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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기억

지인 한분이 카톡방에 이육사의 청포도 시를 올려놓았다.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첫 문장은 매우 익숙하지만 실제 7월이라는 날짜와 연관지어 이 시를 떠올려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글을 접하는 순간 아 7월이구나 하는 생각이 확 다가왔다. 이육사라는 시인이나 청포도라는 이미지보다 특정한 날짜가 더 눈에 뜨인 것은 정년 이후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실감하기 때문일 듯 싶다. 새해를 맞이한지 어제 같은데 벌써 전반이 지났고 휴식시간을 갖지도 못한 채 후반전이 시작되었구나 하는 놀람이라고나 할까.

언론과 페북에도 7월과 관련된 이런 저런 글들이 올라온다. 대체로 이 달에 있었던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그 때의 일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7.4 공동성명, 7.7. 선언, 7.17 제헌절, 7.27 정전협정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 날짜에는 더욱 관심들이 높아질 것이다. 사실 과거 7월에 일어난 일들이라고 굳이 7월에 상기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한 방식이기 때문에 달력의 절기에 따라 특정일을 기념하는 것이 관행이 된 것이다. 이 기념행위에는 현재의 문제의식과 세계관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 밖에 없어 7.4 나 7.7에 대한 평가는 박정희 시대와 노태우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또 시대적으로도 달라지는데 남북관계가 진전되던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평가는 크게 다르다. 2023년에 7.4 와 7.7 의 의미는 어떻게 읽혀질지, 정파적 차이는 어느 정도일지 궁금한데 북한이 핵무력을 강조하고 대남공세에 주력하며 신냉전이라 불릴 정도로 미중간 패권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을 고려하면 전과 같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반면에 7.17과 7.27에 대한 기억의 정치는 오히려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7월 17일은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제헌절이다. 건국에 대한 충분한 준비없이 해방을 맞이했던 신생 국이 그 혼돈의 와중에서 잘 정비된 헌법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세계사적으로도 그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대원칙을 표방한 헌정체계 덕택에 분단과 전쟁, 각종 대립과 격동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고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 역사적 의미로만 따지면 ‘나씨옹’이라는 헌법적 범주 위에 근대국가를 탄생시켰던 프랑스 혁명에 비견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이 헌법적 가치가 한반도 이남에만 한정됨으로써 남북한 전체를 아우르는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북한은 전혀 이질적인 이념에 따라 수령체제를 뒷받침하는 독특한 헌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제헌절과는 조금의 공통분모도 갖지 못하는 상태다. 제헌절의 중요성과 남북관계의 개선의지를 함께 고려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 올해는 제헌절의 의미가 좀더 적극적으로 부각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7월 27일은 70주년이 되는 정전협정 체결일이다. 전쟁의 비극을 끝낸 날이지만 군사적인 정전, 잠정조치를 넘어선 항구적 평화체제를 보장하지 못한 탓에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한 평가가 늘 제한적이었다. ‘정전상태’가 70년을 넘긴 것은 비정상이지만 남북은 물론이고 주변국들에 의해서도 장기간 이 체제가 수용되어온 이유도 경시할 수 없는 무게감을 갖는다. 정전체제는 한반도에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추구할 군사적 안정, 소극적 평화를 제공해 주었다. 북한은 이 날을 미국을 물리쳤다는 전승절로 기념함으로써 정전협정의 함의보다 반미항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데 주력해 왔다. 올해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중인데 기왕의 도발적인 수사와 핵무력노선을 더욱 강조할 개연성이 크다. 최근 중국의 한국전쟁 해석도 항미원조라는 이념적 해석을 공식화하고 있어 전쟁, 정전, 종전, 평화협정 등을 둘러싼 공통의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정부가 힘을 쏟았던 평화체제 구축노력이 과연 적절한 정책구상이었는지, 앞으로도 내세울 정책적 비전이 될 것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이 날을 계기로 심화될 수도 있다.

7월을 맞이했으니 7,4, 7.7, 7.17, 7.27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들이 이곳 저곳에서 개최될 것이다. 주관하는 주체들마다 제각각 이 날을 통해 강조하고 확산시키고자 하는 가치도 다를 것이다. 역사를 공유하는 것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소중한 자원이지만 상이한 해석은 분열과 대립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해방 직후 좌우 정치세력 누구도 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을 함께 기념해야 한다는 대의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31절은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공동 기념 행사를 치루지 못하고 오히려 좌우의 정치적 대립과 이념적 논쟁에 이용당하고 말았던 것도 뼈아픈 사실이다. 2023년 7월도 곳곳에 그와 유사한 역사전쟁의 암초들이 깔려있다. 서로 다른 미래전망을 인정하면서도 이념적 대립이나 정파적 논쟁을 넘어 공동체의 포괄적 미래 비전을 드러내는 기념행위는 불가능한 것일까. 헌법, 정전체제, 남북교류와 평화구축의 노력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수용하면서도 긴장과 대립의 악순환을 넘어설 지혜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일까.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오늘의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 크지만, 그래도 역사는 더 나은 내일을 향해 가리라는 믿음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7월을 맞이하면서 나름의 기대와 희망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