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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Property, Nation, Constitution

한국과 독일 사이에 공유된 주요 키워드 중 하나가 민주주의다. 한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이 헌법적 가치인데다 현 정부 들어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확산을 대북정책의 핵심으로 내세우고 있다. 독일 역시 통일과정은 물론이고 현재의 통합과제에도 민주주의를 핵심 원칙으로 강조하고 있다. 독일은 가장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인식되고 한국 역시 아시아에서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한 사회로 인식되고 있으니 이런 모습은 당연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회의 도중 독일 통일 직후에 유명한 정치사회학자인 Claus Offe 가 쓴 글이 생각났다. “Property, Nation, Constitution”이라는 제목으로 기억되는데 독일 통일의 주된 동력이 경제력 (마르크와 풍요), 민족애 (집합정체성과 감정), 헌법 ( 민주주의와 시민권) 셋 중 어디에 있었는가를 다룬 것이었다. 통일과정에서 독일 마르크의 경제력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고 또 동족애와 민족감정이 주요한 요인임은 많이 언급된 내용이다. 이 글은 하버마스의 제자답게 민주주의라는 원리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임을 강조했는데 시민권을 보장하고 대화를 강조하는 것이 통일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힌 글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통일과 관련하여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핵심가치가 두 나라 사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 흥미로왔다. 독일은 대화를 중시했고 한국은 자유를 강조했다. 한국이 자유를 중시한 것은 그 역사가 오래다.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좌우분열과 분단을 겪고 한국전쟁과 냉전시대를 거쳐오면서 자유는 체제이념의 핵심요소로 간주되어 공식 이데올로기로의 중요성이 부과되었다. 실제로 독립운동이나 공산주의와의 대립과 전쟁, 그리고 독재정권 하에서의 민주화운동을 관통하며 모두에게 공유된 가치의 하나가 ‘자유’였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오늘날 한국이 다양한 영역에서 역동적인 창의력을 보이고 K-Pop의 개방성과 융합성이 전지구적 관심을 끄는 배후에도 한국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이 큰 자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남북간 교류협력이 강조되던 시기에는 통일과 관련하여 자유라는 가치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정부 들어 자유는 대북정책 및 통일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강조되고 있다. 통일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기초해야 한다는 관점,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원칙의 확산’을 통일의 핵심으로 강조한 사실등이 이런 경향을 추동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내용적으로 헌법에 규정된 바인만큼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북한이 한국과의 협력과 교류를 거부하고 핵무력에 입각한 적대노선을 고집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이상 민족통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한국을 최대적으로 간주하겠다는 상황에서 자유라는 가치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북한에 대해서는 진보정권이 추구했던 교류와 협력 못지 않게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논리의 우선성을 강조하겠다는 메시지일 수 있다. 당연히 북한으로부터 ‘체제통일’ ‘흡수통일’의 지향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정부 당시의 통일대박론이 북한에게 ‘흡수통일론’으로 인식되었던 것과 유사하다.

독일측 발제에서 구동독 지역에서 AFD를 비롯한 극우세력이 높은 지지를 받는 현상과 관련하여 민주주의, 대화의 중요성이 언급되었다. 사통당 독재희생자 특임관실의 슈비더스키는 현재의 극우 부상을 ‘사통당 독재의 장기적 트라우마’와 연결시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부당한 체제의 감시와 폭력이 미친 영향은 수십년 후에 나타나기도 하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데 이런 어려움이 방치되면서 포퓰리즘이 번성할 토양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사통당 희생자 특임관 제도가 그 장기 트라우마에 공적 목소리를 부여하고 참여를 통해 심리적 위기를 극복할 계기를 만들려 한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대화와 인정이야말로 소중한 가치임을 역설했다.

작센주 장관 둘리히 역시 구동독 지역주민들의 내면에 깔린 ‘미래에의 불안’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단지 동독시절의 억압의 경험만이 아니라 통일과정에서 자신의 오랜 삶이 부정당했던 아픈 기억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부정적 기억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때에 해소가능하며 그런 긍정적 미래상을 위해서는 지속적 대화와 교육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작년 회의시 방문했던 바이써바써 지역에서도 시장은 주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 민주적 대화가 극우의 확산을 막는 관건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극우정당과 혐오문화는 독일의 현상이지만 그 기저에 깔린 사회심리적 차원은 오늘 한국의 현실과도 결코 무관치 않다. 한국사회 역시 정치가 팬덤화하고 싫어하는 집단을 악마화하는 혐오문화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특히 북한과 일본, 특정 소수집단은 정치적 논란이 심해질 때면 악마화의 대상이 되기 쉽다. 통일을 향한 길에 남북간 상호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할텐데 불신과 비난이 난무하는 현실이 걱정스럽다. 자유가 매우 중요한 가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며 오늘 한국의 발전이 자유의 추구에 힘입은 바 큼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유가 민주주의의 모든 것일 수는 없다. 자본주의와 디지털문명과 결합한 오늘의 자유주의가 많은 문제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통일이라는 미래과제와 관련해볼 때 자유라는 가치 이외에도 우애, 책임, 신뢰, 포용의 가치들이 소중하며 어떤 측면에선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함을 새삼 재확인하게 된다. 하버마스가 민주주의를 ‘의사소통’이란 말로 이해하려 했던 뜻이기도 할 터이다. 민주주의의 두 축으로서 자유와 대화를 균형있게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