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온 길과 갈 길

사회공헌을 표방하면서 새로이 출범한 한 연구소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그 첫 질문이 사회학을 전공한 내가 통일평화 문제에 천착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였다. 내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을 책임맡게 되었을 때도 주위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정치학이나 외교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논의를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는 궁금함 내지 회의감이 담겨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실향민 가족이리라 단정한 분도 있었다. 이 분야 전문가들 가운데 이산가족 출신이 적지 않으니 나도 그런 예에 속하지 않을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내 부모님은 모두 서부경남을 배경으로 성장하신 분들이고 내 가까운 친척들 가운데도 실향민은 없다. 지리산 일대의 마을들이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극심한 이데올로기 갈등을 겪었던 탓에 내 집안에도 그런 피해와 고통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굳이 남북문제에의 관심으로 이어질 계기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민족이나 평화, 통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는 나만의 독특한 가족배경이 있다. 조부께서 일찌기 호주 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조모와 어머니로 이어진 신앙의 열정이 강했다. 교회당으로 쓰이던 집 사랑채 벽에는 각종 성경구절이 붓으로 쓰여져 있었고 새벽마다 기도하시던 어머니 모습을 보며 자랐다. 중학교부터 서울로 혼자 유학을 와 부모님과 직접 대화할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어머니는 편지로 구약의 모세나 솔로몬 같은 인물이 되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평화를 이룬다‘거나 ‘민족을 위한다’ 는 말은 어머니의 편지를 통해 익숙하게 접했던 내용이었다.

그래서일까 주위에서 권유하는 법학이나 경제학에는 흥미가 가지 않았다. 인간과 역사를 다루는 분야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사회사를 전공하게 되었다. 한국현대사는 식민지 시대와 분단시대를 관통하게 되므로 자연스레 민족, 해방, 전쟁, 평화의 주제와 만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대학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운동권에서 주창하던 저항적 민족주의나 당위적 통일운동에는 다소 거리감을 느꼈다. 민족을 저항의 주체로만 바라보거나 평화보다 통일을 앞세우는 편향이 불편했다. 다른 한편 민족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적으로 간주하던 구미 사회과학 주류이론과의 불화도 감내해야 했다. 독일서 유학하셨던 한 선배는 사회학자가 어떻게 민족을 내세울 수 있는가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민족이란 화두를 놓치 않았던 것은 어릴적 부터 내면화된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탈냉전 과정에서 북방으로의 문이 열렸다.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을 오가고 남북간 접촉의 기회도 생겼다. 1991년 난생 처음 밟아본 중국 연변에서 북한 학자들과 만나고 조선족과 이야기를 나누며 백두산 천지를 올랐던 감동,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을 접하면서 받은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말로만 듣던 디아스포라 민족의 현실을 실감한 것이다. 기독교 중심의 남북나눔운동에 연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나의 실천적 활동폭도 넓혀졌다.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토론하고 독일, 베트남, 대만 등지의 현지연구도 수행했다. 관련분야의 전문성이 뛰어난데다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분들이 많아 내게 여러모로 영향을 미쳤다. 민간차원에서의 화해와 신뢰구축의 중요성을 깨우치며 배운 학습의 공간이었다.

2005년 서울대학교에 남북문제와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연구기관이 설립되게 되었다. 이 연구소 설립에 관심이 컸던 정운찬 당시 총장께서 내게 초대 설립소장의 역할을 부탁하셨다. 그때까지 나는 학교의 행정일을 맡지 않으려 늘 피해 왔었지만 이 제안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부응했고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내 개인의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은 바 아니었지만, 적어도 열정과 각오, 문제의식은 누구보다도 준비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연구원을 함께 이끌어갈 전문인력을 찾는 과정에서도 남북나눔운동과 한반도평화연구원의 전문가 풀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설립 이후 10년간 연구원을 키우고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책임감도 커지고 정책적인 관심도 높아졌다.

나는 남북문제를 이념의 문제나 정치외교적 차원으로 환원하지 않고 다양한 시각과 생각을 이해하고 포용하는데 힘을 쏟았다. 동시에 ‘통일’을 너무 한국특수의 민족적 과제로만 바라보지 않고 인류보편의 맥락에서 분단과 통합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평화와 통일, 통합의 영역들이 새롭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내 생각이 깊어졌고 ‘통일평화’라는 새로운 개념과 ‘연성복합통일론’이라는 구상을 내놓을 수 있었다. 내 연구와 문제의식이 체계적이면서 종합적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였다는 점에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시절은 내 지적 생애에서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십여년 전부터 내 연구관심이 다소 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연구원장을 그만두면서 이 분야 활동의 폭이 줄어든 탓도 있겠고 서울대를 퇴직하고 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가 되면서 첨단기술의 문명적 효과에 주목하게 된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 상황이 어려워진 것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북관계는 지난 몇 년간 극과 극을 오가다가 이제 완전한 단절과 불신의 시대로 이행했다. 북한 방문은 꿈도 못꾸고 대화나 교류의 조그만 통로조차 막혀버렸다. 일각에선 새로운 해빙기가 조만간 오리라는 기대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북한이 ‘적대적 2국가론’을 내걸고 국제정세가 현저히 달라지는 상황을 고려할 때 그런 전망은 당분간 실현되기 어려워 보인다.

이제 70 세가 되고 광주과학기술원에서도 조만간 퇴직을 할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태어나 지속적인 성장시대를 살았고 탈냉전과 세계화의 혜택을 누린 복받은 삶을 살았다. 폐쇄된 한반도 남쪽 공간을 벗어나 외국 여행과 국제회의가 일상이 되는 신나는 변화도 경험했다. 휴전선을 넘어 평양과 묘향산을 가고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들과 회의를 조직하며 미래를 함께 꿈꾸기도 했다. 기대와 희망으로 충만했던 지난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의 현실이 더욱 답답하고 암울하게 다가온다. 청년세대의 미래와 한반도의 앞날을 생각하면 단순히 노년층의 아쉬움 수준으로 치부할 수 없다. 평화와 화해의 기운이 새롭게 솟아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내 정서와 문제의식을 격동시키는 내면의 열정도 더불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