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갑진년 새해를 맞이했다. 31일 자정 가까운 시간, 시편 23편을 가족이 함께 읽으며 한 해의 감사를 나누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많은 사람이 건강 문제로 힘들어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시대에 무탈하게 2023년을 보내게 된 것 자체가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정년 이후의 불확실한 여정에도 이만큼 안정된 상태로 소프트랜딩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다. 돌이켜보면 긴 인생길에서 만난 어려운 순간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내 발목을 잡을만큼 결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예기치 않게 다가온 행운과 도움의 손길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둔다’는 표현대로 긴 인생길에서 값없이 받은 것이 많으니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자녀 세대에도 같은 축복이 임할까 염려가 없지 않다. 세상이 점점 더 혼돈스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역병이 온 인류를 위협하고 곳곳에 비난과 혐오의 언설이 차고 넘친다. 유럽과 중동의 전쟁은 끝나지 않고 새로운 대립과 충돌의 우려를 키운다. 동북아의 지정학도 불확실성이 커지고 양안이나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도 높아간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근간을 이루던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의 정치적 퇴행은 너무 심각하여 21세기 인류문명이 아노미 상태에 봉착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문명위기론, ‘말세론’이 득세할 좋은 환경이다.

오랫동안 안정과 성장을 구가했던 한국은 이제 확실한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커질 조짐이다. 젊은 세대는 구직난, 양극화로 고통을 받는 가운데 세계 최고의 저출산으로 사회전반의 활력상실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일찍부터 무한경쟁에 내몰린 젊은이들은 협력과 우애보다 이익과 경쟁을, 사랑과 신뢰보다 싸움과 불신을 몸에 익히는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한다. 챗 GPT 로 촉발된 인공지능의 일상화가 새로운 갈등해소와 참신한 생활방식을 가져다 주기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비인간화, 기계화, 감시와 통제의 그림자가 얼마나 짙어질지, 우리 사회가 또다른 야만상태로 향하는 레트로토피아가 되지 않을지 우려도 적지 않다.

내 자녀를 위시해서 젊은 세대가 살아갈 21세기 미래는 얼마나 약육강식의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N포세대임을 강조하며 무한경쟁과 개인주의의 세례를 듬뿍받은 저들에게 시편 23편은 어떻게 들릴까? 권력과 돈의 위세가 날 것 그대로 작동하는 한국사회에서 선한 목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순한 양의 모습을 권유할 수 있을까? 험난한 시대를 뚫고 나가야 하는 자녀들을 생각하면 미래를 염려할 필요 없다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게 솔직한 심경이다. 신앙이란 모름지기 시대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견고한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겠지만 어슬프게나마 미래를 내다보는 사회과학자의 입장에서 그런 확신이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2024년도 여전히 여호와는 내 목자시고 우리를 외부의 위해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새해를 맞이하자고 가족들에게 권면의 말을 했다. 하지만 내 말에 강한 확신이 실리지 않음을 스스로 느낀다. 먹을 풀과 마실 물이 철따라 주어질 것이고 일상의 평안도 허락하실 것이라고 애써 강조하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나 자산을 본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 했는데 ‘믿음이 없는 자야’ 라는 힐난이 들려오는 것 같다. 새해를 맞이하며 시편 23편을 다시 읽으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는 말씀을 새삼 다시 묵상한다. 올 한 해 깊이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리라 다짐해 본다.

2 Comments

  1. 교수님~ 언제나 감동적인 글을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삶은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입니다. 동료들에게도 후학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이 올리신 송구영신 축하글을 가족과 함께 보았습니다. 딸이 정말 멋진 모습이라고 감탄을 하더니 드디어 “화묵회” 회원으로 가입했네요.

    1. 황교수님 감사합니다. 가족 모두에게 건강과 축복이 올 한 해 늘 함께 하길 빕니다. 따님의 성원 고맙고 화묵회 회원 가입을 환영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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