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25주년을 맞는 국제코리아포럼 참석차 오게된 이스탄불에서 제79회 광복절을 맞이했다. 이스탄불 거리와 건물 곳곳에 걸려있는 붉은색 국기를 보면서 튀르키에 역시 국가상징을 유난히 강조하는구나 생각을 했다. 군부가 주도하여 서구적 문명국가로의 길을 연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 그와 유사한 모델로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슬람 정체성과 세속적 근대성의 공존방식을 두고 긴장이 커지고 있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되어온 민족적 자부심과 국가의식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역사박물관에서만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재확인되는 느낌이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세션에서 영국 캠브리지대학 존 닐슨 라이트 교수의 발제를 들으면서 한국에서 진행중인 역사논쟁을 떠올렸다. 라이트 교수는 ‘동아시아 신냉전 형성과정에서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제목의 글에서 미국이 지속적으로 일본 및 한국과의 연대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한일간의 여러 문제로 인해 번번히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본의 기시다 내각 출범과 한국의 윤석렬 정부 출범은 삼자협력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2023년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삼자회동이 상징하듯 한미일 협력의 강도와 수준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라이트 교수는 북중러의 위협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한미일 삼자협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면서도 여전히 한일간의 역사쟁점이 큰 장애물로 남아 있다고 보았다. 한일이 모두 직면하고 있는 포퓰리즘도 중대한 걸림돌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
광복절 당일 행사 중간 중간 한국 뉴스를 검색해 보았다. 예상대로 야권 및 광복회의 불참 속에 반쪽의 광복절 기념식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윤석렬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도 부분적으로 알게 되었다. 한일관계의 미래를 강조하면서 과거를 벗어나자 했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통일방안도 내놓았다 한다. 하지만 적절치 않은 연이은 인사들로 해묵은 역사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이나 진지한 토론과 전략적 평가가 수반되지 않은 새로운 통일방안의 제시가 얼마나 의미있는 결실을 맺을지 의심스러웠다. 평화와 우호의 한일관계를 열어가야 한다는 큰 방향은 공감되고 새로운 남북관계의 구상이 필요하다는 데도 동의하지만 정교한 로드맵이나 국민적 공감대나 상호신뢰구축의 준비 없는 선언적 논의가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움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때마침 카톡으로 이철우 교수가 동아일보에서 대담한 기사를 보내주어 읽었다. 착잡한 심정이 더해졌다. 대통령 주위에 아마도 한미일 연대를 위해 역사논란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조언을 하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외교안보의 중요성을 내세워 역사논란을 장애물로 여겼을 수도 있겠다. 어떠하든 그런 인물들을 중용한 대통령 책임이 아닐 수 없다. 광복절 행사논란을 보면서 해방 직후 3.1절 기념식을 둘러싸고 좌우진영이 대립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그때도 한반도 상황은 미소의 전략적 입장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국제환경의 조건을 강조하고 그 흐름과 함께 가는 체제수립을 추구한 세력이 남북한에서 권력을 잡았다. 민족자주론은 내부적으로는 대중의 심정적 공감을 불러올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허약할 수밖에 없는 자기중심적 대응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로부터 8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세계는 분열되고 강대국간 대립은 심화되면서 신냉전의 도래가 운위되는 형국이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진행중이고 동아시아가 다음 격전지가 될지 모른다는 염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북한의 위협은 커지고 북중러 연대도 강화되는 상황에 미국은 고립주의의 유혹을 받고 있다. 큰 전략적 사고와 외교적 지혜가 절실한 시기에 여전히 우리 논의가 친일논쟁, 과거사 논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우려스럽다. 대중의 지적 자폐증, 포퓰리즘의 문제도 있지만 이런 잠재적 우려들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우리 정치권의 문제가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상황이 초래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중지를 모으기는커녕 오히려 역사논쟁의 자중지란을 벌이게 만든 윤석렬 정부 거버넌스의 편협함과 무감각이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