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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노동

수년전 서울대 권현지 교수등과 함께 “디지털 변화 속에서 일/노동 변화” 를 주제로 하는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이 있다. 노동관련 연구를 활발히 하던 뛰어난 전문가들이 참여한 공동작업이었는데 나는 개념사의 관점에서 한 파트를 담당했다. 2017년 말에 이 보고서가 노동연구원 종합보고서 책자로 간행되기도 했는데 지금 살펴보아도 그 내용이 탄탄하고 흥미롭다.

문명으로 보는 21세기 수업에서 ‘일/노동의 미래’ 를 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이 보고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나는 1) 임금을 전제한 노동과 그보다 좀더 포괄적인 일이 분화할 수 있을지, 2) 정규직 중심의 정상적 노동형태가 다양한 유연화와 일의 조합으로 진행될지 3) 이 맥락에서 첨단기술의 영향력이 어떻게 작용할지를 주목했었는데 과연 21세기 미래에 저 학생들이 어떤 상황을 마주치게 될지 중요한 쟁점인데 나 스스로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사실 그 연구를 수행할 때는 디지털 효과가 미칠 긍정적 영향력을 좀 적극적으로 평가했었다. 아마도 미래는 사람들이 임금노동에서 좀더 자유로와지고 단일 직업에 매이기보다 다양한 일의 포트폴리오를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오기를 바라는 내 개인적 희망이 작용했을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6년여를 지나면서 그런 기대와 희망은 여전하지만 긍정적 평가에 대한 확신은 이전에 비해 약화된 것 같다. 한국사회의 현실이 일자리의 다양화와 유연화를 환영하기에는 너무 경직되어 있고 서열화되어 있는데다가 노동의 유연성이 자유의 확대보다 불안정성과 프레카리아트화에 더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이 커진 탓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디지털 환경이 노동과 일에 미친 영향이 전반적인 자유증대보다는 전례없는 양극화로 귀결되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미국의 라이시는 디지털 환경이 재택근무가 가능한 ‘원격업무층’을 자유로움과 높은 소득을 함께 보장하는 최상층으로 만들었지만 수많은 중하층 노동자들은 그런 긍정적 효과보다는 지위의 불안정과 소득하락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미국 이외의 사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유사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이 변화의 미래를 결정론적으로 단정하고 싶지 않다. 냉정한 분석가의 입장과 내심 아들이 살아갈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충돌하는 공간을 없에고 싶지 않다. 아니 내 마음의 공간만이 아니라 실제 우리 사회에 그런 혁신의 공간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는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