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광주시 양림문화마을을 탐방했다. 호남지방의 근대화 과정, 특히 기독교를 중심으로 진행된 초기의 다양한 변화가 역사적인 건물과 함께 농축되어 있는 곳이다. 이전부터 남도답사 대상 리스트에 올려 놓았었는데 이제야 현장을 오게 되었다. 오웬, 유진벨 등 이름이 익숙한 초기 선교사들의 삶이 배어있는 공간과 기념물을 둘러보았고 최흥종, 조아라, 김필례, 김현승 등 이곳에서 배출된 초기 한국 지도자들의 행적도 그들이 활동했던 병원,교회, 학교, 기념관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도로변의 한 건물이 눈에 띠었다. 붉은 3층 건물의 외벽에 이국적인 선교사 얼굴이 장식처럼 붙어있고 흰색의 부조로 제작된 ‘최후의 만찬’ 작품이 걸려있다. 가만히 보니 예수를 한 가운데 두고 좌우로 이 지역에서 헌신했던 선교사와 초기 기독교 리더들 11명을 배치한 것이다. 베드로, 요한 등을 대신하여 오웬, 유진벨, 쉐핑, 정율성, 최흥봉, 조아라 등을 식탁 주위에 배치한 창조적 구성이 놀랍다. 저런 작품을 상상하고 저런 컨텐츠를 거리에 조성할 수 있는 이 지역의 문화적 안목이 대단하다.
호남신학교에 연한 작은 동산에는 이곳에서 활동하고 생을 마친 벽안의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 있다. 그 뒤에는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순교한 호남지방의 850여 순교자들을 기리는 돌비가 세워져 있다. 동산을 돌아나가는 곳에 이들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긴 돌계단이 있는데 ‘고난의 길’이란 이름처럼 한발 한발 걸으며 인생을 생각하게 한다. 종교사회학자로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양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셨던 노치준 목사께서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어 더욱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묘역에서 내려오면서 유진밸 기념관을 들러 4대에 걸친 이 가문의 헌신적 활동을 살펴보았다. 100년 이전 가난하고 낙후한 한국,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들과 살기로 작정한 저들의 헌신과 수고는 참으로 고귀한 것인데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생각만큼 살갑지 않다. 한 때 북한돕기활동으로 만나곤 했던 인세반, 인요한 형제의 사진도 반갑게 확인했다.
이 지역에 큰 발자취를 남긴 오방 최흥종 목사의 일생을 자세히 알게 된 것도 큰 보람이었다. 3년전 완공되었다는 오방기념관에서 손자인 최협 교수를 반갑게 만났고 그로부터 직접 여러 설명을 들었다. 낯선 선교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회심한 이후 평생 한센인을 위한 헌신자로 생활했고 평양신학교를 거쳐 시베리아 선교사로 활동한 신앙인이었으면서 3.1운동, 신간회, YMCA, 노동공제회 등 한국의 근현대사 곳곳에 깊은 족적을 남긴 최 목사의 활동 폭은 참으로 놀랍다.
기념관의 전시 내용을 통해 초기 한국기독교에는 참으로 폭이 넓고 뜻이 깊은 어른들이 계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옥고도 치루었고 해방 직후 사회정치적 영향력이 컸을 법한데 스스로 권력과 명성을 멀리했다 하니 왜 백범 김구가 그에게 ‘和光同塵’이란 휘호를 남겼는지 이해될 듯 했다. 공식역사에서조차 힘있는 유명인들만 기억되는 오늘날 뒤늦게라도 이런 기념관이 세워진 것이 얼마나 다행한가.
최근 젊은 여행객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는 펭귄마을도 양림동의 중요한 한 모습이다. 정겨운 골목길, 오랜 담장들 곳곳에 재미있는 사진과 글귀를 붙이고 옛날 형식의 사진관과 점방 등을 만든 도시재생의 한 사례다. 선교와 교육과 계몽과 의료라는 중요하면서도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깉은 공간과 달리 이곳은 일반인들의 일상적 삶에 기반한 만큼 유쾌하고 소박한 느낌이 강했다.
골목길에 선교사와 기독교 지도자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고 담장에 이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걸로 미루어 당시의 근대문물이 주민들에게 이질적이거나 거부감을 주진 않았음이 분명하다. 종교적 가치와 계몽적 과학이 잘 어우러진 현장이었다 하겠다. 선교사들의 집과 기념관은 대체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영화를 찍을 때 배경으로 선호되기도 하고 문화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는 것도 좋아보인다.
다만 유산으로 남는 것과 현실의 영향력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종교와 역사가 지닌 무게감과 여행과 소비의 즐거움 사이의 차이도 점점 커진다. 한국의 기독교가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며 성장해오는 동안 가난하고 병든 민중과 함께 했던 모습은 점점 기념관 속으로 박제화되고 있는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저 유서깊은 공간과 건물에 담겨있는 숭고한 헌신과 교훈이 과거의 유적이나 기념물로만 남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이 더해져야 할까 내내 머리에 맴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