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vities

한국개념사의 완성?

강인철 교수가 또 기념비적인 연구서를 출간했다. [민중의 개념사]를 “저항하는 주체-이론”, “시대와 역사속에서 -통사” 2권으로 다룬 책인데 도합 1,200 쪽을 넘는 대작이다. 각주만으로 300쪽에 달하는 상세한 자료검토, 수많은 논저와 매체의 정치한 분석이 놀랍다. 이런 작업이 얼마나 많은 땀과 수고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실물로 보여주는 듯하다. 강교수는 진지하고 뛰어난 연구자로 정평이 나 한국사회사학회가 수여하는 최재석 학술상 1회 본상을 수상하는 등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또 하나의 큰 성취가 더해졌다. 나이와 무관하게 지적 역량이 나날이 커지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강교수가 그 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 강교수 덕에 우리 학계의 자산 리스트가 그만큼 풍요해졌으니 감사한 일이다.

고맙게도 보내온 책 속에 강교수가 쓴 감사의 편지가 함께 들어있었다. 이 책을 구상하고 완성해 가는데 내가 썼던 [국민, 인민, 시민]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고 실제로 곳곳에서 내 책을 인용하고 있다. 과분한 평가를 받은 듯 민망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내가 그 책을 쓰면서 가졌던 문제의식과 생각을 강교수가 가장 잘 이어주고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보람을 느꼈다. 개념사 연구를 하면서 점점 명료해진 생각이 개념사와 정치주체형성사, 사회사와 사회운동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내 책을 출간할 때 출판사가 난색을 표했음에도 굳이 “개념사로 본 한국의 정치주체”란 부제를 제목에 병기할 것을 고집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능력과 시간이 모자라 내 생각을 충분히 또 깊이있게 탐구하지 못하고 소략한 검토로 그칠 수 밖에 없었는데, 강교수의 이 책이 그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멋지게 구현해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책에서 국민, 인민, 시민, 민족, 민중이 한국의 정치주체를 분석하는데 필수적인 다섯 개념이라고 언급했었다. 전통적으로 일반 사람, 백성을 지칭하던 ‘인’, ‘민’ 어휘가 역사속에서 변형되고 재구성되면서 여러 개념들을 낳았는데 근대변혁기에 위의 다섯 범주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강교수는 이 다섯 범주에 ‘계급’을 더해 ‘6대 정치주체 개념어’로 확장시켜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일견 공감이 가는 제안인데 그런 맥락에서라면 젠더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지난 수년간 박찬승 교수가 민족, 민족주의에 대한 개념과 운동의 종합 연구서들을 출간했고 김경일 교수는 노동 개념의 역사와 일제하 노동운동사를 통해 계급이 한국사회에 출현하는 과정을 탐구해왔고 여성사에 대해서도 주목할만한 성과를 출간했다. 이번에 강교수가 민중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을 완료하고 대작을 출간함으로써 한국개념사의 큰 그림이 얼추 마무리된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한국사회사학회에 속한 여러 동학들이 이 큰 지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자축하며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요즘 상황을 보노라면 현대 한국의 정치주체와 관련하여 ‘개인’의 출현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과제로 부각되는 느낌이다. 분할 불가능한 주체로서의 in-dividual은 헌법적 주체, 인권의 담지자로 간주되고 있지만 개인 역시 역사적인 범주이고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형성되어 나온 주체다. 따라서 개인을 원천적으로 주어진 인간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고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체성이 형성되었는지를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요즈음의 MZ 세대는 개성과 취향을 강조하면서 국민, 인민, 시민, 민족, 민중, 계급, 젠더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별적 정체성을 전례없이 또렷하게 드러낸다. 그것이 신 앞의 단독자 의식에 바탕을 둔 서구의 개인과도 상당히 다른 것임은 분명한데 그 차이와 특성을 명료하게 밝히는 개념사적 탐구 없이는 설명이 어렵다.

한국형 개인은 개성과 자유를 강조하지만 집단적 범주로부터 자유로운 단독 주체도 아니다. 대중이나 다중, 또 팬덤으로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집합체로 곧잘 편입되는 독특한 개인이다. 그 틈새에서 명분과 실제의 불일치, 공적부문과 사적영역 간의 이중성, 특유의 도덕주의, 내로남불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한국적 개인주체의 바탕은 무엇이며 개념적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형성되고 강화되며 다른 정체성과의 연관성이 어떠할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한국개념사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화룡점정일지 모른다. 사회사와 개념사가 정치사와 사상사를 넘어 문학사와 종교사와 만나는 새로운 지적 대장정이 필요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