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평화에 대한 책자를 기획한 후배 연구자로부터 책의 추천사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목차를 보니 전쟁을 위한 무력강화는 물론이고 사회집단간의 억압과 문화적 폭력까지도 극복하자는 적극적 평화론의 기조를 담고 있는 책자처럼 여겨졌다.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고사했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도 저런 생각을 가져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서 내가 추진한 새로운 평화학 프로그램의 핵심 지향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전쟁과 폭력이 지구 곳곳에서 출현하는 시대를 맞이해서 이런 판단을 그대로 밀고 갈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류의 현 문명 수준을 고려할 때 폭력일반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너무 낭만적인 시각은 아닐지 회의감도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세계적 분열은 이제 정상이 된 듯 곳곳에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현실이 되고 있다. 나토가 강화되고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정당이 제1당이 되었고 독일에서도 AFD의 약진이 놀라울 정도다. 인류문명의 미래를 앞서 염려하고 대안을 모색해가던 유럽연합의 위상은 전례없이 약화되고 평화를 구가하던 국가에서 징병제가 부활하는 상황이다. 러시아의 푸틴은 정치적으로 오히려 더 강력해지는 듯하고 시진핑 장기지배를 굳힌 중국의 마이웨이도 여전하다.
미국의 혼란은 세상의 어지러움의 절정판 같다. 세계 제1의 강대국이자 자유와 혁신의 본산이라 자처하는 미국이 지구적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불과 4개여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바이든과 트럼프의 두 노인정객이 재대결을 하게 되는 모습은, 누군가가 ‘치매환자와 미치광이의 대결’이라고 불렀듯 전세계의 우려 대상이 되고 있다. 며칠전 NYT는 논설위원 전체의 뜻으로 바이든의 출마포기를 요구하고 나섰지만 그것이 이 혼돈을 극복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트럼프의 재선 이후 나타날 미국주의와 정치적 편의주의가 세계질서에 어떤 충격을 미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한반도는 이런 지구적 차원의 모순과 긴장이 전형적으로 또 집약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지고 휴전선의 무력충돌 가능성도 커졌다. 심지어 제2의 한국전쟁을 염려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푸틴과 김정은의 밀착 계기가 전쟁협력이었다는 사실과 이번 조러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준동맹관계로의 격상이 갖는 무게감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파장이 현재의 한러관계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도 걱정거리다. 한중관계가 다소 잠잠한 것은 다행스럽지만 결코 우호적인 상황은 아니다. 미중의 대립이 격화되고 한미일 공조가 강화되는 추세가 지속될 경우 한중관계도 언제든 악화될 개연성이 상존한다. 북핵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대만해협 문제도 조만간 부딪칠 현안이 될 수도 있다.
작년 말부터 북한이 내세우고 있는 ‘적대적 2국가론’은 이런 대전환에 대한 북한 나름의 대응방안이라 할 수 있다.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관계라는 남북관계의 기본틀을 부정한 김정은의 과감하고도 도박같은 발상이 북한에서는 집요하게 또 체계적으로 진행 중이다. 핵무력에 기초하여 체제를 유지하려던 북한의 소극적 대응전략이 신냉전 구조에 편승하여 보다 적극적인 체제강화론으로 이행하는 모습이다. 민족으로서의 한국보다 체제로서의 러시아와 중국을 우선시하고 경제나 협력보다 무력과 대결을 앞세우는 방향을 확고히 선택한 것이다. 짧게는 탈냉전 30년의 역사, 길게는 분단 80년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변경시킬 중대한 변화로 보인다.
이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위기, 대전환의 상황앞에 국내의 정치권이 보이는 반응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2018년 이후의 급변한 현실을 어떻게 평가하고 분석할 것인가에 대한 냉정한 복기나 책임있는 염려보다 모든 논의가 문재인 정권 책임론과 윤석렬 정권 책임론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모든 정치적 발언과 평가는 다음 대선에서의 권력을 누가 장악할 것인가로 맞춰져있고 당연히 정파적인 목소리만 득세한다. 외교와 내정, 실리와 명분의 지난한 줄다리기가 필요한 영역에서 감정적 이분법, 과장된 자신감, 이념적 정신승리가 도처에 즐비하다. 진보도 보수도 그런 행태에서는 거의 쌍생아라 해도 좋을 듯 싶다.
그래서인지 요즘 뉴스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전문가의 논평을 경청하고 싶은 마음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알아야 속만 상하고 걱정만 커지는데 차라리 모르는게 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굴원의 어부사가 새삼 떠오른다. ‘세상이 모두 탁하고 취했는데 나 홀로 맑고 깨어있으려 하니 결국은 쫓겨나고 말았다’는 작자의 한탄에 대해 ‘성인은 탁하고 취한 세상과도 어울려야 하며 냇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으면 그만’라는 어부의 말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명문이다.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근거로 세상과 대면하고 부딪치는 삶의 방식과 현실에 맞추어 안분지족의 삶을 추구하는 자세가 대비되는 글로 종종 해석되었다. 세상과 부딪칠 각오를 가져야 하는 지식인이라면 어부의 조언을 무조건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기는 쉽지 않다. 자기 스스로 끝없이 공부하고 변화하는 현실과 대면해야 하는 부담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격이 낮은 이유가 있다. 낡은 생각과 관성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면서 그것을 지식인이나 선지자의 자세인 양 오해할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성찰이나 성실한 분석 없이 주변 사람들과 끝없이 부딪치고 논쟁하며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자칭 전문가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인지 나는 개인적으로 어부의 지혜를 수용하고 싶은 마음인데 종종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지 자문하게 된다. 안분지족하는 여유가 개인적으로는 편한 대응이지만 결국 정치적 무관심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세상이 어지러워질수록 더욱 이런 내면의 갈등은 커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