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감로(甘露)와 천은(泉隱)

남도 순례길에 나선 한 친구가 구례 천은사(泉隱寺) 의 홍매 사진을 보내왔다. 봄을 알리는 매화의 붉은 기운 뒤로 먼 산자락 능선과 사찰지붕의 멋진 곡선이 마치 한폭의 수묵화같다. 천은사라는 이름도 저 풍광에 어울리게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찰문화에 밝은 또 다른 동학께서 천은사 현판 사진을 올려주었다. ‘수체’(水體)라 불리는 이광사의 작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몇 년전 저곳을 들렀을 때 천은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신라 때 창건된 이 절의 원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17세기 절을 중수하게 되었는데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한 스님이 그 뱀을 잡아 죽이자 그 이후로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고 ‘샘이 숨었다’는 의미의 ‘천은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찰에 연이은 화재가 발생하는 등 크고 작은 불상사가 잇따랐고 그 이유가 사찰의 물기운(水氣)을 지켜주던 이무기를 죽인 탓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원교(圓嶠) 이광사가 이 사찰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지리산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편액 글씨를 세로로 써 주자 더이상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 동국진체의 창시자가 물흐르듯 유려한 ‘수체(水體)’의 기운으로 쓴 현판이 불의 기운을 다스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당연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수려한 모습으로 일주문을 지키고 있다.

‘감로’ – 달콤한 이슬이나 맛있는 물을 감로수라하고 불교에서는 이것을 부처의 가르침이나 시원한 차에 비유한다. 중국에는 감로사라는 이름의 오래된 사찰이 있고 한국에도 같은 이름의 사찰이 있다. 목마른 중생들에게 생명같은 단물을 제공해주는 절이란 뜻이니 내용도 상서롭다. 이에 비해 샘이 말랐다는 뜻의 ‘천은’은 사찰의 이름으론 어울리지 않는다. 원교가 저 현퍈을 쓴 이후 샘이 다시 맑은 물을 솟구쳤다 하니 다시 감로사라 해도 무방했을 터인데 천은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의아하다. 세간에 전해지는 말과는 달리 그 이름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격화되고 있는 이란사태와 전세계의 오일 쇼크 가능성을 우려하는 뉴스를 들으면서 감로와 천은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석유는 인류의 문명을 가능케 한 ‘감로’와도 같고 일부 산유국에겐 큰 부를 가져다 준 고마운 자원이지만 그로 인한 기회비용은 만만치 않다. 강대국의 침략과 간섭이 끝이 없고 국내적으로도 독재권력의 힘을 강화하여 국민들의 성숙과 민주주의의 성장을 억누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걸프만의 하늘에 수없이 오고가는 미사일과 그 가공할 파괴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차라리 석유가 고갈되는 ‘천은’의 때를 그리워할 수도 있을 지경이다. 누구도 원치않는 저 ‘불의 기운’을 억누를 오늘의 이광사는 어디 있으며 그가 내놓을 처방과 글씨는 무엇일까 – 억측같은 생각을 해보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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