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짐을 쌀 때마다 오래된 책을 버릴지 가져갈지 고민한다. 책마다 각기 사연이 있어 쉽게 버리기 어렵지만 앞으로 읽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게 대부분이다. 때에 따라 정리도 하고 버릴 것을 버려야 한다. 당연히 낡고 오래된 책들이 폐기처분 1순위가 된다.
그런데 두 권의 낡은 책 앞에서 머뭇거렸다. 이 두 권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조부께서 사용하시던 옛날 책이다. 1927년에 간행된 [성경주석]은 큰 국판에 900쪽에 달하고 군데 군데 상하기도 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 기독교 고문서의 하나로 소장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성경사전이다. 영국 런던 예수교서회가 발행한 The Universal Bible Dictionary를 역술한 책으로 초창기 성경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회에서 1922년부터 5년여에 걸친 노력끝에 나왔다.
역술자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성서 번역가·교육자·신학자다. “나는 전주 이씨, 이눌서(李訥瑞)요” 라며 늘 자신을 소개했다고 한다. 실제 이 책의 간지에는 이 이름으로 적혀있다. 유니온 신학교 재학 중이던 1891년 9월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윤치호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한국 선교에 참여하기로 결심해 1892년 조선에 들어온 인물이다. 이후, 호남지역의 교회와 신흥학교를 세워 선교와 교육활동에 진력했다. 1895년 성서번역위원이 되어 구약성경의 대부분을 번역했다. 레이놀즈가 번역한 <구약전서>는 1911년 3월에 요코하마에서 3만부 인쇄되어 반포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1917년부터 1937년까지 어학교사 및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기독교신학연구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인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이 책은 현재의 한글맞춤법과는 다른 여러 표기들이 등장한다. 하ᄂᆞ님 같은 아래아 표기가 자주 보이고 련옥, 렬왕긔샹하 같이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은 어휘가 적지 않다. 요즘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샹, 긔, 샤 같은 겹모음도 드물지 않다. ‘此로써’ 같이 한자를 병용하는 표현도 자주 보인다. 1920년대 한글표기양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많은 항목들이 가나다 순으로 나열된 것은 지금 보아도 흥미롭다. 1920년대 한글의 표기형태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1917년에 간행된 [조선4천년사]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경성신문사장이자 조선연구회 주간의 직함을 가진 아오야기 난메이 (靑柳南冥)다. 아오야기는 1910년에《조선종교사》, 1912년에는 《이조오백년사》, 1921년에는 《조선독립운동소요사론》, 1922년에는 《이조사대전》, 1924년에는 《조선문화사대전》, 1930년에는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 등을 출간한 저술가다. 조선연구회라는 조직을 통해 조선정치사를 당쟁사로 해석하고 강제합병을 정당화한 대표적인 일본 지식인의 한명이다.
저자의 무게감을 보여주듯 책의 앞장에는 당시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야마가타 이사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양서자), 이노우에 마사지 (일본의 아시아주의자) 등의 축하글이 실려있다. 조선통치를 담당한 총독부 최고인물들이 이 책의 출간을 축하한 것이다. 구한말 유학자들을 대표하던 김윤식도 경학원대제학의 직함으로 ‘근역일월(槿域日月)’이란 글씨를 써서 책 앞에 실려있다. 조선 지식계에 큰 영향을 미치던 그가 일제가 내려준 자작이라는 귀족 신분을 받고 이런 책에 축하글을 보낸 것이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이 글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글씨의 크기나 필세가 너무 왜소하고 빈약하여 스스로도 자괴감을 느낀 듯 하다.
책장의 한켠에 의친왕의 글씨로 ‘음풍농월 은사정취’라는 현액이 있다. 조부가 건립했던 정자 애산당에 걸려있던 것이다. 어느 정도 깊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는 잘 모르나 여러 글들로 미루어볼 때 꽤 신뢰하는 사이였음은 짐작할 수 있다. 망한 나라의 왕족에게 꼬박 ‘의친왕전하 어하사친필’이라는 표기를 해두고 낙관마다 한지로 덮어두던 조부다. 지방의 산림에 이름없는 선비에 불과한 처지에서도 오랜 왕조국가에 대한 마음은 강했던 것 같다. 아오야기의 책 앞 내지에는 ‘조선 반만년사’라는 펜글씨가 적혀있다. 4천년을 반만년으로 고쳐부르는 것으로 훼손된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보상하려는 심사였을까.
낡은 두 권의 책은 20세기 초반 한반도가 경험한 심대한 두 충격을 상징한다. 기독교로 대표되는 근대서구사상의 유입이 그 하나라면 일제의 강제통치와 연계된 식민지식의 확대가 또 하나다. 폐쇄적인 세계, 유학적 지식에만 닫혀있던 당시의 식자들은 이 거대한 파동을 온몸으로 마주해야 했다. 가난하지만 지식인으로 살고자 했던 조부도 이 두 책을 접하면서 복잡한 시대상황을 견뎌내려 했으리라. 책은 낡았지만 그 함의는 크고 무거워 앞으로도 보관해야 할 것 같다. 필요한 기관에 나타나면 기증하곘다는 마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