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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의 역사박제

5월 21일 고등학교 동창들과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오전엔 다산생가와 기념관 일대를 둘러보고 오후엔 동구릉을 답사하는 일정이었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였는데 야외에서 하루 종일 걷는데는 오히려 천상맞춤이었다. 두 곳 모두 오래 전에 와 본 곳이지만 처음 온 듯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느낀 바가 적지 않다

남양주 마재마을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마을로 그가 오랜 유배 생활 끝에 다시 돌아와 생을 마감한 곳이다. 1986년에 복원된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떨어져 있는 구조로 안마당을 넓게 쓰도록 설계한 중부지방의 전형적 양반집 모습이다.기념관에는 다산의 대표 저서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 <흠흠신서>의 사본과 수원 화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가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문화관은 실학과 관련한 유무형 자료와 정보를 수집·보존·연구·전시하는 다목적 복합 문화 공간이다. 두물머리를 앞에 둔 다산 유적지는 주변 풍광도 수려하여 산책하기에 퍽 좋은 장소다. 여유당 뒤편의 다산 묘소는 2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추모 공간이 되었다.

다산 집안은 8대가 과거에 합격한 명문가였다. 그 부친 정재원은 참의공 정시윤의 4대종손이었고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지적 탐구열이 뛰어나 실학은 물론이고 서학도 선구적으로 수용한 인물들이 다수 이 집안과 연결되어 있다.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던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었고 그를 매개로 성호 이익의 실학을 이어받았다. 다산은 남인학파로 꼽히지만 실제적인 사고와 경험적 지식을 중시했다. 다산초당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해 1표2서의 대작을 남겼고 적지 않은 편지와 시문으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다산의 사상을 집대성한 위당 정인보는 다산에 대한 연구가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라고 했다. 그가 자녀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글은 오늘날 교육적으로도 활용가치가 높아 다산유적지 거리 곳곳에 그의 글이 새겨진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다산유적지는 그 인근에 있는 마재성지와 함께 둘러보아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의 형제들의 생애까지 포괄해야 다산의 고민과 지성, 삶의 궤적들이 입체적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마재성지는 셋째 형 약종과 그 가족의 순교를 기념하는 곳인데 다산유적지와 마재성지가 함께 소개되는 안내서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쉽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한 조선 천주교의 초기 지도자였다. 그 자신이 신앙을 지켜 순교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부인 유조이 세실리아, 장남 정철상 카를로, 차남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이 모두 신유사옥과 기해박해에서 순교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가족 모두가 성인으로 시복되었고 마재성지는 한국천주교의 대표성지가 되었다. 다산유적지와 마재성지의 가깝지만 먼 공간구성은 약종과 약용의 엇갈린 생애만큼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오후에 들러 본 동구릉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서울 근교에 50만평이 넘는 왕조의 묘역이 이처럼 잘 관리되고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조선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그의 유언에 따라 함흥의 억새풀로 덮여있다는 설명이 흥미로왔다. 이성계로서는 그가 성장한 함경도 변경지방에의 그리움을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500년 왕조를 개창한 태조의 왕릉이 그 이후 조성된 왕과 왕비의 묘역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아홉 릉이 크기나 형태에서 너무 유사해서 설명을 읽지 않으면 누구의 릉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조선왕조 역사에서 태조의 유훈이라는게 큰 힘을 발휘한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선조가 묻힌 목릉 앞에서 조선왕조를 망친 임금이 저렇게 대우받아도 되는가라는 한 친구의 일갈이 잠을 깨우듯 와 꽃혔다. 그러고보니 임진년 왜란과 병자년 호란을 겪고 조선사회가 극도의 피폐상태로 몰렸던 시기의 국왕, 당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학계의 평가가 좋지 않은 선조인데 죽은 이후의 무덤은 오히려 태조의 릉보다 더 좋아 보일 정도다. 유일한 외국 출신 국왕이었던 현종의 묘 숭릉, 탕평책을 실시한 영조의 원릉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여서 마치 복제한 듯 비슷하다. 죽음 앞에선 살아서의 잘잘못도 모두 묻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당대의 치적이나 세평과는 무관하게 국왕이란 존재에 대한 의례와 장법만이 존중된 결과일지 모르겠다.

동구릉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이곳을 둘러보는 외국인들은 조선왕조에 대한 한국인의 생각을 어떻게 유추할까? 왕조와 왕실에 대한 애착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한국사회인데 지금도 오래전 국왕의 제사가 계속되는 이 살아있는 문화공간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K-Culture 가 주목받으면서 태종과 문종과 선조와 현종의 구체적 역사와 스토리는 사라지고 국왕과 황후, 예법이라는 문화적 코드만 부각될 수도 있다. 하긴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의 여행에서도 시간과 스토리는 배경으로 박제되는게 보통이니 왕조의 무덤 앞에서 명말선초의 14세기와 풍전등화의 16세기, 영정조의 18세기 간 차이를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그 여러 가지 소회를 그림으로 담고 싶어 화선지를 폈다. 숭릉의 단아한 풍경을 수묵으로 그리고 이런 발문을 썼다. “오월의 신록, 유네스코 문화유산, 왕조의 잔재와 영화, 권력무상, 역사의 진전 —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당연하지만 이 물음 속에는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담겨있다. 스토리와 진정성이 박제화되는 것은 먼 역사에만 해당되는게 아니다. 온갖 과거가 이념과 정치의 잣대로 재단되는 오늘의 역사오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스토리가 빠진 문화적 기호, 미학적 대상으로 유적을 만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래도 유적지의 참된 의미는 삶의 스토리, 그 속에 담긴 진정성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다산유적지도 마재성지도 동구릉의 건원릉과 숭릉도 제 각각의 존재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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