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오늘의 화두

레트로와 한시

정신없이 변하는 시대에 일부나마 레트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반갑다. 오래된 것을 낡고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흐름이니 경박한 시대의 무게잡기 같은 느낌도 있다. 사실 레트로 현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근대를 열었던 르네상스도 고대로의 회귀를 지향한 것이었고 중국의 제자백가도 성인이 다스렸던 시대를 준거로 삼아 출현했다. 현대문명에 반기를 든 낭만주의 예술사조나 공동체 운동들도 농경시대의 자연상태를 이상화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미학적 레트로라 할만하다.

인공지능과 디지털의 시대에 레트로를 제대로 실현하기는 어렵다. 전원생활을 희망하고 목가적인 여유를 좋아한다고 도시적 활력과 편리함을 마다하기는 불가능하다. 과거의 안정이 그립다고 현대의 자유로움을 포기할 수도 없다. 더구나 옛 방식을 수용하려면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 심지어 꽤 비싼 비용지불이 불가피하다. 고미술품이나 클래식 음악, 진공관 오디오를 즐기려면 상당한 경제적 자산과 문화적 지식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레트로는 역설적으로 고급한 취향, 상층계급에게만 가능한 문화자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짐멜이 설파한대로 모방이 대세가 된 유행의 시대에 굳이 원본성과 고급함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이 온갖 형태의 변형과 복제, 공유를 가능케 한 탓에 골동품을 흉내낸 값싼 품목들을 시장에서 구입하기 어렵지 않고 디지털로 복제한 아날로그 음원을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대형 건물의 화면으로 아마존 밀림과 초가집 풍경이 비치는 것처럼 이미지만 과거의 것일 뿐 실제로는 첨단의 기술과 현대적 욕망이 담겨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레트로는 더 이상 상층의 값비싼 문화가 아니고 각자의 조건과 처지에 따라 필요한 형태의 취향을 향유하는 소비상품이자 대중문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작년 세모에 수하 김길중 교수께서 화묵회 전시회에서 만나 이야기 나눈 소회를 담아 7언절구 한시로 안부를 전해오셨다. 한시를 지으며 교분을 나누는 취미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회 (詩會) 에서 보던 고급한 옛 문화양식인데 한자를 사용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어진 21세기에 한시를 매개로 한 안부라니 – 대단한 레트로가 아닐 수 없다. 한시를 쓴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생각을 하기조차 어려운 역량이 필요한 고상한 취향이다. 이런 레트로가 완성되려면 같은 한시로 화답하는 동료 시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어슬픈 한시 한수를 지어 회신을 했다. 주고 받은 한시는 다음과 같다.

靜軒書風多年熟 / 今日始遇論筆墨 / 聊聊半天忘時間 / 和樂和詣人與書 (정헌선생 글씨 품격은 여러해 째 익숙한데 / 오늘에야 비로소 만나 필묵의 담론을 나누네 / 이런저런 얘기 반나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 즐겁게 편안하게 사람과 글씨가 함께 했네)

樹下名聲多年聞 / 今日又識高人品 / 節近歲暮路多音 / 何不樂與墨紙香
(수하선생 명성 들은지 오래인데 / 오늘에야 다시 그 인품 높음을 알았네 / 계절이 세모에 가까와 길에 시끄러운 소리 많으니 / 어찌 종이와 먹의 향기와 더불어 즐기지 않으랴)

내가 쓴 한시는 제대로된 운율이나 격식을 갖추지 못한 짝퉁 작품이다. 한시작법을 중시하는 분에게는 비난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흉내내기가 레트로의 한 형식이고 모방이 주요한 활력소가 될 수 있음도 인정할 필요가 있으리라. 한시를 반드시 화선지에 붓으로 쓰지 않고 카톡으로 간단히 주고 받는 것 자체가 21세기적인 변형이고 새로운 양식이다. 날로 발전하는 기술환경을 활용하여 SNS 첨단 메신저 + ‘시회’라는 형식 + 진솔한 정서의 교감 = 또 하나의 레트로 문화로 이어질 수 있으면 싶은데, 한시의 장벽이 너무 높다. 우리말로 된 시로서도 시회는 가능할터이나 그것이 레트로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쨋든 예상치 못한 레트로의 경험이 주는 감각은 상쾌하고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