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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와 세계평화

제주의 사회사와 여성사를 진지하게 연구해온 권귀숙 교수가 영문으로 묵직한 책을 출간했다. The Island of World Peace : The Jeju Massacre and State Building in South Korea 라는 제목의 책인데 Lowman and Littlefield Press 에서 2023년 올해 간행되었다. 켐브리지 대학 권헌익 교수를 비롯하여 전세계의 뛰어난 학자들이 공동 연구해온 Beyond Korean War 국제 냉전사 프로젝트의 한 중요한 성과물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가운데 전세계가 다시 신냉전의 시대로 회귀하는 듯 갈등하고 있는 오늘, 한국전쟁과 전지구적 냉전, 그 복합적 영향을 다양한 시각에서 재조명하려는 국제적 연구기획이 뜻깊은 학술적 성취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권귀숙 박사의 이 책은 부제가 말하듯 제주 4.3 학살사건과 한국의 국가건설을 두 축으로 해방 이후 반세기 변동을 장기사회사의 맥락에서 추적한 것이다. 기존 연구들은 주로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남북한에서 진행된 냉전적 이념화, 한편의 반동분자 색출과 다른 한편의 공산주의자 척결이 분단국가 형성에 어떤 역할을 미쳤는지를 주목해왔고 적지 않은 성과들이 축적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은 21세기 최근까지 반세기 이상의 긴 시간 속에서 4.3의 비극이 어떻게 기억되고 억압되며 재구성되고 재평가되었는지의 장기사적 프로세스에 더 주목한다. 이 과정은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국제적으로는 탈냉전, 지성사적으로는 젠더와 문화의 부상과 직결된 세계사적 역동성을 포함한다. 이 책은 4.3 을 둘러싼 오랜 논란, 곡해, 억압과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끈질긴 싸움, 증언, 기억의 충돌, 그 속에서 진행되는 통합과 화해와 해석의 긴장과 성과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책의 목차구성이 저자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목차는 해방후 상황을 서술한 Beginning을 첫 장으로 State Violence, Reintegration 1, Reintegration 2, Reconstruction , Reconciliation 장을 거쳐 결론으로 이어진다. 마치 한편의 장편 드라마 구성같은 기승전결의 입체감이 느껴진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저자가 붙인 개념들이다. 저자는 4.3 사건을 state violence로, 한국전쟁을 reintegration 1 로, 귀신잡는 제주해병을 reintegration 2로, 제주 여성의 독특하고도 다양한 역할을 reconstruction으로, 제주평화공원 건립과정을 reconciliation으로 병기했다. 국가폭력으로 깨어지고 파괴된 새 시대의 꿈이 여러 형태의 재통합 과정을 거치고 재구성되며 재화합되는 역동적 경로를 해명하려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것 아닌가 싶다. 결론의 장과 책의 제목을 세계평화의 섬이라 붙인 이유는 이런 변화의 지향점이 ‘세계평화’가 되어야 하리라는 저자의 신념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뭍혀있던 사실을 드러내어 알려주는 부분 못지 않게 이 개념들의 연쇄가 주는 지적 상상력이 새롭게 다가온다.

제주 4.3은 지역사회의 오랜 수고와 뜻있는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그 역사적 평가가 일단락되고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위무와 보상도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해석을 둘러싼 논란과 폄훼가 끊이질 않는 현안이기도 하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신냉전 상황이 심화되면서 이념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 해석과 재해석에 이은 또다른 해석갈등이 등장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럴 수록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고 비난의 화살을 어디로 쏠 것인가에 집중되던 시선을 미래와 세계를 향한 평화의 기획으로 향하도록 하는 노력은 소중하다. 전체사회사의 맥락에서 냉전시기 한 지역이 겪게된 통합과 대립, 해석과 반해석의 역동성을 세계평화로의 긴 여정으로 밝히려 한 이 책이 이 시점에서 간행된 것이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인양 느껴진다. 나는 저자가 사용한 개념들을 보면서 재통합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재구성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재화합이란 또 어떤 함의를 지니며 그것이 종국의 결론인 World Peace로 이어지는 경로는 또렷한가 등 흥미로운 물음들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을 느낀다.

제주의 길고 고통스럽던 역사적 드라마를 지역주민의 원한해소나 국내정치적 논란으로 연결하지 않고 세계평화로 나아가는 뜻있는 여정이기를 바라는 저자의 구상이 실로 원대하고 신선하다. 제주출신자가 아니면서 제주를 사랑하는 제주인이고, 미국 명문대에서 학문적 훈련과 학위까지 받았으면서도 이를 내세우지 않고 현지 주민들의 경험과 생각을 존중할 줄 아는 저자의 지적 성실함과 균형감각 덕택이 아닐까 싶다. 권박사는 감사의 말에서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국내외의 많은 학자, 활동가 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서귀포에 앉아서 세계의 석학들과 교유하고 문제의식을 주고받는 21세기형 학자의 전형을 보는 느낌이다. 자신이 몸담고 살아온 지역의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애환과 바람, 갈등과 아픔들을 외면하지 않고 담담히 진지하게 서술하고 정리한 저자의 수고가 제주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자산이 될 것이라 믿는다. 오랜 시간과 힘든 수고를 요하는 영문저술을 노학자 그룹에 속하는 시기에 마무리한 권교수의 열정과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