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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를 추모하며

뛰어난 인류학자이자 한국을 사랑한 연구자로 안타깝게 수년전 타계한 낸시 교수의 추모 모임이 1월 6일 오전에 있었다. 일리노이 대학 어바나 샴페인을 중심으로 그녀가 키워낸 국내외 연구자들은 숫자도 상당하거니와 학문적 능력과 품성에서도 주목할만 분들이 적지 않다. 낸시의 한국 필드 과정에서부터 오랜 인연을 맺었던 박소진 교수와 이규호 교수 등이 주선하고 정병호 교수가 대부도 집을 제공하여 이 귀한 자리가 성사되었다.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십여명 학자가 모였는데 나는 온라인으로 추모의 시간에 참여했다. 낸시의 오랜 동학 조한혜정 교수도 줌으로 함께 했다.

낸시 사진을 앞에두고 국화꽃을 헌화하며 각자 추모의 말을 건넸다. 짧은 시간이지만 모두들 고마움과 안타까움, 그리움을 교감한 자리였다. 내게도 말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갑자기 울컥 눈시울이 붉어지고 낸시와 만난 40년 세월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낸시가 여전히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면 미국의 한국학 연구 수준이나 학문후속세대의 성장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낸시를 기억하며, 그녀를 추모하는 자리를 잊지 않고 마련해준 후학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낸시도 하늘에서 저들의 건강과 활약을 지켜보고 성원할 것이라 생각된다.

1984년으로 기억되는 어느날 전북대 연구실에서 만난 파란 눈의 외국인, 다소 어색한 한국어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관심사를 말하고 필요한 도움을 구하는 당차고 키 큰 여성 – 내가 낸시를 만난 첫 기억이니 어언 40년 전이다. 하바드 대학을 졸업한 후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한국의 농민을 대상으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인류학자라 했다. 그녀는 한국의 현 농민운동 배경에 조선시대와 식민지기의 토지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해방 이후 농지개혁이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 총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알고싶어 했다. 내가 구한말 토지문제를 분석한 논문을 건네주고 당시의 관행과 쟁점들을 설명하면 너무나 반가와하며 열심히 기록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낸시가 전북의 한 농촌마을에서 생활하며 필드를 할 때 나는 현지의 학생들을 소개해 주거나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간간히 방문하는 약간의 도움을 주었는데 낸시는 오랫동안 그것을 고마와했다. 어느날 낸시는 자신이 공부했던 하바드의 연구환경을 접해 볼 것을 권유하면서 내게 하바드 엔칭 프로그램을 적극 추천했다. 당시 대학과 지역사회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소위 ‘서명교수’ 로 낙인이 찍혔던 나로서는 총장의 추천을 받는 것 자체가 어려웠는데 낸시는 엔칭연구소로 내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고 나는 총장의 추천 없이도 방한한 베이커 부소장의 면담자 리스트에 포함될 수 있었다.

낸시는 자기 박사논문 초고의 한 챕터가 작성될 때마다 내게 검토를 부탁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내가 지적하거나 코멘트한 것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어휘들, 지역별 사례들에 대한 것이었고 인류학자로서 그녀가 품고 있던 이론적 지향이나 개념들에 대해선 별 도움을 주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낸시는 언제나 내 코멘트를 존중해 주었다. 내가 서울대학교로 옮기게 되자 함께 기뻐했고 관악 캠퍼스로 세 자녀를 데리고 와 학교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도 했다. 내 둘째 딸 윤영이가 하바드 대학 박사과정에 합격했을 때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격려해 주었다. 낸시가 하바드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케임브리지로 옮길 것을 심각하게 고민할 때는 내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남편과 자녀를 위해 하바드 교수 기회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주었을 때 그 얼굴 한편에서 엿본 아쉬운 표정도 잊기 어렵다.

3년전 보스톤을 방문했을 때 낸시가 잠들어 있는 마운트 어번 세미트리를 찾았다. 그 날은 비가 부슬 부슬 내려 그렇지 않아도 무거웠던 내 마음을 더욱 힘들게 했다. 화려한 석조물들이 서 있는 묘역이 아닌 납골당 형태의 방을 한참 돌아 그 아버지 이름 옆 낸시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토록 존경하고 좋아하던 아버지 곁에서 안식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작은 꽃 한송이를 그 앞에 놓았다. 내가 1989년 엔칭 펠로우로 케임브리지에 도착했을 때 낸시 부모님 댁에서 우리 가족을 초대해 주셔서 함께 식사를 했었던 일이 선연히 떠오른다. 이곳 세미트리를 공원삼아 즐거운 생활을 하라고 성원해준 분들인데 이렇게 먼저 떠나다니…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인을 이해했던 사람…누구에게나 성심을 다해 조언과 배려를 아까지 않았던 참으로 좋은 친구였는데, 하늘은 종종 너무 좋은 사람을 일찍 데려가시나 보다.

온라인 추모를 끝낸 후 아쉬운 마음을 금하기 어려워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중국의 유명한 시인 두보가 아끼는 벗을 먼 곳으로 보내며 쓴 ‘송원’ (送遠) 이란 시를 써 내 마음을 담아본다. —- “갑옷입은 병사 천지에 가득한데 / 어찌 그대 먼 길을 떠나려는가 / 벗들이 모두 통곡을 하는데 /말타고 홀로 이 성을 떠나는구나 / 나무와 풀은 세월따라 시들어가고 / 변방의 강에는 눈서리 내려 날씨는 차가우리 / 이별한 게 어제 같은데 / 옛 친구의 우정은 더욱 그립구나 (杜甫, 送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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