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수업에서는 학생들에게 한 학기에 7-8 차례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요구한다. 한두번의 시험으로 성적을 평가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불합리하기도 해서 학생 개개인의 글쓰기 수준이나 생각의 깊이를 확인할 기회를 확대한 것이 그 첫 이유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에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을 조건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 개개인의 진솔한 생각을 정리해보고 다른 친구들의 견해와 비교해보는 간접토론의 효과를 기대한 것도 그에 못지 않은 의도다.
실제로 그런 효과가 제법 뚜렷하다. 모든 글쓰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몇 주제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견해들이 제시되고 그 차이를 요약해주고 서로 의견을 주고 받게 하면 꽤 진지한 토론이 오가는 것을 확인했다. 때로는 문제 자체가 너무 거창하고 손쉽게 결론내리기 어려운 것들이어서 과연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까 싶은 것도 있지만 글 속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 이유를 분명히 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학기 초에 엉성한 글을 쓰다가 점차 자기 생각을 뚜렷하게 피력하는 경우를 보노라면 나름 괜찮은 훈련이 된다는 생각도 든다.
평가할 자료가 많아지면 채점은 그만큼 피곤해진다. 단지 양이 많아서만 아니라 주제에 따라 학생들의 글내용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나름 애써서 자기 생각을 서술한 보고서를 객관적인 지표에 맞춰 평가할 기준도 없고 엉뚱하지만 재미있는 글을 만나면 어떤 점수를 주어야 할지 한동안 고민에 쌓이기도 한다. 성적 평가에서 겪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다양한 생각을 접하는 즐거움이 생각보다 크다. 이들이 MZ세대 전반을 대표하는 집단일 수는 없지만 간간히 신선한 의견이나 개성적인 주장을 만나면 요즘 세대의 감각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내가 대학생일 때 저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후생이 가회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에 평가하면서 본 흥미로운 견해들 두어가지 정리해본다. 뒤르켐의 시민종교 개념을 오늘 한국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수강생의 80% 정도는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한국도 애국심이 강하고 축구나 문화 영역에서 강력한 동일시가 나타나고 있음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런데 20% 정도는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그 이유는 개인주의와 아노미 수준이 매우 강하여 국가공동체에 대한 관심조차도 개인의 이익추구에 종속되기 때문이라 했다. 전쟁희생자나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들에 대한 존경심이나 명예부여의 수준이 매우 낮다는 것이 그런 기저를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주장인데 흥미로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베버의 합리화에 대한 논의를 근거로하여 한국사회가 과잉합리화 상태인지 아니면 합리성의 부족 상태인지를 물어본 질문에 대한 대답도 흥미로왔다. 대부분 과잉합리화라고 대답했는데 주로 단일한 성공도식, 성적 중심의 교육, 지나친 경쟁문화를 그 결과로 지적했다. 돈이 최고 가치가 되는 현실이 과잉합리화의 징조라고 지적한 글도 눈에 띄었다. 동시에 한국사회는 합리성이 퇴조하고 있고 집단주의와 정서적 휩쓸림이 지배하는 비합리화가 진전되고 있다고 주장한 학생도 있었다. 형식합리성과 가치합리성의 불일치와 모순이 심화되면서 합리성 전체의 기저를 흔들고 있다는 주장도 보였다.
복합적인 문제가 속출하는 21세기에 과학적인 대응과 인간적인 소통 중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할지에 대한 물음에는 후자에 손을 든 학생들이 많았다. 과학기술대학에 재학한 젊은 세대의 반응인데 다소 의외였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의 한켠에 나름대로 공동체적 지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개성적이고 다양한 견해들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저들 세대의 특징일수도 있겠다. 경청할만한 의견들을 읽는 즐거움이 있어 채점의 수고를 꽤나 상쇄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