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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칭과 탕탕평평

하바드 옌칭 한국학회 모임이 12월 13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있었다. 내가 회장을 끝낸 후인데다 정근식 회장과 한승미 교수가 열심히 준비해 주어서 편한 마음으로 참석했다. 이번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되는 영정조대의 시문과 회화전인 ‘탕탕평평’을 관람하고 ‘정조와 궁중회화’에 대한 강연을 듣기로 되어 있었다. 참석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최종고, 임지현, 김준환 교수 등 오랫만에 뵙는 분들이 여럿 계셔서 반가왔다.

발제자인 유재빈 교수는 영정조대 궁중화원제도의 변화 배후엔 시화를 통해 정치변화를 꾀하려 한 국왕의 의지가 있었다고 보았다. 도화서의 개혁, 특히 차비대령화원의 설치가 그런 의도의 산물인데 사적도, 궁중 계병, 화성원행도병 등의 제작과 유포를 통해 왕조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시문과 회화를 통해 국정운영의 변화를 꾀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는 설명이 흥미로왔다. 유교수로부터 저서인 [정조와 궁중회화]를 받았는데 부제로 달린 ‘문예군주 정조, 그림으로 나라를 다스리다’라는 말이 그런 시각을 잘 요약해주는 듯 했다. 문예군주라는 말, 그림으로 다스린다는 말에서 신선하면서도 과연?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느낌도 든다.

‘탕탕평평전’은 그런 시각을 반영한 기획인 듯 했다. 2024년이 영조 즉위 300년이 되는 해여서 영조와 정조가 글과 그림을 어떻게 국정운영에 활용하려 했는지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붕당정치의 폐해가 심했던 이 때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인재를 고루 기용한다는 기조로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탕탕평평이란 말은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이라는 [상서]의 황극조에서 나온 표현으로, 국왕의 위상을 북극성에 비유하여 임금의 중심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탕평이란 말은 인재를 고루 등용하거나 정파를 두루 포용한다는 뜻을 직접 담거나 신료들의 역할을 중시하는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임금의 역할, 국왕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전시실 입구에서 영조가 쓴 글씨를 만났다.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是小人之私意” 라는 글인데 1742년 사도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영조가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군자는 친밀하지만 편파적이지 않고 소인은 파당을 지으면서 친밀하지 않다”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라는 논어의 글을 토대로 군자의 공심과 소인의 사의를 대비시킨 것이다. 단정한 글씨체가 아름다왔고 영조의 각오나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를 느낄 듯 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죽이고 만 영조의 심경 변화와 궁중 내 정치 동학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1762년 영조가 죽은 세자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지었다는 ‘사도세자묘지’나 정조의 사도세자 추존과 어보를 둘러보면서 어지러움마저 느끼는 듯 했다.

영조와 정조는 화원들로 하여금 공신들의 초상을 제작하고 그 옆에 시를 지어 병기하곤 했다. 영조는 박문수의 초상을 제작하게 했고 대동법을 주도한 김육의 그림에 시를 지어 붙이기도 했다. 정조는 강세황의 초상을 그리게 했고 그가 죽은 후 역시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글을 보냈다. 정조가 심환지와 주고 받은 편지인 ‘어찰첩’도 전시되었는데 은밀한 편지 속에 마음속의 불안을 위무받고 싶은 국왕의 심정이 담겨 있다. 글씨는 활달하고 명필이라 할 만한데 내용은 쓸쓸하고 안타깝다. ‘화성원행도’를 비롯한 그림에서 국왕 주도의 국정운영을 시도하려는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18세기 세계사는 얼마나 격동의 시기였는지를 잠시 생각했다. 시와 그림, 화원을 통한 국정개혁이나 탕평정치의 시도는 고상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런 접근이 현실정치의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웠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文治를 강조한 유교국가의 독특함이기도 하고 강제력에 의존하지 않는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 문명사적 발전일 수는 있겠는데 그것이 ‘文弱’의 폐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무슨 조건이 더해져야 할까 생각하게 된다. 무기의 힘과 돈의 위세가 나날이 커져가는 21세기여서 더욱 그러하다.

One Comment

  1.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조의 여러 정치문화적 글들의 독자층이 내내 궁금했는데 미처 묻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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