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예배시간에 설교로 듣고 찬송으로도 부른 성구가 있다. 요엘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사도행전에도 언급된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는 메시지다. 예언, 환상, 꿈이란 말의 신학적 차이나 의미론적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가 현실을 넘어서는 미래에의 지향을 논한 것이란 공통점이 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미래를 향한 기대가 필수적인 바, 특히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그러하다는 깨우침으로 묵상할 좋은 화두다.
나는 수년 전 한국사회학회장 취임논문으로 ‘희망의 사회학’을 발표했었다. 사회학이 비판과 부정의 날카로움을 넘어 비전과 약속을 제공하는 따뜻함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논지였다. 근대 이래의 사회학, 특히 한국의 사회학 담론이 비판적 분석에는 능한데 건설적 통합력과 희망적 역동성을 주는데는 취약하다는 내 평소의 생각이 반영된 글이었다. 후배인 김홍중 교수가 내건 ‘마음의 사회학’ 문제의식이 나와 공감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 김 교수와 함께 “꿈자본과 청년층”을 주제로 한 공동연구를 추진했고 [꿈의 사회학]이란 제목의 책을 공동으로 편저하기도 했다. 젊은 세대가 미래를 향한 꿈을 키워가기 어려워지는 현실에 대한 분석, 그럼에도 꿈을 잃지 않고 형성하는 내면의 능력은 여전히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 학문적 노력이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 연장선으로 광주과학기술원에 와서 ‘꿈의 사회학’이란 과목을 개설하고 강의해온지 벌써 3년이 지났다. 근대 개방사회에서 사회이동이 확대되고 능력주의가 발휘되던 상황을 검토한 후, 21세기에 들어 이전과 달리 상승이동의 기회가 줄어들고 성공사다리가 닫혀가는 현실에서 꿈의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수업이다. 개인이나 집단, 기업이 더 나은 미래를 기획하고 추구하며 창의적인 목표를 달성해온 역동적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각자 개인이 품고 있는 인생설계, 미래목표의 내용과 전망을 점검하는 기회를 가져보곤 한다. 민족과 국가 차원에서 거대한 꿈을 공유함으로써 공동체의 통합과 대규모 동원을 이루어온 사례들도 검토해 보면서 꿈의 다면성과 역설적 모습도 이해하도록 했다. 다행히 학생들의 관심은 나쁘지 않아 정원을 급방 초과할 정도로 인기과목이 되었다. 강의를 거듭할수록 꿈자본을 강조하는 것이 희망고문이 되지 않을 조건이 무엇인지, 기회구조가 축소되는 구조적 차원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등 더 많은 숙고와 탐구과제에 부딪치지만 내 스스로에게도 좋은 지적 자극을 주는 수업이 되고 있다.
나는 꿈의 주체로 청년층을 상정하고 강의해왔다. 수강생이 대학생이라는 이유가 크지만 꿈은 특히 미래세대의 몫이라는 내 나름의 문제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모든 세대를 포괄하면서 특별히 노인을 꿈의 주체로 서술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성경의 메시지가 자녀, 청년, 노년의 세대적 구별에 관심을 둔 것은 물론 아닐 터이다. 또 예언, 환상, 꿈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보다는 현실의 조건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경험이 모든 세대에게 공통으로 필요함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쨋든 꿈의 주체를 청년으로 한정하거나 특정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어려운 시대, 흉흉한 세상에는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에게 절실한 것이 미래에 대한 기대, 희망, 꿈일 수 있겠다. 어떤 점에서 죽음을 앞두고 인생을 정리해야 할 노인들에게 꿈이 더 필요할지 모르며, 상황이 암울할수록 희망은 더욱 절실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된다.
노인의 꿈은 무엇으로 구성될까? 나 자신이 70을 바라보는 상황이 되고보니 이 질문은 더욱 절실한 바 있다. 사회적 역할과 가장으로서의 책무가 어느 정도 끝난 시기인만큼 새로운 할 일을 찾아 발버둥칠 이유는 없다. 인생의 노년기에도 여전히 세속적인 성공이나 욕망충족의 꿈을 견지한다면 자칫 노추나 노욕의 부끄러움을 뒤집어 쓸 수도 있으니 조심할 일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목표나 지향도 없이 하루 하루 소일하는 것이 좋은 태도라 하기도 어렵다. 노욕이나 노추가 아닌, 신선하면서도 아름다운 노인의 꿈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강의실이 아닌 내 삶에서 풀어야 할 질문이자 숙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