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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언덕과 이상백

대구의 청라언덕 일대를 둘러보았다. 광주의 양림동 역사문화거리와 함께 한국근대의 교육, 의료, 선교, 민족운동의 상호관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마침 계명대학을 방문할 일이 생겼는데 동대구역에서 멀지 않은데다가 박해남 교수가 차편으로 안내해 주어서 뜻깊은 답사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의 동무생각 노래 덕분에 ‘청라언덕’이 유명해지고 애틋한 우정과 사랑의 장소처럼 일반인에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곳을 찾을 기회를 가졌거나 이 지역의 역사성을 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대구의 31운동 기념로 및 근대탐방로가 정비되어 있고 구 동산병원과 제일교회 일대의 유적지와 손쉽게 오갈 수 있게 되어 천천히 둘러보며 역사를 회고하기에 좋은 곳이다.

청라언덕은 말 그대로 언덕의 이름일 뿐이어서 가시적 상징물은 없다. 하지만 약령시 쪽에서 제일교회를 끼고 계명대 동산병원으로 넘어오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노라면 꽤 경사가 느껴지는 확실한 고개길이다. 20세기 초반, 이 언덕길을 넘어 다니던 젊은 청년들이 근대식 학교와 병원, 교회와 양옥의 이국적 풍광을 접하면서 문화충격을 겪었을 것이다. 간간히 애틋한 연애도 하면서…청라란 이름이 선교사 주택을 뒤덮은 푸른 넝쿨, 즉 담쟁이로부터 유래했다고 하는데 현재 그런 연관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언덕 바로 옆이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주택이고 그 가까이에 아담한 선교사 묘역도 자리하고 있어 그 연결성을 짐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한동안 대구를 상징했던 사과가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그 효시도 선교사들의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니, 동무생각 노랫말 만으로 이 공간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은 셈이다.

청라언덕을 내려가 큰 길을 하나 건너면 오랜 성당을 만나고 그 오른편으로 이상화 고택으로 이어진 거리가 나온다. 꽤 규모가 있는 한옥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입구엔 이상화의 얼굴과 시가 적혀 있고 집안에는 책상과 당시 형제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소품들이 배치되어 있다. 셋째인 이상화가 워낙 널리 알려진 탓에 이상화 고택으로 명명된 곳인데 사실 첫째 이상정과 둘째 이상백도 못지 않게 탁월한 인물이다. 특히 나로서는 한국사회학의 태두이자 역사사회학의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이상백 선생이 훨씬 더 가깝고 또 중요하게 다가온다. 어쨋든 한국근대의 명실상부 최고 가문이라 할 집안을 둘러보는 감회가 새로왔다. 그 옆에는 대구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서상돈의 고택이 이어져 있어서 개화기 대구지역의 변화와 역동성이 이 주변에서 힘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서상돈의 집은 아파트 건축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재건된 것이라 하는데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아담스, 이상화, 이상백, 서상돈, 이은상, 박태준 / 청라언덕, 선교사 묘역, 동산병원, 제일교회, 계명학교 – 이 독특한 사람의 인연과 공간의 연결을 생각하며 일대를 걷다보니 ‘근대’라는 시대를 단일한 이미지로 포착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오히려 온갖 빛깔을 지닌 무지개, 아니면 다양한 색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중학생 팔레트 같은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한쪽에는 신문물과 계몽과 혁신의 역동성이 희망을 전하고 다른 한켠에는 울음과 고뇌와 싸움과 배반의 역사가 놓여있는 대조적 모습, 그런가하면 질병과 치유와 죽음과 영생이 뒤엉키는 삶과 역사의 복합적 측면을 담고 있는게 근대사이기 때문이다. 이 온갖 성격을 담고 있는 근대의 역사를 때로는 눈부신 흰색 때로는 어두운 잿빛의 단색으로 그려보려던 지난날의 지적 성급함을 세종으로 돌아오는 기차속에서 계면쩍은 마음으로 되돌아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