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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과 사상

월봉저작상 운영위원회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이선민 전 조선일보 문화부장의 서울대 박사학위수여를 축하하는 모임을 10월 25일 조선호텔 중식당에서 가졌다. 심사위원인 이기동 교수, 도진순 교수, 나를 위시하여 한경구 교수, 이철우 교수, 일조각 김시연 사장도 자리를 함께 했다. 학부에서 한국사를 전공한데다 문화부기자로서 역사관련 지식과 정보가 풍부하고 필력이 좋은 것이 연구의 큰 자산이 되었겠지만, 뒤늦게 자료를 찾아 학술논문을 작성하고 학계의 까다롭고 성가신 심사절차를 밟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여 영예의 학위를 수여받은 것에 모두 경의와 축하를 보냈다.

돌아와 논문을 살펴보니 제목이 “대한제국 후기 정치세력과 민족운동 연구”라 되어 있다. 1904년 이후의 수년간을 ‘대한제국 후기’라 이름한 것이 우선 눈에 띤다. 이기동 교수도 잠시 언급했지만 대한제국 자체가 10여년 짧은 시기인데 전기, 후기를 나눌만큼 충분한 근거가 있을지 논란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애국계몽운동기 또는 국권상실기 등으로 불리우던 시기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시대상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해 준 것이 신선한 느낌도 없지 않다. 이박사는 이 시기에 한국의 새로운 정치세력이 성장, 분화되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논문에서 다룬 주제와 쟁점들 중에는 나도 더러 다루어본 내용들이 적지 않다. 종교로서의 동학과 1894년의 농민전쟁, 진보회와 일진회, 안창호와 미주국민회, 천도교의 성격과 지향 등은 이런 저런 계기로 논문도 쓰고 발표도 했던 주제다. 특히 전북대 시절엔 호남지역의 지방사와 농민사를 천착하는 한편으로 한국근대사상사에도 관심을 가졌던 바여서 이 논문이 다루는 쟁점들이 낯설지 않았다. 다만 그 시절의 나는 정치사나 국가사보다 운동사나 지방사에 좀더 주목했던 탓에 이박사의 논문이 주목한 큰 흐름에 대해선 다소 관심이 덜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박사 논문은 대한제국 후기의 ‘신흥 정치세력’의 등장과 이들의 ‘민족운동론’을 검토하는 것이다. 신분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향반,서얼,중인층이 부상할 수 있었고 지역적으로는 평안,함경지방의 중앙진출이 가능해져 새로운 정치세력이 대두될 조건이 마련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배경에서 안창호와 국민회의 재미한인, 손병희 천도교와 동학 세력, 그리고 대종교로 이어지는 개신유학자 집단의 세 정치세력이 유의미하게 형성, 분화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 세력들의 지향을 각기 국민국가론, 부강발전론, 국수보전론으로 개념화해서 대비한다. 격동기의 흐름을 비교적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분석틀이라 할 만하다.

흥미롭고 중요한 연구라 생각되지만 ‘정치세력’ 형성의 실상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좀더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상이한 ‘민족운동론’의 분화는 기존 연구들에서 언급된 내용과 크게 다른 바가 아닌 듯 해서 개인적으로 정치세력의 기반에 대한 설명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도 일본의 도막파 세력과 한국의 개화파 세력을 대비하려 시도한 바 있었는데 ‘사회세력’의 분석이라 할만한 자료확보가 일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뜻을 이루지 못한 경험이 있다. ‘정치세력’이라 이름할 만한 사회세력의 형성을 논하려면 그 정치적 지향이나 사상적 동향보다도 핵심 인물들의 결집도, 광범위한 사회적 네트워크, 동원가능한 물질적 자원, 외부세력과의 연결, 내부의 정세판단 등이 소상히 확인되어야 한다. 세력화의 수준, 조직화의 정도, 물적 동원 역량 등을 평가할 수 있을 종합적인 변수분석이 이루어져야만 사회적 세력분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도 국민회, 천도교, 대종교라는 조직기반과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밝히고 있고 안창호, 손병희, 신채호 등 주도적 인물의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기에 그런 문제의식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세력화의 수준이나 정도, 역량의 입체적 분석에 이르기에는 미시적 자료나 인물간 네트워크의 강도, 자원동원의 수준과 실제 상황에 대해 객관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어쩌면 정치세력과 ‘민족운동론’을 연결시키려는 틀 자체가 정치세력화의 분석보다 민족운동론의 유형화로 이어지도록 만들었을지 모르겠다. 사상적 지향과 관련해서도 ‘민족운동’이라는 틀을 넘어서는 스펙트럼을 구상할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랜 중화적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제질서로 이행하는 격동기에는 국가와 민족의 뱔견 못지 않게 세계와 개인의 발견도 결정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안창호와 신채호의 차이를 국민국가론과 국수보전론으로 대비하는 틀을 넘어서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의 긴장이 이 즈음 시작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사상적 분화의 계기에 대해서도 좀더 천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향후 이박사의 활발한 연구활동을 기대해 본다.

One Comment

  1. 퇴직 이후에도 신진 연구를 제때 소화해내는 박교수님,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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