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열 박사가 공들여 번역한 책을 보내왔다. 호주 캔버라 대학의 황경문 교수의 Beyond Birth 를 옮긴 것인데 다소 도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문제의식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한국사회의 역동적 변화를 보편적 발전도식에 맞추려는 시각을 거부하고 전통시대의 한국적 특성이 누적적으로 작용한 장기효과에 주목한다. 사회혁명이 부재한 사회로 파악하면서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주요한 지위상승을 이룬 엘리트의 성장과 그 과정의 성격을 설명하려 한다.
이 책은 중인, 향리, 서얼, 군인, 서북인 등 양반층에 비해 신분적 지위가 훨씬 낮았던 ‘제2신분집단’을 주목한다. 저자는 고려시대 이래 가문과 교육과 관료제의 복합적 연계 속에서 일종의 비귀족 엘리트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의 독특한 심성과 아비투스가 20세기 이래 특권적 엘리트층을 구성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전통사회의 특질을 세밀하게 밝히는 역사학적 실증을 넘어 한국사회에서 확인되는 서열의식, 신분의식, 평등의식, 공정의식의 기원을 탐구하려는 장기사회사적 시선이 신선하다.
영미권의 한국학 저술은 한국 학계의 문제의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서구중심적 서술이 이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동서양을 아우르는 비교사적 시각과 개념화 능력에서 주목할 만한 장점도 적지 않다. 이 책 역시 신분원리와 국가관료제의 공고한 결합, 그 틈새에서 생존해온 ‘제2신분층’의 기민함, 전통적 심성의 장기지속성 등의 주장은, 추가 분석이 필요하지만 흥미롭다. 조선시대 신분제도, 특히 양반지배층의 네트워크 특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연구하고 있는 백광열 교수가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 이런 저작을 번역 소개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뜻깊고 성원할 일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다시 출생과 가족, 신분을 주목하게 만든다. 교육을 통한 상승이동의 가능성이 막히면서 금수저 흙수저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 일각에선 평등주의가 너무 강한 사회라 하고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신분사회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지속적 발전을 위해 경쟁주의와 실력주의를 강화하자는 주장과 과다경쟁이 야기하는 사회공동체 해체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공존한다. 이 책의 제목인 Beyond Birth 가 특권층의 형성원리를 넘어 평등사회 실현으로 이어지려면 또 얼마나 많은 애씀과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인가? 책장을 넘기면서 떠올리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