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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를 위하여

약 1년 만에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을 다시 들렀다. 비가 오는 겨울 오전이어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공원 입구 기념탑에 새겨진 성인과 순교자들의 명단과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중앙 석판이 눈에 띠어 잠시 묵념을 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벤치에 누워있는 청동 나그네 상을 보았다. 웅크린 채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이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한 이웃, 또는 ‘죽었으나 살아있는’ 어떤 이를 떠올리는 듯 하여 마음이 뭉클하다.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도진순 교수로부터 ‘모든 이를 위하여’ (Love and Peace for All) 라는 제목의 특별전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과 교황청의 수교 60주년을 기념한 기획전은 규모가 크진 않으나 짜임새 있고 새로운 내용을 볼 수 있어 좋았다. 19세기 초 조선신자들이 교황 비오 7세에게 보낸 편지의 실물을 보니 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1831년 교황청이 조선신자의 열망에 따라 조선을 중국 북경교구에서 완전히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한 사실, 그 이후 숱한 순교와 박해의 시기를 넘어야 한 아픔, 기해 병오 박해에서 수난당한 79명이 1925년 복자로 추대된 역사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와 사진이 전시되고 있었다. 조선말기와 일제시대 카톨릭의 사회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석과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로마로부터 성직자의 파견을 간절히 원하고 목숨을 아까와하지 않으면서 믿음을 지키려던 이 땅의 신자들의 진정성에 의문을 표할 이유는 없다. 이들의 열망과 행동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오늘 우리는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곰곰 생각하게 된다.

‘모든 이를 위하여’는 이번 특별 기획전을 넘어 성지 역사박물관의 기본 컨셉이라 해도 좋을 듯 싶다. 다시 둘러본 지하층 상설전시에는 천주교의 전래와 실학 및 동학의 움직임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역사 속에서 이유없이 고통받고 이름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함께 기억하고 위무하는 정신이 자료의 선정과 조각 및 건물 곳곳에서 읽혀진다. 이곳이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된 장소라는 사실에 제대로 부합하는 방식이라 하겠다. 콘솔레이션 홀은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만이 아닌 모든 박해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위무하고 포용하는 공간인 셈이다. 값싼 천국의 약속을 독점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카톨릭의 잔잔한 재현방식이 내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해방직후 정부수립 과정에 카톨릭이 관여한 부분은 이번 특별전에서 새롭게 확인한 내용이다. 1947년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소속 페트릭 빈 신부가 사도좌 순지자로 한국에 파견되었던 것, 1948년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 승인을 둘러싼 유엔에서의 각축전에서 교황청의 역할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11시에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정부수립축하식 순서지를 나는 처음 보았다. 오세창 개회사, 이승만 연설에 이어 미군정의 맥아더와 하지, 유엔한국위원단의 루나, 류유완에 이어 교황청의 빈 신부가 축사자 명단에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교황청의 역할이 실질적이건 상징적이건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국제적 승인을 위해 유엔에 파견된 장면의 제1호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과 유엔총회에서의 바티칸의 관심을 보여주는 문서도 흥미로왔다. 카톨릭 신자였던 장면을 외교장관 장택상의 반대를 무릅쓰고 특사로 파견한 이승만의 외교적 감각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이전에 무심히 지나쳤던 지하 전시실의 나전칠화도 이번에는 뜻깊게 다가와 오랜 시간 그 앞에서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과 한국순교자 124위의 시복을 기념하기 위해 김경자 작가가 제작한 ‘일어나 비추어라’라는 제목의 거대한 작품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부분으로 좁게는 카톨릭 이백년사를 넓게는 한국 근현대사를 그리고 있는데 동양의 예술적 상징과 기독교적 성서관이 아름답게 혼융되어 있다. 십장생도의 미학과 불화의 분위기, 무릉도원에의 꿈도 있고 몽둥이와 칼을 든 사람들,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 예수를 품에 안은 피에타상도 있고 각국의 국기들도 있다. 일견 복잡해 보이는 이 모든 상징물들이 희생과 수난을 거쳐 모든이의 평화를 이루는 미래에의 도정을 드러내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카톨릭의 섬세한 스토리텔링과 고급한 전시역량에 또 한번 고마움을 느낀 하루다.

One Comment

  1. 박교수님의 귀한 관람기 잘 배독했습니다. 서소문 성지의 전시 뿐만 아니라, 박교수님 내면의 깊은 균형감과 배려심, 무엇보다 따뜻함을 글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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