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주변에서 예정된 회의 시간이 남아 국립현대미술관을 들렀다. 큰 기대 없이 갔는데 마침 김구림 전과 백투더퓨쳐 전시가 있어 좋은 시간을 가졌다. 백투더퓨쳐 전은 1990년대의 몇 작가와 작품을 통해 이 시기의 역동성과 이질성을 탐구한다는 의도로 기획된 전시다. 동명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전시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 현재와 미래의 혼재, 긴장, 불일치를 드러내려는 전시여서 최근 ‘문명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로선 더욱 관심을 갖고 둘러보았다.
작품들의 형식과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회화 형태와는 크게 달랐다. 사회적으로도 그러했지만 미술계에서도 디지털 이미지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시도와 긴장이 커진 것이 1990년대였다고 한다. 현대미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작품 하나 하나에 대해 어떤 감동을 얻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불일치의 활성화, 이질성과 비평적 시공간, 미래간섭 혹은 미래개입 등의 설명을 읽으면서 이 격동의 시대를 되돌아볼 수는 있었다. 이질화와 혼성화의 충격, 불일치의 활성화, 미래개입 같은 개념은 마치 문명사를 서술한 책의 챕터와 유사해서 사회학적 문제의식과도 잘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이번 학기 수업에서 간간히 언급했던 엘빈 토플러의 [미래충격]을 떠올리면서 이 전시를 둘러보았다.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기획전과 달리 김구림전은 한 작가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개인전이었다. 김구림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활동해온 전위예술가의 한 명이다. 나도 그 이름은 들어본 바 있으나 실제 그의 작품을 이처럼 본격적으로 관람한 적은 없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하여 통상적인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고 일종의 설치미술적 성격도 있어 낯선 느낌도 적지 않다. 빗자루, 걸레, 의자 등 일상에서 발견되는 소품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배치하고 조명과 컬러를 더한 작품으로 문명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전위적인 분위기도 강하다. 그 독특한 분위기는 분명 강렬하게 다가오는데 내게 익숙한 예술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음-양’ 시리즈라는 제목이 내겐 어떤 힌트처럼 다가왔다. 음-양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어두움과 밝음 등 만물과 역사의 총체적 인식에 불가결한 사유의 틀이다. 오브제와 이미지를 혼합한 작품들을 제작하는 김구림 작가에겐 적절한 연작 컨셉이었을 법하다. 관람자로서도 다양한 메시지 해석이 가능한 제목이어서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내 마음대로 상상해 볼 여지를 주어 좋았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부분은 주로 바이올린 악기 몸통을 활용하여 여성의 몸과 임신, 출산과 생명의 연속성을 드러내고자 한 일련의 작품들이었다. 여성의 몸을 통해 남녀가 사랑하고 인간의 생명이 잉태되고 세대가 이어지면서 인류가 존속해올 수 있었던 것, 이를 통해 음과 양, 육체와 정신, 지배와 헌신 등 복합적인 변증법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다소 선정적일 수도 있어 보이는 방식으로 바이올린의 몸통을 변형하고 다양한 소재들과 결합시킨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이번 학기 다루었던 ‘포스트휴먼’의 쟁점, 기계와 생명, 인간과 자연, 탄생과 소멸 같은 우주론적 의미를 연결해 보기도 했다. 21세기 미래에서는 텍스트와 이미지, 예술과 학문,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가 계속 크로서오버되고 융복합되면서 재구성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