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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전용과 문자병기

가까운 분이 한글한자병용을 주장하는 글을 보내주셨다. 필자가 우리사회의 여론주도층에 속하는 분이고 또 [한글+한자문화]라는 타이틀을 단 발간물의 권두언이기도 해서 정독을 했다. 논지의 핵심은 한글만 전용하는 우리 상황이 한국의 문화나 지식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때론 장애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베트남이 한자를 전면 폐기함으로써 자신들의 오랜 전통문화로부터 심한 단절을 보이고 있음을 참조사례로 꼽으면서 ‘한자병용이 최선책’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발간물을 간행하는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가 어떤 곳인지 검색해보았는데 1998년에 출범한 설립준비위원회 명단에는 원로 언어학자들 이름도 더러 보였다. 홈페이지 첫 화면에 “한자도 위대한 우리 조상이 만든 문자, 한글과 더불어 분명히 國字다”라고 쓰여 있다.

필자가 내세우는 논거는 세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우리말의 개념어는 상당부분 한자로부터 유래한 것인데 한자를 몰라 혼동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 첫 이유다. 어려운 개념어의 적확한 뜻을 확인하는 것이 특히 필요한 전문분야, 예컨대 법학, 의학, 철학 등에서 이런 문제가 실제로 있을 수 있다. 둘째로는 한자로 표기된 전통지식과 한자문화와의 단절이 점점 심해진다는 것이다. 한자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조선시대사를 연구하려는 학생이 줄어드는 것이나 중국 및 일본 학계와의 소통력이 줄어드는 것이 그런 예에 해당할 것이다. 셋째로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한자를 활용하는 어려움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제 한자를 손으로 쓰기 위해 어려운 자획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크지 않아 훨씬 손쉽게 한자를 사용할 기술적 환경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한글만으로는 적확한 뜻이 전달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동음이의어 문제는 나도 종종 접한다. 실제로 전문적 영역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최소한의 한자 병기를 하는 경우가 제법 있고 그런 표기를 독자적으로 시행하는 언론사나 출판사도 있다. 최근에는 한자만이 아니라 외국어 전문용어를 병기할 필요성이 더 늘어나고 그런 경우들을 종종 접한다. 각종 컴퓨터 용어나 첨단기술용어가 특히 그러한데 챗 GPT4 등장 이후 논란이 되는 환각현상 (hallucination) 은 그 좋은 예다. 언어와 어휘, 문자 사이의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아서 시대와 문화에 따라, 또 맥락에 따라 늘 변한다. 그런 유연성 자체가 문자의 힘이 되기도 할테니 필요한 경우 한글과 함께 한자나 외국어를 병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한글전용으로 새로운 우리말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의미를 더 적확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된다. 고고학 분야에서 한자어를 우리말로 고침으로써 소통력을 높인 사례는 박물관 전시실을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자병기를 하던 세대의 저서보다 한글전용 세대가 쓴 책이나 논문이 훨씬 정확하고 소통력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인터넷이나 SNS 상에서 범람하는 각종 축약어나 놀라운 유행어들도 한글세대의 창안물이다. 그 맥락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외래어같지만 그들에게는 가장 정확한 의사소통의 도구일 터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겪는 문자표현의 여러 문제들을 한자불용의 결과만으로 환원하기보다 다양한 문화와 문자가 뒤섞이고 혼융되는 시대상황과 결부하여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자를 특별한 문자이자 문화도구로 학습하는 기회가 좀더 강화될 필요는 있다. 한자문명권에서 유래한 오랜 지식, 개념, 사유, 소통의 자산을 소홀히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재해석할 전문가의 양성은 앞으로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통자료의 해독능력은 다양한 영역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제공하는 소중한 자산이 된다. 한자에 비전문가인 나도 옛 고전의 문장을 접하면서 21세기에 적용가능한 새로운 실마리를 찾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곤 한다. 모든 사람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울 필요 없는 환경이 가능하려면 누군가는 복잡한 전산시스템과 수학의 연산과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자에 정통한 전문가가 지속적으로 양성되어야 우리의 문자문화도 풍성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한글전용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자리잡은 지금이야말로 한자를 포함한 다양한 문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필요한 때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