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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시간 여행

한국사회사학회 주관으로 6월 29-30 이틀간 군산 일대의 답사여행을 다녀왔다. 한국 근대의 역사가 건물과 공간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있는 도시의 하나인 이곳을 오랫만에 다시 방문하니 여러모로 새로웠다. 2022년의 군산은 고층 아파트가 곳곳에 있고 새만금 1차 간척지로 확보된 넓은 공단지대와 고군산군도까지 방제도로와 연육교로 이어져 20여년 전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십여 년전 새만금 제방의 최종연결을 앞두고 이 간척지의 용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을 때 고 김석철 교수가 국제적 바다 도시를 만들자는 주장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유럽의 베니스처럼 한중일을 통합하고 연결하는 미래형 도시, 초국경 공간을 창조하자는 신선한 발상에는 감탄을 하면서도 과연 실현가능성이 있을까 못내 의아했었다. 초국경 국제 바다도시라는 구상이 헛된 망상처럼 여겨질만큼 바다에도 하늘에도 국가간 불신의 담이 높아지고 있는 오늘, 새만금 넓은 간척지를 바라보는 마음은 시원하기보다 다소 착잡했다.

주 답사지역인 군산 구도심의 변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지역 출신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이현경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도시문화재생사업에 선정되어 지방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된지 여러 해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도로를 걷는 것 만으로도 수십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화 세트장을 떠올릴 정도로 각양 모습의 주택과 건물이 새로운 문화공간과 까페들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 골목마다 눈에 들어왔다. 숙소 옆에 ‘신민회 1907’ 이란 간판을 달고 태극기까지 걸려있는 건물이 기념관인줄 알고 들어가보려다가 까페임을 알고 혼자 웃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던 도산 안창호를 군산에서 떠올리게 되다니….시차와 거리를 뛰어넘은 카페공간의 이미지가 흥미롭고 신선했다. 역사적 유산과 흔적을 문화적으로 재구성하여 한국의 압축근대화의 모습을 재현하고 이것을 관광과 소비, 지역경제와 결합하는 것은 분명 뜻있고 의미있는 일이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이런 저런 논란도 있고 실제 도시재생 사업의 명암이 있지만 과거와 현재, 전통과 미래를 삶의 현장과 연결시키는 작업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다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과거를 문화적으로 재현하고 그곳에 현재적 의미를 제공해줄 스토리를 어떻게 구성하고 발전시킬 것인가가 큰 숙제일 듯 싶다. 열정적으로 해설을 해준 현지의 퇴직 언론인의 스토리 구조는 일제의 수탈이란 프레임에만 의존하고 있는 듯 해서 답답했다. 군산의 도시유산이 지닌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성격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저 공간성에 담긴 근대성과 식민성과 현재성을 종합적으로 해석해줄 창의적 스토리가 절실해 보였다. 식민지 시대를 견디면서 때론 타협하고 때론 저항하며 독특한 삶의 지혜들을 찾아내고 전유했을 이 지역의 간단치 않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재현된 문화적 상상이 오늘 이곳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주민들의 자부심과 정체성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교과서적 해설이나 민족주의 서사, 국가주의 담론으로 그 답이 얻어질 리는 없다. 지역사나 도시사, 미시사 차원에서 새로운 담론과 서사, 이론의 창안이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물론 과거를 읽는 학계의 역량이 더 성숙해져야 함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조정우 교수의 안내로 식민지시대 농업이민회사로 유명했던 불이흥업의 현장을 답사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옥구 저수지의 거대한 규모, 풀로 뒤덮여있는 옥구역의 녹슨 철길, 여전히 활용되고 있는 관개시설 등에서 100년 전 이 일대에서 이루어진 변화를 상상해 보았다. 근대 기술을 동원한 간척, 수리조합과 농업이민, 농장제 영농의 변화 속에서 진행되었을 혁신과 수탈, 환영과 거부, 탄성과 소외, 지배와 복종의 복잡한 조합들을 생각해 보지만 넓은 논밭과 농촌의 주거에서 그 흔적을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땅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인간만 굳이 과거의 역사와 유산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려 애쓰는 것일까? 21세기 우리에게 20세기 전반 식민지시대의 의미는 무엇인가? 꽤 오래 공부한 주제인데 이 과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쾌하고 즐거우면서 남겨진 숙제를 떠올리게 만든 유익한 답사였다.