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책을 장례하다

어느 정도 아는 분의 부음 소식을 접하면 의례 정중한 조의를 표하게 된다. 가까운 분이라면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게 통상의 예의다. 최근에는 관혼상제의 예법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상례’과 관련한 조문 문회는 강고하게 남아있다.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 작별인사를 한다는게 실질적인 의미가 있을리 없지만, 남은 자들에게 그런 의례가 주는 심리적 위안이 적지 않기 때문이리라.

평생 책과 함께 생활하고 이곳 저곳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모았다. 유별난 장서욕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좋은 책이라면 일단 사두려 했다. 절판된 책들을 복제해서 판매하는 서적판매원의 단골이 되기도 했고 흥미있어 보이는 자료나 논문들은 열심히 복사해 두었다. 서울대 정년을 하면서 상당부분 정리했지만 여전히 내 연구실과 서재는 많은 책과 자료들로 가득하다. 이제 광주과학기술원 교수직도 끝날 때가 되어 대대적인 정리, 과감한 버리기에 돌입했다. 단순한 방정리에서 시작한 일인데 지나간 내 인생의 조각 조각들을 되돌아보면서 그것을 ‘과거’로 돌려보내는 작업이 되고 있다.

그런데 결정을 못내리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더 이상 쓸모나 효용이 없어졌고 그다지 진귀한 자료라 할 수도 없지만 여러 기억과 인연이 떠올라 버리기가 주저되는 것들이다. 청계천 헌책방을 돌며 구했던 책, 몰래 복사해서 간직하던 자료, 역사유적지를 다니며 수집했던 팜플렛, 제자들이 공들여 쓴 박사학위논문 등 그 유형은 다양하다. 이곳 저곳에서 받았던 위촉장, 임명장, 표창장 등도 그렇거니와 여러 다양한 인연들이 서려있는 책이나 자료를 버리자는 결심이 여간 힘들지 않다.

문득 이럴 때 장례식 같은 어떤 절차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 제대로 만나거나 연락하지 못했던 분의 마지막 자리에서 그동안 감사했고 잘 가시라 인사함으로써 민망하고 불편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의례’의 기능이 아닌가. 그래서 책을 정리하는 어떤 의례를 내 나름대로 거행하기로 했다. 더 이상 보관할 필요가 없는 자료나 책은 ‘할 일 다 했으니 이제 편안히 눈 감으라’고 이르고 폐기장소로 내다 놓는다. 혼자 짧은 순간이나마 그런 예를 갖추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매주 조금씩 책의 장례식을 치루다가 그중 어떤 책들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책이 내 손을 떠나는 것일 뿐 사라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구나. 그래서 그런 책들에 대해선 인사말을 따로 준비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있어주어서 고맙다. 이제 새 사람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아라’하고 인사한다. 저 녀석들이 어떤 새 주인을 찾게 될지, 끝내 찾지 못하고 미아처럼 떠돌아 다닐지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다소 위로가 된다. 반려동물을 떠나보내며 정성껏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