의 위험과 쟁점을 잘 보여준다. 칼린과 해커의 분석은 새로운 안보위기, 평화유지의 절박함을 부각시킨다. 북한이 세계정세의 변화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전략적 선택지로 결정했을 수 있다는 분석은 경청해야 마땅하다. 지구촌 곳곳에 전쟁이 진행중이거나 무력충돌의 위기가 높아지고 미국의 세계경찰 역할은 현저히 위축되는 가운데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현실은 더더욱 이런 가능성을 주목하게 만든다. 프랭크의 글은 칼린과 해커의 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쟁의 위험보다 한반도 정치지형에 미칠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민족공동체라는 공유자산이 없어짐으로써 갈등과 긴장이 더 높아질 가능성을 지적한다. 우리사회 진보/보수의 이념지형에 미칠 영향도 중요한 논점이다. 북한 도발에 대한 상투적인 대응이나 설마 하는 오랜 관성적 사고로부터 벗어나 위기관리와 평화유지를 위한 진지한 새 전략구축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