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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대전환?

새해 첫날 북한 발 뉴스가 충격적이다. 매번 신년사 형태로 자신들의 정책기조를 설명해 온 북한이지만 이번의 뉴스는 남북관계의 근간과 관련된 것이어서 그 무게감이 예사롭지 않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1일 조선중앙통신은 12월 26~30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9차 전원회의 결과와 함께 김정은 총비서가 한 말을 전했다. “북남(남북) 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는 것이 그 골조다.

‘체제는 다르지만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공동체’라는 것이 지난 30여년간 남북관계를 규정해온 큰 틀이다.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이 시각을 공유했기 때문에 여러 협력과 소통이 가능했다. 북한의 핵개발이 본격화하고 국제적 대북제제가 강화되면서 이 정책은 지속불가능하게 되었다. 개성공단 폐쇄는 정경분리 방식의 대북정책이 불가능함을 분명히 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특수관계론과 민족공동체론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보수 진보 정권을 막론하고 남북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화해나 대화에 대한 기대와 통일지향성에 대한 믿음을 견지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의 언설이 정제되지 않고 위협적인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남북관계를 ‘교전국 관계’로 규정하겠다는 언급은 단순한 레토릭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핵무력 군사강국으로서 앞으로 다가올 지구적 지형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북한 나름의 전략적 방향설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재조정과 함께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언급한 것도 그간의 외톨이 전략, 농성체제 차원을 벗어나 ‘군사국가’로서의 존재감을 분명히 하려는 뜻이 읽혀진다. 어쩌면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되고 지구적 지정학의 큰 변화가 일어날 경우를 내다본 계산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한반도 차원에서는 우려스럽고 위험한 방향설정이 아닐 수 없다.

남북관계는 세가지 차원으로 규정되는 삼중구조다. 민족관계, 적대관계, 국가관계의 세 영역이 중층적으로 겹쳐 있어 때로는 ‘동포’이지만 때로는 ‘적 ‘이 되고 때로는 ‘외국’으로 대해야 하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다. 통일부, 국방부, 외교부의 역할이 그 각각의 기능에 부응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세 측면을 어떻게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관리하는가가 미래의 핵심 과제다. 분단 70년을 지나면서 점차 민족관계 (통일부)의 비중이 축소되고 국가관계 (외교부)의 비중이 커질 것은 예상되는 바였고 오늘 국민들의 여론에서도 그런 경향은 뚜렷이 확인된다. 다만 장구한 역사성을 지닌 민족관계는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강력한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남북한의 통합과 신뢰를 뒷받침할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이번 김정은의 발언은 ‘민족공동체’라는 남북간 공통분모를 부정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말로 보수집단이나 진보세력을 막론하고 남한을 통째로 타자화하려는 의지가 읽힌다. “우리(북)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외세와 야합해 ‘정권 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리는 족속들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라는 말에는 그동안의 남북협력기조나 통일지향노력을 전략적 오류로 규정하려는 단호함도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입장이 얼마나 공고하게 전략적 원칙으로 자리잡을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천여년을 지나온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특징에 기초한 한반도의 에쓰니적 요소, 민족감정은 지속적으로 약화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적대적 국가관계론과 함께 김일성주의에 기초한 주체민족론을 더욱 극단적으로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주체사상이나 백두혈통의 수령지위을 절대적으로 강화하려면 그 뿌리인 항일투쟁 민족정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족공동체를 부정할 경우 통일이란 목표는 물론이고 남한 사정에 대한 발언권을 주장할 근거도 찾기 어렵다. 예상컨대 한국의 식민지성, 미국예속의 반민족 체제라는 이념적 공세와 정서적 거부감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그 결과는 남북관계를 전례없이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갈 수 있고 원치 않는 군사충돌의 개연성도 커질 수 있어서 우려를 더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와 결부된 북한의 강한 반외세 민족론이 한국전쟁의 참상을 야기했던 아픈 경험이 있는 우리로서는 북한의 이번 발표를 엄중한 변화로 인식하고 종합적인 대처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정치권과 전문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국민들에게도…. 갑진년이 의외로 무겁고 어둡게 시작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