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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과 공격성

역사학자 임지현 교수께서 조선일보에 쓴 컬럼을 보내주셨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 역사의 복수는 무섭다”는 제목을 단,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상황을 다룬 글이다. 임교수는 내게 ‘잡문’이라 했지만 내용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이스라엘이 건국 직후 홀로코스트보다 바르샤바 게토봉기를 더욱 부각시켰던 사실에 이 글은 주목한다. 나찌의 폭력 앞에 수백만이 희생당한 홀로코스트 비극은 유태인의 가장 분명한 상징이 되었지만 새 국가 건설을 주도한 사람들은 이것을 건국정신으로 내세우기엔 부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무기력한 비극적 희생서사보다 고대 마사다 영웅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1943년의 봉기를 더욱 부각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임교수는 이 두 역사적 경험을 기억하는 태도 속에 피해자 정체성과 가해자 심성이 공존함을 지적했다. 피해자의식이 가해자 심성에 정당성을 부여해 ‘역사’를 앞세운 복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라는 분석인데 일견 공감이 간다.

홀로코스트를 겪었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이웃에게 가해적 군사행동을 주저하지 않는 현실은 분명 역설적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이스라엘 특유의 이상행동이라 볼 수는 없다. 세계 곳곳에서 희생자 감정을 앞세운 혐오와 배타의 움직임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임교수는 이런 변형된 공격성이 한국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우려한다. 오랫동안 한국의 민족주의는 공격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져왔기에 그런 우려가 생경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적지 않을 터이다. 한국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그런 관점이 강하다. 하지만 한국민족주의의 종족성, 공격성, 배타성을 지적하는 글들도 꾸준히 증가해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에 평화지향적인 면모가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피해자로서의 경험을 내세워 거친 공격성을 정당화하려는 경향도 종종 드러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핵무력을 강조하면서 공격적 군사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북한의 존재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것으로 만드는 주요한 변수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면서도 연합군의 반격에 초토화되었던 전쟁피해 경험을 북한은 지금도 체제방어의 주요한 논리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국사회에는 전쟁으로 가족과 재산을 잃고 고향을 등지고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많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커질 때마다 당위적인 평화론이나 단일민족론으로 치유되기 어려운 피해자 감정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독립운동사, 한국현대사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의 바탕에는 수십년간 해소되지 않은 채 잠복해 있는 정서를 어떻게 기억하고 전승할 것인가에 대한 복잡하고도 결이 다른 지향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 화해와 통합의 과정에서 민족감정의 사회적 동원은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희생자 정체성을 앞세운 배타성과 공격성이 낯설지 않게 드러나는 오늘, 우리의 집합의식을 민주적으로 규율하고 고양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피해자 의식이 가해자 심성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만 그것을 명분이나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것만으론 충분할 수 없다. 개성과 자율, 인권과 다양성이 몸에 밴 21세기 젊은 세대들의 생활감각을 남북한의 평화와 통합의 동력으로 잇는 실질적이고 다면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전쟁과 분단, 대립과 불신, 기대와 배반의 뒤틀린 경험을 혐오와 증오의 확대재생산이 아닌 상생과 통일의 동력으로 전환시킬 방안을 찾는 것 – 우리 앞에 놓여진 중요한 정치적 과제이자 사상적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